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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몰래 보험 들고 뺑소니 연출… 13년 만에 술자리서 덜미

입력
2016.08.08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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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4일 경북경찰청 장기미제사건팀으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보험금을 노린 뺑소니 사망사고를 접수한 금융감독원의 제보였다. 그러나 ‘2003년 경북에서 일어났다’는 대강의 사건 개요 외에 범인을 추정할 만한 단서는 전무했다. 일선 경찰서에 배당됐다면 다시 미궁에 빠졌을 이 사건이 미제팀 눈에 들어온 건 천운이었다. 발생 시기를 중심으로 당시 뺑소니 사고를 헤집던 미제팀 형사들은 13년 동안 범인의 흔적조차 더듬지 못했던 50대 남성의 죽음에 주목했다. 평생 사과농장을 하며 소박하게 살다 영문도 모른 채 눈을 감은 ‘의성 남편 청부살인 사건’의 해결은 그렇게 시작됐다.

13년 만에 드러난 부인의 차명계좌

뺑소니 사망사고의 공소시효는 10년. 공소시효가 이미 2년이나 지났지만 형사들은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대구지검 의성지청으로 내달렸다. 행운은 또 찾아왔다. 미제팀은 공소시효를 넘겨 소각을 앞두고 있던 사건 기록을 극적으로 입수할 수 있었다. 피해자 김모(당시 54세)씨의 통신기록을 근거로 600~700명에 이르는 주변인물 수사가 재개됐다. 수상한 점은 금세 포착됐다. 김씨 부인 박모(65)씨가 사고 직후 여동생(52)과 차명계좌를 통해 돈을 주고 받은 사실이 발견된 것이다. 친자매 사이에 차명계좌로 금전 거래를 해야 할 이유는 딱히 없어 보였다. 계좌내역을 샅샅이 훑어보니 부인 박씨는 2003년 4월부터 1년여 간 50만~100만원씩 돈을 잘게 쪼개 동생에게 수십 차례 보냈다. 동생 박씨가 언니로부터 받은 돈을 재차 수 차례 나눠 인출한 점 역시 미심쩍었다. 당시 동생 박씨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최모(57)씨가 본인 명의로 통장에 거액의 현금을 입금한 증거도 확보됐다.

미제팀은 은행 거래전표를 일일이 대조한 끝에 보험금을 노리고 박씨 자매와 최씨가 공모한 청부살인 범죄로 결론 내렸다. 미제팀 관계자는 7일 “2003년 만해도 보험사기가 흔하지 않던 때라 당시 수사팀은 그런 정황까지 미처 들여다 보지 못했다”며 “더구나 부인은 남편 사망 이후에도 계속 마을에 거주하면서 재혼도 하지 않아 이웃들의 의심을 사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치밀하게 계획된 보험사기

사건의 전모는 충격적이었다. 부인 박씨는 범행 3년 전부터 자신을 수익자로 지정한 두 개의 보험을 남편 몰래 가입했다. 이후 무속인이었던 동생에게 “남편이 자신을 자주 때린다”며 청부 살해를 부탁했다. 이에 동생 박씨는 최씨와 2년 동안 계룡산 등 전국의 무속인 마을을 돌며 형부의 죽음을 비는 기도를 올렸지만 피해자가 죽지 않자 뺑소니 사고로 꾸며 김씨를 살해하기로 마음 먹었다. 준비 기간만 1년이 걸릴 정도로 범행은 치밀하게 계획됐다. 최씨는 중학교 동창 이모(56)씨를 끌어 들여 김씨의 집과 동네 주변도 여러 차례 사전 답사했다.

마침내 범행 한 달 전인 2003년 1월 최씨의 지시를 받은 이씨는 ‘사과농장을 하려는데 가지치기 작업을 가르쳐 달라’며 피해자에게 접근했다. 사람을 좋아했던 김씨는 흔쾌히 이씨에게 3, 4차례 일을 가르쳐 줬다. 친분을 쌓자 일당은 한 달 뒤인 2월 22일을 디 데이(D-day)로 정했다. 농한기인데다 한가한 토요일 저녁이어서 술을 즐기는 김씨를 불러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씨는 마을에서 18㎞ 떨어진 식당으로 김씨를 유인해 만취하게 한 뒤 1톤 트럭에 태워 다시 마을 입구에 내려주고 떠나는 척했다. 이 때가 오전 1시40분. 인기척이 없다는 점을 알아 챈 이씨는 다시 돌아와 비틀거리며 집으로 향하던 김씨를 그대로 들이받고 현장을 떠났다.

김씨는 6시간이 지난 오전 8시쯤 그 자리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이후 부인 박씨 등은 김씨 사망보험금으로 나온 5억2,000만원을 나눠 가졌다. 범행을 감추려 박씨는 본인 몫 2억원만 챙기고 차명계좌 등을 통해 동생에게 3억2,000만원을 송금했다. 동생 박씨는 이 돈을 다시 인출해 현금으로 최씨와 이씨에게 건넸다.

경북경찰청 장기미제사건팀 최명호 경위가 7일 2003년 발생한 '의성 남편청부살인사건' 관련 기록을 확인하고 있다. 경북경찰청 제공
경북경찰청 장기미제사건팀 최명호 경위가 7일 2003년 발생한 '의성 남편청부살인사건' 관련 기록을 확인하고 있다. 경북경찰청 제공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에 어그러진 완전범죄

박씨 일당은 완전범죄를 자신했다. 부인 박씨는 술에 취하면 마을 입구부터 집까지 걸어 오는 남편의 미세한 행동 패턴까지 범행에 활용했다. 보험설계사를 겸했던 동생 박씨는 휴일ㆍ야간에 발생하는 뺑소니 무보험 사망사고의 경우 보험금이 더 지급된다는 사실을 알고 범행 날짜를 특정했다. 공범 이씨도 경찰의 불심검문을 우려해 미리 점 찍어 둔 인근 저수지에서 새벽까지 날을 세운 뒤 해 뜰 무렵에야 이 곳을 벗어났다.

평범한 뺑소니 사고로 끝날 듯 했던 청부살인은 10여년 뒤 엉뚱한 데서 실마리가 풀렸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 공범 중 한 명이 우연히 술자리에서 지인에게 범행을 털어 놓으면서 제보로 이어졌고 수사는 급물살을 탔다. 경찰은 지난 4월 범행에 가담한 일당 4명의 자백을 받아내 전원 구속했다. 이들은 보험금을 모두 탕진하고 공범 한 명은 병까지 얻는 등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아 온 것으로 전해졌다.

피의자 중 일부는 현재 재판을 앞두고 범행을 부인하고 있다고 한다. 경북청 미제팀 최명호 경위는 “지금까지 확보된 증거만으로도 범죄 혐의를 입증하는데 무리가 없다”며 “단서가 희박한 장기미제 사건도 일말의 가능성만 있으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대구ㆍ의성=김성환 기자 bluebird@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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