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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풍에서 태풍으로 ‘정운호 게이트’ A부터 Z까지

입력
2016.06.29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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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호(51ㆍ구속기소) 전 네이처리퍼블릭 대표가 지난해 100억원대의 해외 원정도박을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질 때만 해도 그는 도박을 즐기다 수사망에 걸려든 화장품업계의 큰 손이었을 뿐이었다. 그가 세상을 뒤흔든 게이트의 핵이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어마어마한 법조비리 의혹은 4월 어느 날 서울시내 한 경찰서에서 비롯됐다. 부장판사 출신 최유정(46ㆍ구속기소) 변호사가 서울구치소에서 정 전 대표를 접견하던 도중 그에게 폭행을 당했다며 강남경찰서에 접수한 고소장 한 장이 돌풍을 몰고 왔다. 폭행과 다툼의 이유를 설명하던 중 불거진 ‘착수금 20억원’과 ‘성공보수 30억원’이라는 마법의 단어는 이제 전관예우와 법조 브로커 등 법조계의 온갖 치부를 세상에 드러내 보일 참이었다.

정운호 전 네이처리퍼블릭 대표와 판·검사 출신의 최유정 변호사, 홍만표 변호사 등이 연루된 '정운호 게이트'는 브로커의 로비, 전관예우 등 법조계의 고질적 병폐를 그대로 보여줬다. 게티이미지뱅크
정운호 전 네이처리퍼블릭 대표와 판·검사 출신의 최유정 변호사, 홍만표 변호사 등이 연루된 '정운호 게이트'는 브로커의 로비, 전관예우 등 법조계의 고질적 병폐를 그대로 보여줬다. 게티이미지뱅크

화장품업계 ‘미다스의 손’ 도박에 빠지다

중졸 출신의 정 전 대표는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보따리 장사로 시작해 종합화장품 대리점을 운영하며 중견 사업가로 성장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는 2003년 중저가 화장품 브랜드 ‘더페이스샵’을 출시해 대박을 쳤다. 이 회사를 2005년부터 2010년에 걸쳐 홍콩사모펀드와 LG생활건강에 팔아 넘겨 총 2,000억원대의 차익을 남겼다. 화장품업계의 ‘미다스의 손’으로 불리게 된 그는 2009년 또 다른 화장품 브랜드 ‘네이처리퍼블릭’을 내놓으면서 화려하게 복귀했다. 공격적인 사업 확장과 중저가 제품의 히트, 중국 관광객들의 싹쓸이 구입에 힘 입어 회사는 고속성장을 거듭, 지난해 매출액이 2,800억원대에 달했다. 정 전 대표는 중국 진출을 확대하기 위해 상장을 추진했는데, 상장이 이뤄지면 그에게 떨어지는 주식가치만 1조~2조원에 달할 것이란 전망까지 나왔다.

승승장구하던 정 전 대표의 발목을 잡은 건 도박이었다. 해외 원정도박을 했다는 제보로 그는 2013년 이후 경찰과 검찰에서 세 차례 수사를 받았다. 1ㆍ2차 수사에서는 무혐의 판단을 받았지만 지난해 10월 서울중앙지검 강력부 수사로 결국 구속됐다. 혐의는 2013년 3월부터 2014년 10월까지 마카오와 필리핀 마닐라의 카지노에서 100억원대 원정도박을 했다는 것. 집행유예를 기대했던 1심에서 징역1년의 실형을 선고 받자 그는 충격을 받았고, 항소심에서 보석으로 빠져나가거나 실형을 면하기 위해 무리수를 두게 됐다. 이 과정에서 큰 일이 터져버린 것이다.

