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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법은 더치페이법" 접대문화 180도 바꿀 열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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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상급자가 계산 관행 못 버려
식당들 따로따로 내면 불편
젊은 손님들 중심 더치페이 확산
음식점 셀프 주문자판기도 늘려
김영란법 계기로 변화 바람 솔솔
지난 3일 저녁 서울 광화문의 한 퓨전 한식당 앞.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온 한 언론사 기자 김모(39)씨가 같이 식사를 한 금융회사 홍보팀 직원 A(38)씨에게 “계좌번호를 불러달라”고 했다. 두 사람의 이날 저녁 식대는 7만 8,000원. 김씨는 그 자리에서 간편송금 앱을 통해 A씨에게 3만 9,000원을 이체했다. 평소 한 사람이 몰아서 밥이나 술값을 내지만 이날은 달랐다.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 시행을 앞두고 괜한 오해를 사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 더치페이(각자내기)를 한 것이다.
“김영란법은 더치페이법이다”고 한 김영란 전 국민권익위원장의 언급처럼 더치페이 문화가 우리 사회에 뿌리 내린다면 접대문화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누구를 만나 얼마나 먹는지 등 복잡다양한 상황에서 위법 여부를 따지는 문제도 깔끔하게 해결된다. 다만 심리적으로 더치페이 문화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우리의 문화와 인식을 바꾸는 게 관건이다.
“더치페이요? 김영란법이 시행된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가능한 얘기라고 보십니까?” 4일 만난 대기업 홍보ㆍ대관 업무 담당자와 정부 부처 공보 담당자들은 한결같이 더치페이 문화 실현에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김영란법 적용을 받는 대상들 사이에서는 회의적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한 대기업 국회 담당 직원은 “기업에 필요한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 먼저 만나자고 요구하는 입장에서 더치페이를 하자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한 정부 부처 공무원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 갑을관계가 맺어져 있는데 을이 갑한테 ‘더치페이 합시다’ 할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실제로 검찰과 법원 등이 몰려 있는 서초동과 여의도 국회의사당 일대의 경우 더치페이하는 일행은 찾아보기 힘들다. 서초동에서 순대국집을 하는 최덕연(40)씨는 “우리 가게를 비롯한 주변 음식점들을 찾는 손님 중에는 공무원들이 많은데 대부분 제일 지위가 높아 보이는 분들이 계산을 한다”고 말했다. 각자 먹은 것을 각자 계산하는 일은 보기 드문 일이라는 것.
꼭 얻어먹으려 하는 게 아니어도 더치페이는 한국 고유의 정이 없어 거부감이 든다. 한 언론인(46)은 “업무상 관계로 만나 가까워진 교수나 공무원 등과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는데 한번은 얻어먹고 다음 번에는 내가 사곤 한다. 서로 이런 관습에 익숙하지만 그렇다고 계산서를 쪼개 각자 계산하기는 너무 멋쩍어 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음식점 주인들의 분위기는 어떨까? 더치페이는 계산에 시간이 오래 걸려 음식점 주인들 입장에서는 거부반응이 크다. 서울 강남과 명동 등의 일부 식당에는 점심시간 등 피크타임 때 ‘더치페이 사절’이라는 안내문구가 붙어 있다. 여의도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김모씨는 “손님들이 많이 몰리는 점심시간에 4,5명이 와서 다 따로 계산하면 새로 온 손님을 받을 시간을 놓치게 된다. 반가울 턱이 없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김영란법 시행을 앞두고 음식점 주인들도 변화에 적응하려는 모습들이 눈에 띄었다. 광화문에서 고깃집을 운영 중인 양모(43)씨는 “최근 더치페이 손님들이 늘어서 카드 결제기를 추가 설치했다”며 “장사하는 입장에서 조금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손님들의 요구에 맞춰야 하는 거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대학동에서 만난 음식점 주인 이모(30)씨 역시 “처음에는 더치페이 하는 손님들 때문에 귀찮은 게 사실이었다”며 “하지만 이제 두 사람이 와도 각자 계산하는 경우가 더러 있어 카드를 모아달라고 해서 요령껏 빠르게 계산한다”고 했다.
