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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포 세대'는 왜 무속에 의존하는걸까

입력
2016.06.07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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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들의 굿판은 기본. 20~30대도 사무실에 버젓이 부적을 붙이고, 굵은 소금을 뿌려 액(재앙)막이에 나섰다. 세기말도 아닌데 대중문화가 무속에 빠졌다. 영화 ‘곡성’(왼쪽)을 비롯해 드라마 ‘운빨로맨스’ ‘마녀보감’까지 무속이 화두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화이브라더스 C&M·JTBC 제공
무인들의 굿판은 기본. 20~30대도 사무실에 버젓이 부적을 붙이고, 굵은 소금을 뿌려 액(재앙)막이에 나섰다. 세기말도 아닌데 대중문화가 무속에 빠졌다. 영화 ‘곡성’(왼쪽)을 비롯해 드라마 ‘운빨로맨스’ ‘마녀보감’까지 무속이 화두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화이브라더스 C&M·JTBC 제공

#1. 동이 트기 전 오전 5시. 흰 고깔을 머리에 쓴 채 소복 차림으로 회사 사장실로 가 책상 밑에 부적을 붙인다. 첫 출근 날 불운을 막기 위한 의식이다. 사무실 내 자신의 자리 주변에는 굵은 소금을 뿌린다. 역시 액막이를 위해서다. MBC 수목드라마 ‘운빨로맨스’에서 미신을 맹신하는 주인공 심보늬(황정음)가 한 일이다. IT 산업을 이끄는 굴지의 게임 회사에서 벌어지는 무속 행위들은 기괴함마저 느끼게 한다.

#2. 장승처럼 보이는 말뚝에 대못을 박으며 ‘살’을 날린다. 양손에 칼을 들고 뱅글뱅글 돌며 신을 맞고, 마당에 매달아 놓은 고깃덩어리의 살을 발라 내는 모습이 섬뜩하다. 영화 ‘곡성’에서 가장 긴장감이 감도는 순간은 무당 일광(황정민)이 굿을 하는 장면이다. 외지인(구니무라 준)이 검은 닭을 방에 매달아 놓고 굿 하는 장면과 교차 편집돼 스릴을 더한다. 한국과 일본 등의 샤머니즘을 섬뜩하게 다룬 ‘곡성’에는 예상을 깨고 600만 넘는 관객이 몰렸다.

대중문화에 ‘굿판’이 벌어졌다. 스크린을 넘어 안방극장에서까지 무속을 바탕으로 한 콘텐츠가 인기다. ‘운빨로맨스’ 외에 JTBC 금토드라마 ‘마녀보감’에서도 샤머니즘을 주요 소재로 활용한다. 무속의 대중문화 습격은 올 하반기에도 이어진다. 지난 4월 KBS2 ‘태양의 후예’를 끝낸 김은숙 작가는 도깨비를 소재로 한 드라마 ‘도깨비’를 오는 11월(tvN) 선보인다. 샤머니즘은 ‘해를 품은 달’(2011) 같은 사극을 뛰어 넘어 청춘 스타들이 출연하는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에서까지 주요 소재로 활용되며 외연을 넓히고 있다.

온라인에선 샤머니즘을 활용한 콘텐츠 제작이 더 활발하다. ‘조상님이 돌아왔다’와 ‘혼신’ 등 무속을 소재로 한 웹툰 제작이 잇따르고 있다.

출근 첫날 자신의 책상 주위에 굵은 소금을 뿌린 MBC 수목드라마 ‘운빨로맨스’속 심보늬(황정음). 나쁜 기운인 액을 막기 위해 한 의식이다. 책상엔 부적도 꽂혀있다. 방송 캡처
출근 첫날 자신의 책상 주위에 굵은 소금을 뿌린 MBC 수목드라마 ‘운빨로맨스’속 심보늬(황정음). 나쁜 기운인 액을 막기 위해 한 의식이다. 책상엔 부적도 꽂혀있다. 방송 캡처

대중문화 속 무속의 주무대가 과거에서 현재로 바뀌고 있다. 더는 무녀 등 무인들의 전유물도 아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청춘들이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무속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운빨로맨스’에서 심보늬는 황당할 정도로 삶의 모든 선택을 무속에 의지한다. 연애에서도 무속인이 특정해 준 조건(호랑이띠)을 갖춘 남자만 만나려 한다. 심보늬는 불안한 계약직인데다 부모님을 사고로 모두 여의고 여동생은 식물인간으로 병상에 누워 있다. 자신의 힘만으론 무엇 하나 되는 일이 없다. 그런 그가 무속에 집착하는 것은 ‘88만원 세대’ 혹은 ‘N포 세대’의 전형에 불행한 가족사까지 겹쳐 버티고 서 있는 것조차 버거운 절망적인 현실을 초자연적 힘을 빌려서라도 뛰어넘고 싶어하는 절박함의 표현인 것이다. 김헌식 동아방송대 교수는 “워낙 현실이 절망적이다 보니 자신이 자리잡지 못하는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그걸 운명에 넘겨 자조하면서라도 책임을 떠넘기고 싶은 회피의 심리도 반영됐다”고 봤다.

JTBC 금토드라마 '마녀보감' 속 성수청 대무녀 홍주(염정아)가 만수대탁굿을 하고 있다. JTBC 제공
JTBC 금토드라마 '마녀보감' 속 성수청 대무녀 홍주(염정아)가 만수대탁굿을 하고 있다. JTBC 제공

현실 속 20, 30대 사이에서도 사주역학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고 있다. 백운산 한국역술인협회 회장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역학 강의에서 20, 30대 수강생은 드물었는데, 요즘은 자주 눈에 띈다. 예전에 비해 5~10% 정도는 는 것 같다”고 말했다. 출판사 돌베개에 따르면 음악평론가 강헌이 지난해 12월 낸 책 ‘명리’는 독자 반응이 뜨거워 최근 9쇄까지 찍었다. 역술 책으로는 이례적인 흥행이다. 교보문고 관계자에 따르면 지난 1월부터 5월까지 역학과 사주 관련 책 판매량이 전년 동기 대비 약 37%가 늘었다.

대중문화 속 무속의 득세를 ‘경직사회’의 증후로 보는 의견도 있다. 샤머니즘은 사회적 소통과 이성적 사고가 통하지 않는 맹신의 영역이다. 진보와 보수의 이념 대립이 극심해지고 소통이 단절되면서 나와 다른 것에 대한 피로는 증오를 넘어 혐오의 대상이 됐다. 이 때 나와 다른 것을 처단하는 수단이 샤머니즘이다. ‘곡성’에서 무속은 진실과 상관 없이 내가 의심하는 적에 대해 저주를 퍼붓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지혜원 대중문화평론가는 “최근 자신의 신념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남의 조각상을 파괴한 홍익대 일베(극우성향 사이트 일간베스트의 준말) 조각상 사태에서 드러났듯이 지금은 나와 다른 것에 대한 수용이 좀처럼 통하지 않는 혐오의 시대”라며 “이 사회적 그늘이 샤머니즘 방식으로 대중문화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고 봤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영화 '곡성'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인 일광(황정민)의 굿 장면.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제공
영화 '곡성'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인 일광(황정민)의 굿 장면.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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