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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덕 칼럼] 교양과 우리의 대학

입력
2016.07.14 15:03

올 상반기 우리 사회의 많은 분야가 이른바 구조조정 압박에 분주하고 어수선했다. 상대적으로 평온한 곳이라 평가받던 대학도 이번에는 예외가 아니었다. 교육부가 미래의 직업 전망과 인구 상황을 예측한다며 내세운 몇몇 대형 사업의 위력은 대학가를 흔들기에 충분했다. ‘프라임’ ‘코어’ 등으로 불린 이 사업들에 당선 여부를 떠나서도, 우리 대학들은 내부 개혁(?)에 박차를 가할 눈치다. 그 내용은 소위 비인기학과 정원 축소 또는 폐지, 그리고 그에 따라 남는 정원을 취업에 유리한 학과로 돌리는 것으로 요약된다. 구조조정 대상에 오르내리는 학과의 학생과 교수들은 당연히 반발하고 있다. 그들은, 대개 인문학에 속하는 그 학과들이 교양학부로 강제 통폐합되고 그 전공 교수들이 교양교육만을 전담하게 될 가능성을 특히 우려한다.

현재 우리가 대학에서 교양교육이라 부르는 것은 영어권 단어로 ‘리버럴(Liberal) 교육’의 번역어다. 이는 인간의 사고력과 비판 정신 함양을 목표로 하는 교육으로, 사실 중세 이후 대학의 역사와 함께한 대학교육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교수들의 반발과 우려가 충분히 정당하게 느껴질 만큼, 교양교육은 현재 우리 대학에서 전혀 다른 지위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근대 서양식 대학교육을 사실상 처음 시행했던 일제 강점기부터가 시작이었다. 당시 일제는 여러 다른 제도처럼 대학 학제도 독일의 것을 모방했다. 자유교육이라고 번역할 법한 리버럴 교육을 일제가 독일어의 ‘빌둥’(Bildung)이라는 단어에 해당하는 교양교육으로 번역한 것도 여기에 이유가 있었다. 당시 일본이 받아들인 독일 대학 모델은 19세기 초 훔볼트 개혁 이후의 대학 체제를 반영했는데, 흥미롭게도, 그 체제에서는 과거 전통과 달리 대학에서의 교양교육 비중이 상대적으로 축소되어 있었다. 이는 당시 ‘독일’ 지성들이 교양교육을 무시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들 생각은 교양교육을 중등교육 말미에 앞당겨 먼저 시행하고, 대학에서는 보다 전문적인 교육에 집중한다는 것이었다. 이 연유로 독일을 비롯한 몇몇 유럽 국가들의 우리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교육기관은 매우 높은 수준의 커리큘럼을 현재도 가지고 있다.

이런 맥락이 생략된 채, 독일 대학의 겉모습만이 수입된 식민지 대학에서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대학은 원래가 전문 교육만을 위한 공간이라는 그릇된 인식이 자리 잡은 반면, 역사적으로 유럽 대학교육의 중심이던 교양교육은 당시 학부 커리큘럼에 부각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가치를 홀대받게 된 것이다. 이에 더해 식민지 현실상, 교양교육은 의도적으로 경시되기도 했다. 일제는 사고력과 비판 정신이 고취된 식민지 지식인을 육성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방 이후 우리 대학은 새로이 미국식 체제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 미국 대학은 훔볼트 이후 독일과 달리, 교양교육을 대학의 학부가 맡아야 한다는 보다 대학 전통에 충실한 체제를 견지하고 있었다. 그 결과 우리 대학 커리큘럼에서 교양과목 비중은 갑자기 커졌다. 하지만 이런 양적 확대와 관계없이 교양과목에 대한 홀대는 여전했다. 초기 우리 대학의 주역들 대부분이 일본 대학교육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대학의 전임교수들이 교양과목을 가르치는 경우는 드물게 되었고, 대신 그 ‘부차적’ 과목을 전담하는 시간강사는 양산됨으로써, 저 악명 높은 우리 대학의 기형적 구조가 만들어졌다.

이에 더해 우리 현대사의 근대화 물결 속에 교양이라는 말에 새로운 어감이 붙으면서 교양교육은 대학에서 더욱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났다. 대대적 도시화로 인한 이농 현상, 그리고 농촌적인 것보다 도시적인 것을 보다 발전된 것으로 믿던 분위기 속에서, 교양은 도시 중산층 생활을 상징하는 담론이 된 것이다. 여기서 교양은 소위 ‘촌스러움’의 반대말로, 에티켓, 대화술, 위생 관념, 품위 등을 가진 상태를 일컬었다. 자연스럽게 교양과목의 이미지는 사고력과 비판 정신 함양을 위한 학문적 장치보다는, 중산층의 삶을 고상하고 세련되게 만드는 일상의 도구에 가까워졌다. 그 후 때때로 경주된 일부 국내 학자들의 교양교육 개념 정립을 위한 노력도 결국 이런 이미지를 교정하지는 못했다. 교양강좌라는 말이 대학 못지않게 백화점과 어울려 보이는 것은 여전한 우리 현실의 반영이다.

오늘날 혼란스러운 우리의 대학은 눈앞의 사회적 수요만을 사실상 유일한 지침으로 여기는 듯하다. 하지만 최근의 사회 변화는 너무도 빨라서 대학은 물론이고 웬만한 기업마저 그 수요를 예측하고 따라가지 못한다. 대학원이야 그럴지 모른다 치겠지만, 본질적으로 교육 기관인 대학의 학부가 계속해서 급격히 변화하는 현실에 쫓아다니며 그 방향을 끊임없이 바꿔야 하는지 심히 의문이다. 이런 변화의 시기일수록, 대학교육은 변화를 그저 따라가는 것을 넘어 이를 해석, 재고 및 비판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사고력 함양에 힘써야 한다. 그 어느 때보다 교양교육이 중요한 시점은 지금인 것 같다.

노경덕 광주과학기술원 교수ㆍ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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