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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신학문 기록… ‘근대’를 데이터베이스화한 선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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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2 12:04
성 상인을 다룬 옛 드라마의 한 장면. 개성상인이 고도로 발달한 복식부기법을 썼다는 사실은 현병주가 남긴 기록을 통해 확인됐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성 상인을 다룬 옛 드라마의 한 장면. 개성상인이 고도로 발달한 복식부기법을 썼다는 사실은 현병주가 남긴 기록을 통해 확인됐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최근 10여 년간, 융합은 학계의 대세였다. 각 대학의 학과 안내에서 융합 전공에 대한 소개를 보는 것도 이제는 낯설지 않다. 최근에는 융합 전공의 개설과 정원 축소를 골자로 하는 프라임 사업까지 가세하면서, 대학가는 그야말로 자의 반 타의 반 융합에 몸살을 앓고 있다. 타 학문에 대한 이해에 소홀했던 학계 풍토를 고려하자면 다양한 학문의 통섭에 대한 이러한 시대적 요구는 분명 타당하다. 그러나 둘 이상의 학문 영역이 융합이라는 이름 아래 졸속으로 결합되는 되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그 결과 융합이라는 이름 아래 국적불명의 어휘들만이 유령처럼 대학사회를 떠돌 뿐이다.

그러나 마치 신조어처럼 느껴지는 이 융합이, 근대의 지식인들에게는 일상적인 덕목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시인 이상의 본업이 건축가였다는 것이나 소설가 유진오가 대한민국 헌법의 기초를 놓은 법학자였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근대의 지식인들에게 이런 일이 일상적인 풍경일 수 있었던 이유는, 신학문에 대한 뜨거운 열망이 학문 간의 통섭이라는 과제를 자연스럽게 도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글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현병주(玄丙周), 그는 바로 이러한 시대에 가장 적극적이고 뜨겁게 ‘융합’과 ‘통섭’을 실천했던 만물학자였다.

조선전통부기 유일 기록 ‘사개송도치부법’

현병주는 그가 남긴 저술의 면면만으로도 대단히 독특한 인물이다. 소설과 실기류, 복서(卜筮)와 그에 따른 지지학(地誌學), 회계학, 연설집에 이르기까지. 그의 저술은 한 분야에 국한되어 있지 않고 ‘근대’로 아우를 수 있는 여러 학문 분야에 폭넓게 포진되어 있다. 이렇게 ‘근대’라는 미지의 세계를 말 그대로 ‘기록’하여 근대를 데이터베이스화 하는 데 주력했던 인물, 현병주는 누구인가.

병주가 남긴 '사개송도치부법'. 개성 상인들이 쓰던 복식부기법을 자세히 설명한 기록이다.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병주가 남긴 '사개송도치부법'. 개성 상인들이 쓰던 복식부기법을 자세히 설명한 기록이다.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현병주의 생애에 접근하는 첫 번째 통로는 회계학자인 조익순 고려대 명예교수였다. 1880년 9월 28일 생인 현병주는 성산 현씨의 후손이며 그 부친의 이름은 현기영이다. 성산 현씨는 조선시대에 역과ㆍ의과ㆍ음양과 등의 관료를 많이 냈던 것으로 유명한 연주 현씨에서 분적한 가문이다. 이러한 집안 출신답게 그는 어린 시절부터 신식 학문을 다양하게 접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자랐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근대라는 신학문의 기록자로서 현병주의 자질은 아무래도 이러한 집안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첫 부인인 이씨 성의 처에게서 장남을, 김씨 성을 가진 처에게서 차남을, 그리고 음씨 성의 처에게서 6남매를 두었던 것으로 보아 현병주의 혼인 생활은 그리 순탄하진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삼남과 삼녀는 어려서 세상을 떠났고, 그의 슬하에서는 3남 3녀가 자랐다. 조익순 교수는 그의 후손을 추적하던 끝에 현병주의 딸과 사위를 만날 수 있었지만, 자녀들조차 그의 유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 일제시기와 해방기, 전쟁으로 이어지는 복잡한 한국의 현대사 속에서, 근대의 기록자 현병주가 단 한 장의 사진도 없이 오직 그의 저술만으로 오늘의 우리와 마주하게 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익순 교수가 현병주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가 남긴 ‘사개송도치부법’이라는 저술 때문이었다. 이 책은 근대시기까지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지던 개성상인들의 치부책을 기록한 것으로 개성인 김경식과 배준여 두 사람의 교열로 완성되었다. 이것은 서양의 복식부기가 조선에 전래되기 전, 조선 전통의 부기가 어떤 형태였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 소중한 기록물이다. 조익순 교수는 만약 현병주가 이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회계학은 조선의 전통적 부기를 연구할 수 있는 기회조차 갖지 못했을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로 인해 현병주에 대한 논의는 회계학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어서 조익순 교수의 ‘사개송도치부법전사’(2000)를 시작으로 ‘사개송도치부법의 발자취’(조인숙ㆍ정석우, 2005) ‘사개송도치부법 정해’(이원로 역, 2011) ‘사개송도치부법’(정기숙 역, 2015) 등이 잇달아 발간되었다.