법조 비리 의혹의 중심에 선 정운호 전 네이처리퍼블릭 대표. 한국일보 자료사진
법조 비리 의혹의 중심에 선 정운호 전 네이처리퍼블릭 대표. 한국일보 자료사진

수임료 반환 다툼에서 법조 비리로

폭행 사건 고소장 내용이 공개되자 최 변호사는 착수금으로 20억원을 받아 챙긴 ‘돈독 오른 변호사’가 돼 버렸다. 그러자 최 변호사 측은 강수(사실은 악수)를 뒀다. 최 변호사와 ‘사실혼 관계’라고 주장하는 브로커 이동찬(44ㆍ구속)씨는 법조비리 의혹을 제기해 판을 키우기로 작정했다. 정 전 대표의 구명 로비를 맡았던 법조계 ‘8인 리스트’를 언론에 흘렸다. 검사장 출신 홍만표(57ㆍ구속기소) 변호사와 브로커 이민희(56ㆍ구속기소)씨, 이씨와 친분이 있던 현직 판검사들의 실명이 거론됐다.

이씨는 지난해 12월 29일 서울중앙지법의 L 부장판사가 정 전 대표의 항소심 재판장으로 배당된 당일 저녁 그를 만나 식사를 대접하며 구명로비를 시도했다. 두 사람은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 L 부장판사는 이튿날 법원에 회피 신청을 해 사건은 다른 재판부로 넘어갔다. 그러자 올해 3월 정 전 대표 측은 인천지방법원 K 부장판사에게 성형외과 의사인 이모씨를 통해 담당 재판부에 영향력을 행사해 달라는 로비를 벌였다. K 부장판사의 딸은 과거 네이처리퍼블릭이 후원하는 미인대회에서 1위로 입상해 구설에 올랐으며, 정 전 대표 주변에선 ‘인천 형님’으로 불렸다.

정 전 대표의 다음 카드는 최유정 변호사였다. 정 전 대표는 서울구치소에서 알게 된 이숨투자자문 대표 송창수(40ㆍ수감 중)씨가 다리를 놨다. 송씨의 측근이 브로커 이동찬씨였고, 그를 통해 최 변호사까지 연결됐다. 정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의 보석과 집행유예를 원했다. 착수금 20억원에 성공보수 30억원을 약속했다. 하지만 보석신청이 기각되고, 항소심에서도 실형이 유지되자 정 전 대표는 이미 지급한 착수금 중 10억원을 돌려달라고 다투다 결국 폭행사건이 발생했다.

정운호 전 네이처리퍼블릭 대표와 송창수 전 이숨투자자문 대표로부터 100억원대의 부당 수임료를 챙긴 혐의를 받고 구속된 최유정 변호사의 법률사무소 앞 모습. 뉴스1
정운호 전 네이처리퍼블릭 대표와 송창수 전 이숨투자자문 대표로부터 100억원대의 부당 수임료를 챙긴 혐의를 받고 구속된 최유정 변호사의 법률사무소 앞 모습. 뉴스1

수임료 100억… 기상천외 법조비리 의혹

검찰은 5월 9일 최 변호사를 체포하며 법조비리 수사를 본격화했다. 최 변호사는 올해 1월 정운호 전 대표의 도박 사건을 수사했던 서울중앙지검 강력부 S 부장검사와 재판을 담당한 공판부 J 부장검사를 만나 “보석에 반대하지 말라”고 요청한 의혹을 받고 있다. 검찰은 실제로 “재판부가 알아서 해달라”는 적의처리 의견을 제출했고, 양형부당으로 항소해 놓고 오히려 구형을 6개월이나 낮췄다. 두 부장검사는 최 변호사와 사법연수원 동기에 동향이어서 의혹은 더욱 커졌다.

