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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면식도 없지만 인생을 나눠 산 듯한...한일 사회주의 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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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신이생(一身二生)이라는 말이 있다. 격변기엔 한 몸으로 두 삶을 살게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내게는 하나의 인생을 둘이 나눠 산 것 같이 느껴지는 이신일생(二身一生)의 두 사람이 있다. 일본의 사회파 추리소설가인 마쓰모토 세이초(松本淸張ㆍ1909~92)와 근대 한국문단의 풍운아 임화(1908~53)가 그들이다. 둘은 한 살 차이지만 문단 이력이 정확히 엇갈린다. 한 사람이 끝난 시간에서, 다른 한 사람이 시작했다. 전혀 연결될 것 같지 않은 두 인물이 머리 속에서 함께 떠오르는 이유는 아마 마쓰모토 세이초가 전후 체제의 끝자락에서 느닷없이 출간해 낸 추리소설 형식의 평전 ‘북의 시인, 임화’(‘北の詩人’ 中央公論社, 1964) 때문이기도 하지만, 둘 모두 독학자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남과 북 모두에서 처절하게 버림받고 각각 1988년(남)과 2000년대 중반(북)까지 그 이름조차 거명될 수 없었던 구식민지의 한 시인, 비평가의 삶을 그와는 일면식도 없는 현해탄 건너의 한 추리소설가가 심혈을 쏟아 써내려 갔다. 어찌된 일인가?
전후 일본의 사회파 추리소설을 대표하는 마쓰모토 세이초는 일본의 늦깎이 작가 지망생들의 모범이자 독학 문학도들의 희망이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학교 교육은 소학교에서 멈췄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 에도가와 란포가 좋았던 그는 1927년 인쇄소 석판 인쇄 견습공으로 들어갔고 그 즈음에 순문예와 사회주의와 추리소설을 동시에 접했다. 인쇄공으로 10년을 보낸 뒤 다시 15년을 아사히신문사 지국의 사원으로서 일한 마쓰모토가 ‘어느 ‘고쿠라 일기’전’으로 아쿠타가와상을 받으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한 것은 1952년이 되어서다. 거의 40대 중반에 접어드는 나이였다.
마쓰모토는 왜 임화 평전을 썼을까
묘한 일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 시간은 ‘북의 시인’ 임화가 한국전쟁 후의 남로당 숙청에 휘말려 사라진 시기였기 때문이다. 임화는 ‘민족반역행위자’ ‘미군첩보 기관의 간첩’ ‘반국가적 선전선동가’ ‘공화국 주권을 파괴전복할 목적’의 반란행위자로 재판정에 섰고, 1953년 8월 총살되었다. 마쓰모토는 의문에 빠졌고, ‘북의 시인’을 써야 했다.
독학자 임화와 마쓰모토 세이초의 삶의 굴곡은 정확히 반비례했다. 보성중학의 문제아 임화는 학교를 중퇴한 후, 열아홉에 ‘지구와 박테리아’ 등의 다다이즘 시를 썼고, 스무 살에 카프(KAPFㆍ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지도자 박영희를 통해 사회주의 문학 운동에 가담했고, 스물 하나에 영화 ‘유랑’의 주역으로 활약하는 한편 자신의 대표시 ‘우리 오빠와 화로’, ‘네거리의 순이’와 같은 단편 서사시를 써냈다. 조숙하고 불량했던 천재, 모던보이, 운동가, 낭만적 혁명시인, 카프의 볼셰비키화를 이끈 서기장, 학예사 주간이었던 임화는 해방 후엔 남로당의 문화담당 최고이론가로 우뚝 섰지만, 이내 가장 모욕적인 죄명으로 죽음을 맞았다.
