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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의 불금, 책으로 자신을 되찾는 ‘젊은 몽테뉴’들

입력
2016.05.03 14:29

-세상 속 외로운 독서인들

금요일 심야 책모임서 외로움 해소

약속 따로 없고 회원도 따로 없어

새벽 2시 무렵부터 이야기꽃

서울 논현동 콜라보서점 '북티크'에서 열린 심야독서모임에 참여한 이들이 책으로 얼굴을 가린 채 촬영에 응하고 있다. 책으로 불타는 금요일을 보내는 이들이다.
서울 논현동 콜라보서점 '북티크'에서 열린 심야독서모임에 참여한 이들이 책으로 얼굴을 가린 채 촬영에 응하고 있다. 책으로 불타는 금요일을 보내는 이들이다.

-인생의 우애를 회복하는 시간

“회사서 책 읽으면 ‘별종’ 비아냥

눈앞서 함께 책 읽으니 마음 놓여”

따로 또 같이, 충만한 연대감

“학교 다닐 땐 거의 안 읽었죠. 즐거움을 몰랐다고 해야 할까요. 읽었다고 해도 기억나는 게 별로 없어요. ‘파이 이야기’였어요. 군대 가서 읽었어요. 재미있고 흥미진진하고, 삶을 다시 깨우는 책이었죠. 진중문고에 있었는데, 제 인생의 책입니다. 틈만 나면 화장실로 도망쳐서 읽었습니다. 평생 책과 함께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종원 북티크 사장이 말한다. 자정이 넘은 지 이미 한 시간이다. 은은한 주광색 조명이 몸을 감싼다. 예순 평 좁은 공간 곳곳에서 책과 사람이 만난다. 숨 막힐 듯 조용하다. 하지만 마음을 조급하게 하는 무서운 적막이 아니라 세사를 누그러뜨리는 평온한 고요다. 따로 또 같이, 책을 향한 열의가 공기를 데운다. 묘한 연대감이 마음의 온도를 만든다. 따뜻하다.

서울 강남구는 무려 스무 해 동안 서점이 그저 사라질 뿐 새로운 서점은 생겨나지 못한, 책의 시베리아다. 바깥 거리에는 소비주의의 환금성 축제가 계속된다. 욕망의 배설을 재촉하는 울긋불긋한 불빛, 곧고 넓게 뻗은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 넋을 잃고 거리를 헤매는 취객의 소란이 밤새도록 이어진다. 거리에 들어서고 나면 정신이 나가고 돌아서고 나면 마음에 칼바람이 몰아치는 황홀한 지옥이다. 북티크는 이곳 강남구에 마련된 독서의 이글루다. 박 사장이 말한다.

한 밤중에 누구라도 와서 책 읽는 공간

“금요일 심야 책모임에 오는 분들은 아무래도 혼자 사는 사람이 많죠. 외로우니까 오는 겁니다. 두 가지 외로움이에요. 하나는 홀로인 삶에서 필연적으로 오는 외로움이고, 또 하나는 책 읽는 사람이 별종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책 읽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외로움이죠. 금요일 밤에 이곳에 오면 둘 다 해소할 수 있습니다. 함께 있지만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서로 아무도 간섭하지 않지만 읽기로 충만한, 책 읽는 사람이 이상하지 않은 마법의 공간이 열리는 겁니다.”

오후 10시, 텅 비었던 서점으로 하나 둘 사람들이 들어선다. 살짝 문을 열고 들어와 음료 하나를 주문한 후, 보아둔 자리로 스르르 움직여서 살금살금 가방을 푼다. 속에는 책이 한 무더기다. 한 모금 음료를 들이켠 후 곧바로 책 속으로 빠져든다. 한밤의 빛을 타고 여기저기에서 독서의 꽃이 벙근다. 약간 높은 곳에 자리한 사무 공간에 앉아서 책을 읽다가 문득 내려다보면 어느새 몇 사람이 늘어 있다.

엄숙하면서도 포근한 긴장이 감돈다. 도서관이자 카페이자 독서 학교이기도 한 복합문화 서점 북티크가 ‘책 안 읽는 사람들을 위한 서점’이라는 말이 정녕 무색하다. 구린내 나는 퀴퀴한 군대 화장실에 쪼그리고 앉아서 책으로써 사는 삶을 갈망했던 한 젊은이가 책의 황무지를 개간해 이룩한 독서의 아름다운 정원이다. 정원에 내려앉은 꽃씨 황명연씨가 이야기한다.

