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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졸이 취업한 것만도 감지덕지? 이게 정상은 아니잖아요”

입력
2016.07.12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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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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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후 한 달 동안은 심장이 덜컥거려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을 지경이었어요.”

A(19)군의 꿈은 짓밟히다 못해 이젠 악몽이 돼 버렸다. 수년간 키워왔던 꿈에, 아니 열심히 노력만 하면 꿈을 꽃피울 수 있다던 세상에 배신당했단 사실을 깨닫는 데 걸린 시간은 겨우 3개월에 불과했다. 도대체 A군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A군은 방송 PD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대학 대신 특성화고를 선택했다. 방송기술을 전공하며 독학으로 포토샵 등 관련 자격증을 땄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 영상 공모전 등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더니, 지난해 8월 유명 지상파 외주제작업체에서 현장실습을 하게 됐다. 친구들의 축하가 쏟아졌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현실은 비참했다. 불규칙한 스케줄 속에, 1주일에 5일간 밤샘도 예삿일이었다. 밤샘 촬영 땐 냉동창고 같은 세트장에서 하루 다섯 시간 정도 토막잠을 자는 게 전부였다. 선배들 등쌀에 화장실도 맘대로 못 가고, 무거운 조명을 옮기면서 손목에도 무리가 왔다.

몸도 마음도 급격히 지쳐갔다. 하지만 야근 수당도 없이 겨우 월급 100만원 정도 받으며 하는 일 치곤 너무하다 싶었다. 스트레스가 극도에 달하자 걸핏하면 배탈이 났고, 누가 툭 건드리기만 해도 눈물이 났다.

A군은 “불안 증세가 너무 심해서 이대론 못 견디겠다 싶어서 퇴사를 결심했다”며 “학교마저 (취업률 관리 때문에) 복교 신청을 잘 받아주지 않아 더 힘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방송 일이 원래 힘들다고 하니 나만 그런 줄 알았다”며 “하지만 구의역에서 숨진 김군은 물론 꿈을 좇아 현장에 간 수많은 특성화고생은 되레 현장에서 꿈을 짓밟힌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A군은 오랜 꿈이었던 PD는 고사하고, 방송계 취업은 아예 마음을 접었다.

학벌보다 현장 교육으로 능력을 길러 좋은 일자리를 얻게 한다는 특성화고의 취지가 무색해졌다. ‘현장 교육’은 심심찮게 노동력 착취로 둔갑하고, ‘취업 역량 강화’는 숫자뿐인 취업률의 함정에서 허덕이고 있다.

허울뿐인 취업… 좋은 일자리 대신 착취의 트라우마만

특성화고의 첫 번째 문제는 졸업생들이 양질의 일자리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통계에 따르면 특성화고 졸업생의 취업률은 2009년 16.9%에서 지난해 47.6%로 3배 가까이 껑충 뛰었다.

하지만 속 빈 강정이 태반이다. 지난해 7월 고용노동부는 인턴 다수 고용 사업장의 68%가 노동법을 위반했다는 감독 결과를 발표하면서 “인턴제도는 청년들이 적성에 맞는 일자리를 탐색하는 실습ㆍ직무경험 목적으로 활용돼야 하며, 청년들의 인턴 수요를 빌미로 일반 근로자를 대체하거나 비용절감 목적으로 이용돼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취업률 수치만 그럴싸할 뿐 실제론 은성PDS에 입사했다가 위험한 일을 하다 구의역에서 숨진 김군이나 현장을 겪은 후 오히려 방송계의 꿈을 접은 A군처럼 부당한 처우에 노출되기 십상이란 얘기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제공하는 취업정보가 부실하기 때문에, 좋은 일자리로 실습을 나가거나 취업하기 힘들다고 지적한다. 학교에선 근무 여건이나 처우 등은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채 일단 현장실습을 나가보라고 하기 일쑤다. 취업률을 높이기 위해서다. 서울의 한 특성화고 3학년인 B(19)군은 “전공을 살려 게임 개발업체에 지원해 면접을 봤다”면서도 “열악하다는 것 외엔 정확한 연봉과 처우도 모르고, 경력도 인정되지 않는다고 들었지만 노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아 지원하게 됐다”고 털어놨다. 문제는 이마저도 B군 스스로 찾아서 지원했다는 것이다. 학교만 믿고 있었다간 전공과 전혀 무관한 어떤 업체에 취업을 강요당했을지 모를 일이다.