최 변호사는 송창수씨 사건을 맡으며 50억원을 받아 챙긴 사실도 드러났다. 검찰 조사결과 그는 지난해 6월 송씨가 인베스트 투자사기 사건으로 1심 재판을 받고 있을 때 “재판부에 청탁해 집행유예를 받게 해주겠다”며 20억원을 받았다. 하지만 송씨가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 받고 법정 구속되자 두 달 뒤 “항소심 재판부에 청탁해 보석으로 석방시켜 주겠다”며 다시 10억원을 받았다. 송씨는 항소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 받고 풀려났다. 이어 최 변호사는 송씨가 이숨투자자문 사건으로 수사를 받자 “금융감독원, 수사기관, 법원 등 관계기관에 청탁해 사건을 해결해 주겠다”며 재차 20억원을 받아냈다. 이 같은 사실만으로도 최 변호사가 법원에 부당한 로비를 시도했고 전관예우를 받았다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최 변호사는 5월 27일 변호사법 위반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정운호 전 네이처리퍼블릭 대표에 대한 검찰 수사 과정에서 '전관 로비'를 벌인 혐의 등으로 기소된 홍만표 변호사. 연합뉴스
정운호 전 네이처리퍼블릭 대표에 대한 검찰 수사 과정에서 '전관 로비'를 벌인 혐의 등으로 기소된 홍만표 변호사. 연합뉴스

검사장 출신 홍만표 변호사의 등장

법조비리의 또 다른 축은 정 전 대표의 검찰 및 경찰 수사 당시 변호를 맡았던 검사장 출신 홍 변호사다. 1991년 검사생활을 시작한 홍 변호사는 전두환ㆍ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ㆍ부정축재 사건과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가 연루된 한보그룹 비리 사건, 2003년 불법 대선자금 수사, 황우석 교수 논문조작 사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 계기가 된 ‘박연차 게이트’ 등 굵직굵직한 특수수사를 도맡아 검찰 내 대표적인 ‘특수통’이다. 2011년 6월 검찰을 떠나 석 달 뒤 변호사로 개업한 홍 변호사에게는 수사 단계 변호를 맡기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홍 변호사에게 사건을 맡기기 위해 브로커에게 돈을 쥐어주는 사람마저 있었다. 법조계에선 그가 서초동 돈을 쓸어 담는다는 말이 나왔다. 2013년 한 해에만 공식적으로 신고한 수입만 91억여원에 달했다.

홍 변호사는 브로커 이민희씨의 고등학교 동문으로 이씨 소개로 정 전 대표를 알고 지냈다. 그런 그가 정 전 대표 사건을 무혐의 처분으로 이끌자 검사장 출신으로서 수사에 영향을 미쳤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실제로 홍 변호사는 지난해 8월 정운호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간부 등에게 청탁한다는 명목으로 정 전 대표에게 3억원을 받아 챙기고, 당시 차장검사를 만나고 다닌 사실이 확인됐다.

이밖에 홍 변호사는 2011~2015년 변호인 선임계를 내지 않고 현재현 전 동양그룹 회장, 임석 전 솔로몬저축은행 회장, 강덕수 전 STX 회장, 이규태 일광공영 회장 사건 등 62건을 ‘몰래 변론’해 수임료 35억원을 누락했다. 부당하게 벌어들인 돈은 대부분 부동산 투자 등에 사용됐다. 그는 자신이 몸담았던 검찰 후배들의 조사를 받은 끝에 이달 20일 조세포탈과 변호사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 됐다.

정운호 전 네이처리퍼블릭 대표의 면세점 입점 로비 의혹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지난 2일 검찰이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면세사업부를 압수수색 할 당시의 모습. 연합뉴스
정운호 전 네이처리퍼블릭 대표의 면세점 입점 로비 의혹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지난 2일 검찰이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면세사업부를 압수수색 할 당시의 모습. 연합뉴스