“수학강사로 밤에 일하고 아침에 자는 삶을 오랫동안 살아왔습니다. 늦은 밤, 제 일이 끝나면 카페 등에서 새벽 서너 시까지 보내는 날이 많았죠. 주로 책을 읽었습니다. 혼자 몽상에 젖어 시간을 보내거나 했죠. 그러다 여기 오게 되었습니다. 밤에 혼자 있고 싶을 때, 하지만 혼자는 왠지 싫은 느낌일 때, 누구나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 여기 오죠. 여기 와서 책을 읽으면 함께 있는데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심야독서모임은 약속을 따로 정하지 않는다. 회원도 따로 없다. 기분이 내키거나 틈이 나면 와서 자유롭게 책을 읽는 게 전부다. 한밤중에도 열리는 책 공간이 있으니까, 읽는 사람들이 일단 모여들어 밤새워 같이 책을 읽을 뿐이다. 자정 전후의 초저녁(?)에는 서점 곳곳에 각자 둥지를 틀고, 고개를 틀어박은 채 가져온 책을 그저 읽는다.

“같이 읽기는 인생에 우애를 돌려줘요”

북티크가 서점이니까 때때로 읽을 책을 미리 주문해 둘 수도 있다. 책은 구입한 즉시 열망에 차서 곧장 읽는 게 가장 효과적이므로, 어쩌면 이 방법은 독서를 촉진하는 중요한 지름길을 제공한다. 그러다 새벽 2시 무렵, 흩어져 있던 이들이 슬금슬금 사무실로 몰려든다. 자리에 남아서 계속 읽을 사람은 읽고, 같이 책을 말할 사람은 모인다. 처음 온 사람이 있으면 성명을 같이 나누고, 아니면 곧바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송정연씨가 말을 잇는다.

“집에서 혼자 읽어도 되는데, 심야에 여기까지 오는 이유를 주변에서 많이 묻습니다. 하지만 회사는 일하는 공간으로, 집은 휴식하고 잠자는 공간으로 쓰다 보니, 도저히 책을 읽을 수 없는 거예요. 저녁 늦게 일이 끝나는데 도서관에 갈 수도 없고요. 직장에 다니면서 너무 바쁘게 살다 보니 마음이 계속 허전했어요. 우연히 여기 들렀다가 제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깨달았죠. 일상에 시달리다 보니 제가 책을 좋아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살았던 거예요. 금요일 밤에 여유 있게 저 자신한테 몰두할 수 있다는 게 축복과도 같아요. 제 눈앞에서 누군가 저랑 같이 책을 읽고 있다는 것 자체가 마음이 놓입니다. 게다가 한밤중엔 이렇게 평소에 어디에서도 나눌 수 없었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게 정말 좋습니다.”

서울 논현동 콜라보서점 북티크의 심야 책읽기. 홀로 책읽기를 바라는 이들이 알음알음 모여든다.
서울 논현동 콜라보서점 북티크의 심야 책읽기. 홀로 책읽기를 바라는 이들이 알음알음 모여든다.

현대 자본주의가 가장 열렬하게 생산하는 것은 고립된 개인이다. 가족이나 친구와 시간을 보내는 한, 사람은 소비에 몰두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 골목에서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떠올려 보자. 우리 인간은 엎드려 등을 내주며 말타기를 하거나 힘껏 달려서 옷깃을 잡는 숨바꼭질로도 충분히 즐겁다. 길가 바위에 걸터앉아 도란도란 이야기하거나 풀꽃으로 반지를 지어 손가락에 거는 것으로도 하루가 쏜살같다. 친구만 있으면 다른 건 필요 없다. 우애는 시간을 가득 채우는 비결이다.

그래서 우애는 자본주의의 가장 강력한 적수가 된다. 친구랑 함께하면 소비는 지연되거나 증발한다. 자본주의는 무엇보다 먼저 우애부터 살해해 인간을 고립으로 몰아넣는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사람은 동료가 없을 때 과연 자신의 시간과 나날을 어떤 식으로 채워 나가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라고 말한다. 같이 읽기는 인생에 우애를 돌려준다. 함께 이야기할 책 친구가 있다면, 홀로인 시간도 그다지 무섭지 않다. 책으로 친구를 만나고 친구로 인간을 바로잡는 일은 물신의 압도를 거슬러서 삶을 아름답게 축조하는 선명한 길이다. 한슬기씨가 말을 받는다.

“퇴근 후 집에 가서 방에 틀어박히는 것은 아무래도 휴식이예요. 오랜 습관 탓인지 제 방에서는 억지로 책을 읽으려 해도 집중하기 힘듭니다. 때때로 회사에서 점심시간에 책을 읽곤 하는데, ‘슬기 씨, 책 봐아!!’ 같은 비아냥대는 소리를 들어요. 별종이라도 된 듯해서 짜증이 확 치밀죠. 금요일 밤에 여기에 오면 책 읽는 사람밖에 없으니까 마음이 탁 놓여요. 아무도 눈치주지 않으니까 온전히 책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게 무척 좋습니다. 은희경 소설을 모조리 챙겨 읽는 중이에요. 단단한 문체로 제 마음을 꼭 집어서 이야기하는 듯한 글입니다. 읽고 있으면 마음을 씻어내는 기분이 듭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하는 느낌이 들면서 일상의 상처가 저절로 치유가 돼요. 읽을 시간을 온전히 얻고 나서 저한테 생겨난 축복이지요.”