임화가 빛나던 시기 마쓰모토는 바닥에 있었고, 마쓰모토의 삶이 빛을 뿜기 시작한 시기 임화는 무덤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 둘의 시공간적 겹침이라고는 아마 마쓰모토가 징집되어 용산에서 병영생활을 하던 때뿐이었을 터이다. 최초의 각성된 노동자는 식자공이라는 말이 있거니와, 어쨌든 이 둘은 레지스 드브레가 말한 바, 활자계와 사회주의의 관련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일지 모른다. 땀내 나는 수건을 두르고, 임화와 같은 문학가들이 써나갔던 문건을 활판에 심어가고 있었을 마쓰모토 세이초. 1927년. 다다이스트 임화와 인쇄공 마쓰모토 세이초의 활자계 진입. 1953년 경성 모던 보이 임화의 처형과 신예 작가 마쓰모토 세이초의 도쿄 상경. 두 사회주의 문학가의 삶의 편린은 일종의 도펠겡어적 장면이자 문화사적 사건에 해당한다.
현해탄의 안개와 북의 시인
마쓰모토가 그의 소설과 논픽션들을 통해 보여준 정치적 입장은 그의 적이 누구였는지를 보면 분명해지는데, 그 적의 고발이야말로 ‘북의 시인, 임화’를 쓴 동기였다. 단도직입으로 말해, 마쓰모토의 적이란 다름 아니라 늘 전전(戰前) 제국의 검은 세력들과 미국이었다. 양자는 공범인데, 다루어진 사건이나 시간에 따라 주범, 종범 관계는 매번 약간씩 다르다.
‘일본의 검은 안개’(1962)나 ‘쇼와사 발굴’(1964~1971) 시리즈를 통해 마쓰모토가 전후 일본을 이 꼴로 만든 연무에 가려진 적으로 ‘발굴’한 세력들은 다대하다. 암약을 넘어 활약중인 뻔뻔한 구제국 엘리트 그룹과 이들을 장기말로 사용하는 미 점령 당국이 그 대표격. 미국은 천황, 만주군벌, 대륙의 업자들, 전시 관료 등을 재조직한 음모의 핵심으로서 매번 등장하며, 심지어 공산당을 비롯한 저항 세력에까지 그 영향력이 뻗어있다. 사건의 시간적 뿌리는 멀리 제국 일본으로, 사건의 공간적 뿌리는 멀리 미국으로 유추되는데, ‘북의 시인, 임화’(김병걸 옮김, 미래사, 1987)에는 20세기 동아시아를 보는 마쓰모토의 이와 같은 관점이 전형적으로 드러나 있다.
식민지 유산, 즉 카프 검속 하의 전향과 폐병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 동료를 저버려야 했던 임화의 이력이 일제 비밀경찰인 특고(特高)에서 미군정으로 넘어간다(확실히 1934년 전주사건 때 카프 맹원 대부분이 검거와 투옥을 면치 못했음에도 서기장 임화만이 홀로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오랜 수수께끼 중 하나이다). 임화 자신은 “위장이라고 생각했다. 일본 경찰은 그를 굴복시켰다 여길지 모르지만, 이쪽은 배 속에서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고 말했다.
드디어 해방이 찾아왔고 임화는 인민을 위한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최전선에 섰다. 하지만 일본이 빠져나간 자리에 미군이 왔고 주권뿐 아니라 어두운 기록들, 예컨대 전향서약서까지를 인수했다. 여전히 서울에 남아 미 정보국(CIC)을 돕고 있는 고문 경찰 특고 사나이 경무와 야마다 경무보의 그림자는 CIC와 연결된 목사 언더우드로부터의 교회 소식지와 군정청 민정국 여론국장 설정식이 주는 폐병 특효의 ‘신약(新藥)’이라는 형태로 계속 임화에게 배달된다. 미 군정도, 동료들도, 심지어 남로당 수뇌부까지도 아무도 믿을 수 없다. 마쓰모토는 정치적 원죄와 정치적 의지 사이에 교착된 임화의 심리적, 정치적 정황을 일본 사회주의의 짝패이자 제국 일본의 원죄로 그려낸다.