롯데家로 번지는 정운호의 전방위 로비

정 전 대표의 전방위 로비는 법조계만 대상이 아니었다. 사업확장을 위해 대기업과 군, 관으로도 로비가 이뤄졌고, 검찰의 칼은 결국 롯데 쪽을 겨눴다. 지난달 서울중앙지검 방위사업수사부(부장 박찬호)는 군납 비리에 연루된 브로커 한모(58ㆍ구속기소)씨를 구속했다. 한씨는 군대 내 PX에 네이처리퍼블릭 화장품을 납품할 수 있도록 해 준다며 정 전 대표로부터 5,000만원을 수수했다. 그는 2012년 네이처리퍼블릭의 롯데면세점 내 점포위치 조정이나 제품진열 등을 돕고 점포수익 일부를 수수료로 받는 계약을 정 전 대표와 맺어 한동안 큰 돈을 벌었다. 그러나 정 전 대표가 2014년 한씨와 맺은 계약을 파기하고 신영자(74) 롯데복지ㆍ장학재단 이사장의 아들이 운영하는 회사와 비슷한 내용의 계약을 체결했다. 흥분한 한씨가 2014년 10월 네이처리퍼블릭을 상대로 “일방적 계약해지로 입은 피해 6억4,500만원을 지급하라”고 주장하면서 정 전 대표와 신 이사장간의 검은 거래의 실체가 드러났다.

정 전 대표의 실토로 신영자 이사장을 겨냥하게 된 검찰은 이달 2일 롯데면세점 본사와 신 이사장의 자택을 압수수색 했다. 검찰 수사는 현재 정 전 대표의 면세점 입점 로비를 넘어 롯데그룹 비리 전반을 살피는 쪽으로 확대됐다. 신동빈 회장이 될지, 신영자 이사장이 될지, 이제 롯데그룹 오너 일가의 사법처리는 시간문제라는 게 법조계의 중론이다.

무산된 화장품업계 거물의 꿈

검찰 수사가 전방위로 확대됨에 따라 이달 초 출소를 앞뒀던 정 전 대표의 앞길은 예상치 않게 펼쳐졌다. 네이처리퍼블릭을 상장시키고 사업을 확장하려던 원대한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검찰은 최근 정 전 대표를 회삿돈 108억원을 빼돌려 이 중 13억원 가량을 해외 원정도박 자금으로 쓴 혐의(횡령) 등으로 추가로 재판에 넘겼다. 이달 6일 출소를 앞두고 다시 구속돼 수감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브로커를 동원해 정ㆍ관계에 로비를 벌이고 사업을 확장하려 하고, 전관 변호사들을 통해 보석이나 집행유예를 받아 풀려나려던 정 전 대표의 과욕이 결국 부메랑처럼 자신에게 돌아와 그를 다시 가두게 됐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유리에 법조타운이 비치고 있다. 뉴스1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유리에 법조타운이 비치고 있다. 뉴스1

검찰의 칼끝은 이제 어디로

이달 18일 경기 남양주시에서 체포된 브로커 이동찬씨는 지금까지 알려진 법조비리 의혹과는 또 다른 차원의 파괴력을 가진 것으로 주목되고 있다. 최 변호사 폭행 사건을 경찰에 접수시킨 이씨는 최 변호사의 사건 수임에 깊숙이 관여했고, 이숨투자자문에 대한 금융당국 제재를 무마해 주겠다며 송씨로부터 금품을 받아가는 등 브로커로서 한 획을 긋는 인물로 일컬어진다. 그가 본격적으로 입을 열면 서초동이 매우 시끄러워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검찰은 법조비리에 대한 국민적 공분이 커지고, 제 식구 감싸기를 한다는 비판이 거세지자 조직 내부에 대해서도 본격적인 수사에 나섰다. 이달 들어 정 전 대표한테서 억대의 금품을 받은 인물로 지목된 서울고검 박모(54) 검사의 혐의를 확인했으며, 이민희씨에게서 수천만원의 뒷돈을 받은 서울중앙지검 수사관도 구속했다. 하지만 연루된 검사와 수사관이 더 많고, 판사와 경찰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

정 전 대표가 구치소에서 최 변호사의 팔목을 비틀었을 때, 사건이 이렇게 흘러갈 줄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안아람 기자 onesho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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