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는 기사
모든 청탁 관행에 금지령… 모두가 “NO” 할 수 있는 명분 생겨
이미 가입된 회원입니다.
만 14세 이상만 회원으로 가입하실 수 있습니다.
인사 등 14가지 직무 청탁은 앞으로 금품수수 없어도 처벌
상사의 청탁형 지시도 불법… 공직사회 분위기 대변화 전망
오랜 세월 이어진 청탁문화, 예상보다 빨리 사라질 수도
# 한 지방경찰청의 자수성가형 A씨는 ‘힘 깨나 쓴다’는 국장 직에 오른 뒤 승진의 기쁨도 잠시, 말 못할 고민에 잠을 자주 뒤척인다. “지방 순환 근무를 가게 된 아들이 멀리 떨어져 근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친척, “의경으로 입대한 아들이 시위 진압과 같은 위험한 일을 안 했으면 좋겠다”는 교회 아주머니, “고향에서 경찰서장을 하고 싶다”는 후배, “음주 단속에 걸렸는데 빼줄 수 없느냐”는 밤늦게 걸려온 친구의 전화 등 A씨가 얽힌 거의 모든 인간 관계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청탁 때문이다. 매몰차게 거절했다간 “의리가 없다”거나 “돈을 안 줘서 그러느냐”는 원성을 사고, 담당 부서에 청탁했다가 일이 잘못되면 자리가 위태로울 수 있어 전전긍긍하고 있다.
# 지방자치단체 보조금 업무를 담당하는 B씨는 모 어린이집을 잘 봐달라는 지방의원 C 때문에 보육교사수를 부풀린 걸 뻔히 알고도 보조금을 더 배정할 수 밖에 없었다. 혹시 감사에 걸릴까 걱정도 되지만, 원칙 대로 했다간 C 의원의 ‘갑질’에 끊임없이 시달릴 게 뻔하기 때문이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청탁에 잠 못 이루던 A씨나 지방의원의 민원에 시달리던 B씨는 앞으로 이런 고민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9월 28일부터 시행되는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이 ‘당당하게 거절’할 수 있는 명분이 되기 때문이다.
김영란법이 시행되면 A씨가 부하 직원에게 청탁만 하다 걸려도 과태료 3,000만원 처분을, C의원의 청탁을 받아 보조금을 부당하게 집행한 B씨는 형사처벌까지 받는다. 돈을 받지 않아서 이득을 취한 게 전혀 없더라도 부탁을 했거나, 부탁을 들어준 이유만으로 제재를 받는 것이다. 이 같은 청탁의 불법화와 위험성이 도리어 공직자들에겐 과감하게 청탁과 단절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란 기대가 나온다. 송준호 흥사단 투명사회운동본부 상임대표는 “학연 혈연 지연 등으로 얽힌 한국의 사교문화에서 청탁을 거절했을 때 감당해야 할 타격이 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청탁을 감행하는 분위기가 있었다”며 “김영란법 시행으로 대다수의 선량한 공직자들이 부정의 위험으로부터 보호 받을 수 있게 됐다”고 평가했다.
그간 공직사회에선 청탁 보다 청탁 거절이 더 어렵다는 하소연이 많았다. 한 중앙부처 국장급 공무원은 “동문 선배, 친척, 옛 상사의 청탁을 거절했다간 자기를 무시한다며 앙심을 품기 일쑤여서 이를 거절하려면 의절하거나 왕따를 당할 각오까지 해야 한다”고 말했다. 각종 지역구 민원이 쏟아지는 국회 의원실도 속앓이를 하기는 마찬가지다. 영남 지역의 3선 의원실의 한 보좌관은“병원 입원, 공무원 승진, 입찰 등 하루에도 민원이 2,3건씩 들어온다”며 “안 통하는 민원인 줄 뻔히 알면서도, 챙기긴 했다는 생색은 내야 해서 이리저리 전화를 돌리느라 할 일 다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청탁 관행이 만연한 것은 의식과 제도 양 측면에서 청탁을 조장하는 악순환이 거듭됐기 때문이다. 청탁을 규율하는 법제도가 없다 보니 큰 돈이 오가지 않으면 청탁이 문제라는 의식 자체가 없고, 기준이 모호한 업무 영역에선 직위를 이용한 청탁이 통용돼 왔던 것도 공공연한 비밀이다. 실제 권익위가 지난 2011년 일반 국민, 공직자 등 4,530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가장 흔한 부패 유형으로 일반국민 31.4%, 공무원 29.1%가 ‘직위를 이용한 청탁’을 꼽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일반 국민 뿐만 아니라 공무원 스스로도 ‘직위를 이용한 청탁’을 공직 부패의 가장 큰 요인으로 지목한 것이다. ‘갑’의 위치에 있는 직장 상사에 맞서기 어려운 현실에서 그 만큼 많은 부정청탁이 이뤄졌다는 뜻이다.
이 같은 청탁 관행에 일대 메스를 가하는 게 김영란법이다. 김영란법 체제에선 금품수수가 없더라도 14가지 직무의 청탁은 모두 불법이 된다. 사실상 공공부문 전 분야에서 관행이란 이름으로 이뤄지던 모든 청탁에 대한 금지령이다. 김영란법 시행으로 청탁관행 혁파를 위한 제도의 빈 틈이 메워지는 만큼, 청탁 거절 문화도 자리를 잡아야 하는 때가 온 것이다. 강수정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부정한 청탁에 대한 당당한 거절 문화가 자리 잡을 경우 청탁 문화는 예상보다 빨리 사그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공직자가 직장 상사의 청탁을 거절하고 이를 신고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김영란법 시행으로 직장 상사의 청탁이라도 사후에 적발될 경우 업무 담당자가 형사 처벌을 받는 만큼 거절의 근거와 동기는 충분하다. 더군다나 김영란법은 같은 사람에게 두 차례의 청탁을 받을 경우 이를 신고하는 의무도 부과해 미신고 시 징계 처분을 내린다. 이 같은 제도적 근거가 공직 사회 내부의 대변화를 일으키는 방아쇠가 될 수 있는 대목이다. 일각에선 회의론도 나오지만, 아래에서부터 ‘거절 문화’가 확산될 수 있다는 기대도 적지 않다. 권익위 관계자는 “퇴직한 공직 선배를 포함한 상관들의 청탁을 직접 거절하기는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며 “하지만 청탁자와 직접적 인연이 있고 사적 관계가 있을 경우 김영란법의 취지와 내용을 들어 청탁 수용의 어려움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권익위는 청탁 내용별 대응 매뉴얼을 제작해 배포하며 일선 공직자들의 변화를 독려하고 있다. 송준호 상임대표는 “수십 년의 관행이 법 하나로 하루 아침에 달라지기는 어려울 것”이라면서도 “김영란법이 공직자들에게 당당하게 거절할 수 있는 근거와 권리를 부여한 만큼 이 법이 문화로 정착하는 데 있어 공공부문의 사명감과 역사의식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정민승 기자 msj@hankookilbo.com
신고 사유를 선택해주세요.
작성하신 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로그인 한 후 이용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구독을 취소하시겠습니까?
해당 컨텐츠를 구독/취소 하실수 없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