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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 김영란법만으로는 부족하다

입력
2016.08.0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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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청탁 및 금품수수 등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 실행을 한달여 앞둔 8일 오후 정부서울청사 공무원들이 점심 식사 후 청사로 들어가고 있다.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부정청탁 및 금품수수 등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 실행을 한달여 앞둔 8일 오후 정부서울청사 공무원들이 점심 식사 후 청사로 들어가고 있다.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최근 만난 한 정치권 인사는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에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그의 카톡 창을 가득 채우고 있는 지역구민들의 민원, 이를 테면 노골적인 승진 부탁부터 조만간 찾아 뵙겠다는 은근한 민원 암시까지, 숨을 턱턱 막히게 하는 그 골치 아픈 민원의 홍수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란 기대 때문이다. 경찰의 한 고위급 인사도 김영란법이 시행되면 ‘수사 상황을 알아봐 달라’ ‘아들 의경 보직 좀 바꿔달라’ 등 학연ㆍ지연ㆍ혈연을 통해 쏟아지는 온갖 민원을 거절할 수 있을 것이라며 내심 기대감을 표했다.

김영란법으로 인해 3만원이니, 5만원이니 하는 그깟 식사 접대 못 받는 데 대해 공직 사회가 불편해 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도리어 자질구레한 청탁ㆍ민원에서 해방될 수 있다며 반색하는 정치인이나 공직자들이 상당하다.

김영란법의 골격은 크게 두 갈래다. 대가성 입증과 상관없이 금품 수수 자체를 금지하는 내용과 금품 수수와 상관 없이 부정청탁이 오가는 것 자체를 금지하는 내용이다. 식사ㆍ선물ㆍ경조사비 상한액인 이른바 ‘3만원ㆍ5만원ㆍ10만원’조항으로 금품수수 규제 부분이 크게 부각되긴 했으나, 청탁 금지가 몰고 올 변화가 더 만만찮아 보인다.

김영란법이 시행되면 돈이 오가지 않고, 청탁이 실패했더라도 청탁 전화 자체만으로도 제재를 받게 돼 우리 사회에 만연한 청탁 관행의 대격변이 불가피해진다. 공직자 입장에선 민원인의 청탁을 담당자에게 전달했다간 3,000만원 과태료 처분을 받고, 이를 들어줬다면 형사처벌까지 받는다.

이게 얼핏 보면 공직자들을 규제하는 조항 같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이를 명분으로 온갖 귀찮은 청탁을 거절할 수 있고, 계속되는 청탁은 법에 따라 신고하면 된다. 금전적 이득 없이도 그간 각종 연줄과 압력으로 청탁을 전달하거나 청탁을 들어줘야 했던 공직자들로선 김영란법 덕택에 번거롭고 무거운 짐을 벗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국회의원의 민원도 딱 거절해 버리고, 그 민원만 녹음해두면 도리어 그의 약점을 쥘 수 있다. 그러니까 공직자들은 이제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는 마술의 방패막이를 얻은 것이다. 달리 보면 김영란법의 진정한 수혜자는 공직자인 셈이다. 공직자들에게 부탁해서는 안 되는 일을 14가지로 세세히 규정해 그들의 업무를 보호하고 있으니까.

이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속칭 ‘빽’은 더 이상 통하기 어렵게 된다. 그렇다면 자질구레한 청탁에서 벗어난 공직자들은 법과 규정에 따라 공정한 잣대로 업무를 보게 될까. 지역구민들의 자잘한 민원에서 벗어난 국회의원들은 대의제 본령에 따른 입법 활동에 전념하게 될까. 김영란법이 그런 여건을 조성하겠다는 취지지만 이 질문에 성큼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세월호 사건에서 드러났듯 그간 공공부문 개혁의 최대 화두는 관피아 척결 문제였다. 퇴직자 단체에 대한 독점적 업무 위탁, 또는 퇴직자의 로비 활동 등 형태로 전개되는 공직자-퇴직자-업계간 형성된 유착 관계가 공직 부패의 중핵으로 꼽히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 관피아의 민원이야말로 현직 공직자들에겐 그들의 미래까지 보장해주는 어음이라는 점에서 자발적으로 따르고 충성하는,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민원이 아닐까. 김영란법이 시행된다고 부정청탁의 왕좌에 해당하는 전관예우가 없어지리라 보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말하자면 이것이다. 김영란법이 공직사회 외부의 청탁을 막아주는 보호막이 될 수 있지만, 공직사회 내부의 밀어주고 이어주는 ‘끼리끼리 문화’까지 근절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오히려 공직자들의 복지부동과 함께 ‘그들만의 리그’를 강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리 되면 가뜩이나 강력한 규제 권력을 갖고 있는 공직사회가 그 권한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내달릴 소지도 크다. 공직사회의 진정한 변화를 기대하기엔 김영란법만으론 부족한 이유다.

송용창 정치부 차장 hermee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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