이런 식이니 취업 기간이 오래 이어질 리 없다. A군은 “반 친구 중 절반 정도만 전공을 살려 취업했는데, 1년 정도 지난 지금까지 첫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사회의 쓴맛을 본 탓인지 퇴사한 친구들과는 연락도 잘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난 5월 경기도 성남의 한 외식업체에서 하루 12시간 이상 격무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특성화고 졸업생도 비슷한 경우다. 전공과 아무 관련 없는 업체였지만 “어디든 취업하라”는 교사 등쌀에 떠밀리듯 학교를 떠나야 했다.

노경란 성신여대 교육학과 교수는 고졸 채용을 늘리는 제도만 만들었지, 고졸자에 대한 학교나 취업 현장의 인식은 여전하다는 데 가장 큰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노 교수는 “학교는 학생들의 인생 첫 단추를 끼운다는 관점에서 인생 로드맵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며 “일자리를 취업이 아닌 경력개발단계로 구상할 수 있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아울러 “취업 현장에선 나이가 어리고 경험도 적은 고졸자들을 단순한 노동력이 아닌 조직의 동등한 일원으로 대우하려는 인식이 없다”며 “고졸 채용을 늘리기 전에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적 준비가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전공ㆍ적성 무관 취업, 특성화고 설립 취지와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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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특성화고 졸업생들이 열악한 일자리에만 내몰리는 것은 아니다. 대기업이나 공기업 등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좋은 직장’에 취직한 경우도 있다. 정부의 고졸 채용 정책에 호응한 기업들이 특성화고 출신을 채용한 경우다. 그러나 이 같은 취업 역시 전문 분야 능력을 살리는 특성화고의 취지에는 부합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뒤늦게 선택을 후회하더라도 ‘고졸’로서 새롭게 자신의 적성이나 미래의 비전에 맞는 일자리로 이직하는 것도 쉽지 않은 한계가 있다.

금융 공기업 입사 5년차인 C(23)씨는 “20살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해 회사는 내 인생의 거의 모든 것이 됐다”며 “내 삶에 이제 다른 가능성은 없는 것 같아 고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주변의 시선은 “꿈이나 가능성 타령하지 말고, 고졸인데 이렇게 좋은 회사 다니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생각하라”는 것이었다.

답답했던 C씨는 비슷한 사람끼리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소셜미디어 비밀그룹을 2년 전부터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룹에 속한 이들의 공통된 문제는 자신의 꿈이나 적성에 대한 고려 없이 주위에서 좋다고 하니까 무작정 취업한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고교 진학 전부터 진로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병욱 충남대 기계금속공학교육과 교수는 “특성화고 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성격 유형 검사 결과, 참여자의 70% 이상이 전공과 적성이 맞지 않는 것으로 나온 적이 있다”며 “대학을 건너뛰고 사회에 진출하는 특성화고 학생들에겐 이런 불일치 문제가 고스란히 드러난다”고 진단했다.

미국의 ‘학교-직업 이행 정책’(school to work transition act)처럼 학생들에게 직업교육이나 견습과정, 산학협동교육 등을 제공, 졸업 후 안정적인 일자리로 이행할 수 있도록 유도하면서 학생을 보호하는 제도도 필요하다. 이 교수는 “최근 불거진 일련의 사건들은 특성화고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학생들을 운용하는 기업과 사회 환경의 문제가 더 크다”며 “미국처럼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김경준기자 ultrakj75@hankookilbo.com

이원준 인턴기자(고려대 정치외교학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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