김영란법 적용 대상들과는 대조적으로 젊은 직장인과 대학생들 사이에선 더치페이 문화가 이미 꽤 보편적이다. 4일 낮 12시 강남역 인근의 한 음식점. 셀프 주문기계를 통해 메뉴를 정하고 결제를 하던 직장인 한모(25ㆍ여)씨는 “직장 상사가 함께 식사를 하러 가자고 하면 자기가 계산을 한다는 이유로 메뉴를 통일시키는 일이 많은데 이 곳처럼 더치페이를 하는 곳에 오면 부담 없이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있어 즐겨 찾는다”고 말했다. 해당 음식점 체인 본부장인 정보근(35)씨는 “셀프 주문기계 가격이 대당 350만원 정도로 고가임에도 불구하고 강남권에 있는 직장인들 사이에서 더치페이 문화가 많이 퍼져 있어 설치했다”며 “예상보다 손님들의 반응이 좋은 편”이라고 말했다.
최근 공인인증서와 보안카드 없이 소액을 송금할 수 있는 간편 송금 모바일앱이 늘고 있는 것도 더치페이 문화를 확산시키는 한 요인으로 꼽힌다. 신림동 고시촌 인근 중식당에서 만난 취업준비생 김모(24ㆍ여)씨는 대학 선배 박모(27)씨와 식사를 한 뒤 곧바로 모바일앱을 통해 식사 비용의 절반을 그 자리에서 박씨한테 보냈다. 두 사람은 “요즘 카드 계산이 편리하게 돼 있어 더치페이를 하는 데 큰 부담이 없다”고 말했다.
시민들은 김영란법 때문에 요란을 떠는 분위기가 오히려 납득하기 힘들다는 반응이다. 서초동에서 만난 시민 최염(32)씨는 “일반 서민들에게는 한끼에 3만원이라는 식사 비용이 결코 적은 게 아닌데 그걸 놓고 논란이 된다는 사실 자체가 이해하기 힘들다”고 했다.
더치페이 문화가 정착하면 단지 계산서를 쪼개는 것 이상으로 접대문화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우선 상대방의 부담을 감안해 너무 값비싼 식사자리는 자제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2차, 3차 등 심야까지 이어지는 장시간, 고액의 접대문화가 자연스럽게 줄어들 것이라는 예상이다. 대접받았다는 인식이 줄어들면서 암암리에 형성되는 ‘보답 심리’도 피할 수 있다. ‘접대’가 아니라 필요한 정보를 교환하고 친분을 쌓는 ‘친목’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다는 뜻이다. 중견기업 홍보팀 직원 김모(31)씨는 “더치페이 문화가 확산되면 회사 입장에서도 무리한 접대가 줄어들 것으로 생각된다”며 “이는 결국 불필요한 예산 낭비를 막고 이를 통해 필요한 곳에 예산을 더 투입할 수 있는 선순환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얼마까지 시켜먹어야 위법이 아닌지 골치 아프게 계산하거나 편법을 동원해야 하는 문제가 깔끔하게 사라지는 것도 물론이다. 자신이 먹은 비용을 자기가 부담하면 1만원어치든 5만원어치든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더치페이에 대한 인식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김귀옥 한성대 사회학과 교수는 “그간 우리 사회에서 더치페이는 정 없는 문화를 상징하는 것처럼 치부됐지만 이러한 부정적 인식을 불식하고 부정부패와 도덕적 해이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라고 여겨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체면과 권위를 중시하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 때문에 그간 더치페이 문화가 자리잡지 못했다”며 “김영란법을 계기로 이런 분위기를 바꿔 공직자와 언론인 등 김영란법 적용 대상자들에게 자연스레 더치페이 문화가 스며들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성환 기자 bluebird@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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