그러니까 마쓰모토로서는 독학에서 시작해 집단 최고의 이론가에 도달했던 임화를 죽음으로 몰고 간 불안과 공범들의 목록이야말로 한국, 일본, 동아시아 역사의 핵심 논제라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마쓰모토로서는 전후 일본의 검은 안개들이 한반도에도 뻗어 있을 뿐 아니라, 한반도의 안개란 다름 아닌 전전 일본의 어두운 그림자에서 기인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현해탄 건너의 또 ‘다른’ 신체 임화를 통해서 말이다.
독학자들의 숲, 문학의 사회주의
오오카 쇼헤이(大岡昇平)는 마쓰모토 소설의 ‘비뚤어짐’을 지적하며 그의 독학을 문제 삼았다. 성격과 경력에 잠재되어 있는 어떤 불행한 것에 대한 동정과는 별도로, 자신의 불행을 드러내는 방식을 보고 아주 위험한 작가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좀 야비한 비판이긴 하지만, 항상 하층민이 아니라 엘리트가 범인이라는 추리, 어두운 연결을 가진 엘리트들 간의 협잡과 미일 수뇌부 ‘사이’의 음모, 꼭두각시들의 희생에 의해 묻혀 버리는 흑막들, 제국 일본의 흑막들과 엘리트 지식인들의 타락과 분식(粉飾)에 대한 폭로 등등의 모티프들을 생각할 때 전혀 수긍이 안 가는 지적도 아니다. 하지만, 그게 현실이었다면? 여전히 현실이라면?
‘점과 선’ 이래로 마쓰모토는 거의 항상 누가 최종 책임을 져야 하는가라고 물었고, 그 책임 소재 추궁의 좌절을 통해 동아시아의 검은 손들을 뚜렷이 상기시켰다. 마쓰모토는 문학적으로는 사건들의 점과 선을 이어 면을 만든다는 귀납적 발상을 앞세웠지만, 정치적으로는 면(面ㆍ전체 판)을 먼저 상상하고 그에 맞춰 흩어진 점과 선을 잇는 식의 연역적 태도를 취했다. 개인악(형사법적 죄)과 사회악(정치적 죄) 양쪽으로 추급해 들어갔던 것이다. 근본악과 형이상을 문제 삼는 ‘순문예’로부터 멀어진 독학자 마쓰모토로서는 눈치 볼 게 없었다. 적은 유구하고도 크지만 또한 확실하다. 다만 주권권력 뒤에 있거나 그 자체여서 잡지 못할 뿐이다. 오히려 이렇게 뿌리와 머리를 동시에 흔드는 가차 없는 사회 비판이야말로 실로 마쓰모토의 개인적 ‘불행’, 즉 독학자로의 ‘운명과 성격’에서 말미암은 것이 아닐까?
공유재로서의 활자가 ‘공유라는 가치’에의 주장을 창출해낸 역사야말로 20세기 한국과 일본의 문학사였다. 테리 이글턴은 “(영)문학은 문자 그대로 가난한 자들의 고전이었고, 사립학교와 명문대학이라는 매력적인 영역들을 넘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싸구려 ‘일반교양’ 교육을 제공하는 한 방식이었다”고 쓴 바 있다. 20세기, 싸구려 교양에 불과했던 문학은 가난한 자, 독학자들의 ‘읽기’를 만나면서 그 형질 변환의 변곡점을 맞게 된다. 혁명의 진지를 문학이 대리하는 일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졌고, 문학을 통해 사회운동으로 진입한 독학자들이 허다하게 생겨났다.
임화도 마쓰모토도 바로 그런 무수한 독학 문학자, 독학 사회주의자들 중 하나였다. 혼자 읽어가던 그들이 쓰기 시작할 때, 하나하나의 독학들은 이제 식자공의 땀을 거쳐 집단지성의 운동으로 옮아갔다. 문학의 사회주의, 어쩌면 문학 자체가 독학자들을 잇는 사회주의의 한 형태였을지 모른다.
황호덕 문학평론가ㆍ성균관대 교수
공동기획: 한국일보ㆍ인문학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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