와인이 바닥나면 이야기는 풍성해진다

읽기는 인간의 기본적 권리에 속한다. 집약된 문화로 정신의 심층을 세우고 가려 뽑은 지혜로 내면의 깊이를 축조하여 마음의 척추를 세우는 일은 인간됨의 출발선이다. 출발선에 서 보지 않은 자는 그 누구라도 결코 사람으로 직립했다고 할 수 없으리라. 따라서 어느 누구도, 어떤 이유로든 타인의 읽기를 훼방할 자격은 없다. 시간을 가로지르고 공간을 뛰어넘어 찾아온 ‘천년 벗과의 대화’로써 자신을 완전히 하려는 인간 마음의 본연에 상처를 입히는 모든 행위는 야만에 속한다. ‘일리아드’를 손에 들고 앉은 최효민씨가 이야기한다.

“책 읽는 투자자인 조지 소로스가 제 인생의 모델입니다. 두꺼운 고전 위주로 읽고 있습니다. 평일에는 업무 탓에 거의 못 읽어서, 주말이라도 열심히 읽자고 생각해 독서실을 빌려 책을 읽기도 했습니다. 초저녁에는 열심히 읽고, 한밤중에 모여서 가끔은 와인 같은 걸 나누면서 책모임 하는 건 또 다른 재미입니다. 술자리에서는 술이 오로지 술만 위한 것인데, 이 모임에서는 술이 말문을 트고 여유를 확인하는 촉매여서 좋습니다. 독서란 남의 말을 듣고 이해함으로써 내가 어떤 인간으로 살려는지 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준비한 와인이 바닥을 서서히 드러낸다. 나르시소스는 결코 자신을 알지 못한다. 타자의 얼굴을 보면서 자신을 구별 짓는 것이다. 저마다 고유한 삶이란 저 홀로 마련되는 게 아니라, 소통의 고통을 겪고서야 간신히 윤곽을 더듬을 수 있다. 돌아가면서 오늘 읽은 책을 이야기하는 말들은 맛이 나고, 이야기가 갈래를 치면서 풍성해진다. 군대에서 말년휴가를 나왔다가 같이 읽기에 맛들인 이명구씨가 마지막으로 말을 보탠다.

“즐기지 않는 모임에 억지로 가는 게 가장 싫었죠. 어떻게 해서든 물러서서 제 시간을 따로 얻고 싶었습니다. 본래 책은 거의 안 읽었습니다. 여기 와서 책에 재미를 붙였습니다. 특히 ‘소년이 온다’를 읽고 나서였어요. 소설을 읽는 이유를 알게 해 준 작품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워낙 실용적 독서만 강요 받다 보니, 저희 세대는 이야기의 맛을 잘 모릅니다. 주로 사실에만 치중해 공감을 못하는 거죠. 이 작품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왜 이야기를 읽어야 하는지 알았습니다. 책은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와 같습니다. 저 자신을 잃고서 살아왔는데, 책을 읽으면서 비로소 제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가는 걸 바로잡을 수 있었습니다.”

성으로 서재를 세우고 틀어박혀 세상의 소란을 차단하고 오로지 자신에게 집중함으로써 몽테뉴는 비로소 자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불타는 금요일’이다. 한국의 젊은 몽테뉴들은 바깥의 활기에 아랑곳없이 한밤을 틈타 오늘도 책으로써 자신을 되찾아가는 중이다.

장은수 출판평론가ㆍ순천향대 초빙교수

심야독서모임 추천 밤에 읽기 좋은 책

낮의 독서와 저녁의 독서와 한밤의 독서는 아무래도 결이 다르다. 한밤중에 모여서 같이 책을 읽으려는 이들에게 황경신의 ‘밤 열한 시’를 추천한다. 밤 열한 시는 “하루가 다 지나고 또 다른 하루는 멀리 있는 시간”이다. 나직한 목소리로 읽다 보면 책 속에 담긴 일상의 감정들이 힘들었던 하루를 다독이면서 위로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밤 열한 시, 황경신, 소담출판사

편안하고 사랑스럽고 그래, 퍼엉, 예담

문득 사람이 그리운 날엔 시를 읽는다, 박광수, 걷는나무

모든 요일의 기록, 김민철, 북라이프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이병률, 달

시의 문장들, 김이경, 유유

천둥치는 밤, 미셀 르미유, 비룡소

밤의 피크닉, 온다 리쿠, 북폴리오

익숙한 새벽 세시, 오지은, 이봄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공지영, 오픈하우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히가시노 게이고, 현대문학

공동기획: 한국일보ㆍ책읽는사회문화재단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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