소설ㆍ실기ㆍ지지ㆍ회계…전방위 작업

그러나 ‘사개송도치부법’의 이러한 가치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기록자인 현병주에 대한 연구사는 여전히 척박하다. 이 때문인지 현병주에 대한 조익순 교수의 관심은 여전하였다. 현병주의 생애 전반에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면서 조익순 교수가 가졌던 가장 큰 의문은, 현병주로 하여금 이토록 다양한 영역의 저술을 남기게 한 동력이 무엇이었는가에 있었다고 한다. 두 권의 연구서를 출간한 이후에도 현병주가 남긴 복서와 지지의 의미를 흥미롭게 읽어가고 있는 90대 노교수가 보여준 학문적 열정은, 현병주의 탐독과 박학의 기록물이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현병주의 업적은 비단 회계학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소설에서부터 실기(實記)류, 구전되던 전통 예언서에 대한 기록물과 각종 강연 기록물까지 방대한 영역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현병주에게 접근하는 두 번째 통로는 가장 최근에 현병주에 대한 연구물을 발표한 장연연 중국 산둥여자학원 교수였다. 학회 참석 차 방한한 장연연 교수를 통해 현병주 전체 저술을 연구 텍스트로 삼은 ‘대중계몽주의자 현병주 연구’(인하대 박사학위논문, 2015)의 집필 동기와 현병주의 저작에 관련된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장연연 교수에 따르면 현병주의 저술은 45편에 이르고 확인이 가능한 것만 해도 25편에 달한다고 한다. 회계학계에서는 윤근호와 조익순이 선구적인 연구사를 남겼고, 문학계에서는 최원식과 정호웅이 현병주와 관련된 논의를 한 바 있다. 장연연 교수는 서로 소통되지 않았던 두 분야의 연구사를 아우름으로써, 근대 지식 그 자체에 매료되었던 현병주라는 인물을 새롭게 호명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병주는 대중 작가이기도 했다. 그가 1933년 당시 최대 출판사 중 하나였던 덕흥서림에서 출간한 '임진명장이여송실기'. 소명출판 박성모 개인 소장
병주는 대중 작가이기도 했다. 그가 1933년 당시 최대 출판사 중 하나였던 덕흥서림에서 출간한 '임진명장이여송실기'. 소명출판 박성모 개인 소장

이러한 장연연 교수는 현병주를 추모하는 ‘수봉 선생’이라는 이기영의 회고록을 통해 현병주의 생애를 이해할 수 있는 또 다른 통로를 제시하였다. 이 글에 따르면 현병주는 이기영이 열대여섯 살 무렵(1910~11년) 천안에서 ‘흥남서시’라는 서점을 경영했다고 한다. 실제 현병주가 1922년 무렵에 ‘경성서적업조합’이라는 기록을 남겼던 것으로 봐서는 천안뿐만 아니라 경성에서도 최소 10여 년 이상 서점을 경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점에서 본다면 현병주의 놀라운 박학은 서점을 경영하면서 접한 신학문에 대한 그의 탐독에서 비롯된 것임을 이해할 수 있다. 이기영이 소년 시절뿐만 아니라 관동대지진 직후 귀국해서도 현병주의 집에 머물면서 신문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회고하는 것으로 보아서, 신학문에 대한 현병주의 박학은 이 시기에도 상당히 알려져 있었다고 생각된다.

자료 축적이야 말로 학문의 출발점

이처럼 현병주는 경성에서 서점인 우문관서회의 경영자인 동시에 여러 저술을 남긴 문필가였다. 그의 저서가 대창서원, 광문사, 회동서관, 삼문사 등의 당대 대형 출판사에서 출판될 정도로 저술가로서의 인지도는 상당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장연연 교수는 이러한 현병주 저술이 갖는 특징을 ‘대중성’이라고 말하며, 그를 ‘대중계몽주의자’로 명명하였다.

실제로 그의 저술 태도는 이 시기 출판계의 흐름에 그대로 일치하는 것이어서, 신소설로부터 신학문의 보급기를 거쳐 역사장편소설까지 출판물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1910년대에는 신소설을 비롯하여 점을 치는 복서, 번역ㆍ번안 작품을 많이 남겼고 1920년대에는 주로 근대지식을 전달하는 강연이나 연설문을 묶은 문집이나 독본류를 남겼으며, 시중에 떠도는 재담을 묶은 ‘엉터리들’과 같은 재담집을 내기도 하였다. 또한 1920년대 후반부터는 역사소설이나 실기류 집필에 주력했다.

50여년의 생애 동안, 현병주는 실로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 전통 부기의 유일한 기록물인 ‘사개송도치부법’이 아니더라도 ‘남녀연합토론집’ ‘시사강연록’ 등은 당시 대중에게 유통되었던 신학문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기록물이다. 이러한 현병주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연구가 상대적으로 소원했던 이유는, 기록물이나 그 데이터베이스화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 당시의 사회적인 풍토 때문이었으리라. 더구나 그의 저술들은 어떤 한 분야의 기록물로 묶여지지 않는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역시 한 원인일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자료의 축적이야말로 학문의 진지한 출발점임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 따라서 근대라는 거대한 충격을 기록함으로써 그 데이터베이스화를 선구적으로 실행한 현병주는 시대를 앞서 간 독학자로서 새롭게 호명되어야 할 것이다.

류수연 문학평론가ㆍ인하대 교수

공동기획: 한국일보ㆍ인문학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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