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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시, 英병원에 의뢰해 받은 유리한 의견서만 제출… 본사 개입 정황

입력
2016.04.25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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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 감염에 의한 폐 손상”

종합적인 역학 조사와 무관한

특정 시점 환자 상태만 놓고 판단

독성 시험 불리한 결과는 쏙 빼고

유리한 내용만 쪼개 제출 꼼수도

“황사ㆍ꽃가루가 원인” 억지까지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의 가장 많은 피해자를 낳은 영국계 살균제 제조업체 옥시레킷벤키저(옥시)가 관련 소송에서 영국 유명 병원에 의뢰해 받은 유리한 의견서를 법원에 제출한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계 컨설팅업체에도 의견서를 요청해 검찰에 제출하는 등 옥시의 영국 본사가 증거의 선별ㆍ왜곡에 관여한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24일 법조계에 따르면 옥시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유족들이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국의 폐질환 전문병원인 왕립브롬톤병원(Royal Brompton Hospital)으로부터 받은 사례 분석 의견서를 제출했다. 분석 대상은 2011년 질병관리본부가 역학조사를 실시한 18건으로, 옥시는 이 병원에 의견을 구한 끝에 가습기 살균제가 폐 손상의 주 원인이 아니라 바이러스 감염 등에 의한 폐 손상이라는 결론을 얻어 법원에 제출했다.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브롬톤병원의 견해는) 특정 시점의 환자 상태만 놓고 판단한 것으로, 살균제가 폐 손상의 원인이라는 보건 당국의 결론을 상쇄할 수는 없다”고 지적한다. 브롬톤병원 측 의견서는 개별 사례마다 특정 시점의 X-ray 등 자료를 기존 폐질환의 양태와 비교한 것으로 종합적인 검토는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백도명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한 시점의 자료만 국한한다면 살균제가 원인이 아니라는 결론을 낼 수 있지만, 질환의 진행 경과와 다양한 원인 등을 종합적으로 비교ㆍ검토한 역학조사 결과 살균제로 인한 폐 손상이 유력하다”고 설명했다.

옥시가 자신들에게 유리한 증거만 골라 법원ㆍ검찰에 제출한 정황은 이뿐만 아니다. 서울대 수의대 연구팀에 쥐를 대상으로 한 생식독성실험과 흡입독성실험을 의뢰한 뒤 생식독성 실험에서 ‘임신한 쥐 15마리 중 13마리의 새끼가 죽었다’는 불리한 결과가 나오자 보고서를 쪼개 달라고 연구팀에 요청했다. 두 실험 결과를 종합해 판단하는 독성학 연구 관행과는 매우 동떨어진 요구다. 두 실험을 각각 다른 보고서에 담도록 한 옥시는 결국 ‘가습기 살균제와 폐질환 사이에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다. 다만 폴리헥사메틸렌 구아디닌(PHMG)이 간ㆍ신장 등에 영향을 주는 등 전신독성 가능성이 있으니 추가 실험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흡입독성실험 보고서만 받아 이중에서도 유리한 내용만 검찰에 제출했다. 생식독성실험 보고서는 아예 받지도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옥시는 이 의견서가 신빙성이 높다는 내용의 다국적 컨설팅업체 그래디언트의 보고서도 첨부했다. 이 업체는 의뢰업체로부터 거액을 받고 주문 받은 대로 보고서를 써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영국 저명한 병원이나 미국계 컨설팅업체에 의뢰한 사실을 영국 본사가 몰랐을 리 없다”며 “지금까지 옥시 한국 법인의 책임이라고 주장하며 선을 그어 온 영국 본사가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밖에 옥시는 지난해 말 봄철 황사나 꽃가루, 가습기 자체의 세균 때문에 폐 손상이 일어났을 수 있다는 의견서도 제출했다.

검찰은 25일 옥시의 마케팅 담당 직원 3명을 불러 제품이 ‘인체에 무해하다’는 허위 광고를 하게 된 경위 등을 조사한 뒤 26일부터 신현우(68) 전 옥시 대표 등 법적 책임을 질 수 있는 핵심 인원에 대한 조사를 본격적으로 실시한다.

안아람기자 onesho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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