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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현장 휠체어 탈출, 골든타임 꿈도 못 꿔

입력
2016.04.20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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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규모 지진 상황서 공포감 급증

교관이 도와줘도 대피 힘에 부쳐

지하철 화재땐 탈출 로드맵 전무

도호쿠 대지진 장애인 사망률 2배

한국일보 이현주 기자가 17일 서울 신대방동 보라매 안전체험관에서 열린 지진 재난 체험 도중 휠체어를 탄 상태에서 교관의 도움을 받아 건물 밖으로 탈출하고 있다. 오대근 기자 inliner@hankookilbo.com
한국일보 이현주 기자가 17일 서울 신대방동 보라매 안전체험관에서 열린 지진 재난 체험 도중 휠체어를 탄 상태에서 교관의 도움을 받아 건물 밖으로 탈출하고 있다. 오대근 기자 inliner@hankookilbo.com

부엌으로 꾸며진 6.6㎡(2평) 가량의 작은 방 안. 재난 경보와 함께 리히터 규모 7.0의 강진이 사람들과 가구, 집기를 집어삼킬 기세로 사정 없이 흔들었다. 14, 16일 연달아 강진이 엄습한 일본 구마모토(熊本)현과 흡사한 상황. 살기 위해선 방석으로 머리를 가린 채 재빨리 탁자 밑으로 몸을 피해야 했다. 하지만 방 전체가 요동치는 아비규환 속에서 두 다리를 휠체어에서 내려놓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전세계적인 지진 재앙으로 국내에서도 불안감이 높아지고 있다. 장애인들이 체감하는 공포는 훨씬 크다. 거동이 불편한 지체장애인은 ‘재난 약자’ 중에서도 특히 취약 계층으로 분류된다. 장애인의 날(20일)을 사흘 앞둔 17일 기자가 직접 지체장애인이 돼 가상 재난 체험에 나섰다. 이날 서울 신대방동 보라매안전체험관에서 열린 재난 체험에는 충남 서산 서일중 학생들과 교사 31명이 함께 했다.

장애인의 입장이 되자 느껴지는 공포와 긴장감의 정도는 천지차이였다. 교관이 휠체어를 탄 기자를 도왔는데도 비장애인 학생들을 뒤쫓아 대피하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 지진 발생을 감지한 후 무너져 내리는 아파트 건물 밖으로 황급히 휠체어를 끌었으나 이미 ‘골든 타임’은 지난 뒤였다. 실제 상황이라면 건물 잔해에 깔렸다는 뜻이다.

충남 서산 서일중 학생들과 실시한 실외 지진 대처 훈련 모습. 오대근 기자 inliner@hankookilbo.com
충남 서산 서일중 학생들과 실시한 실외 지진 대처 훈련 모습. 오대근 기자 inliner@hankookilbo.com

지하철 화재 상황 역시 눈앞이 캄캄할 지경이었다. 전기 공급이 차단돼 선로나 비상계단을 이용해 피신해야 하는데 누군가 기자의 대피를 돕지 않았다면 역사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이희순 보라매안전체험관장은 “문제는 화재가 발생하면 비장애인도 공황상태인 경우가 많아 주변 사람을 챙길 여력이 없다는 점”이라며 “지체장애인이 택할 수 있는 탈출 로드맵은 사실상 전무하다”고 설명했다. 시ㆍ청각장애인들도 재난에 취약하기는 마찬가지다.

서울 소방재난본부가 2010~2012년 소방공무원들이 접한 신고사례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장애인의 재난 대처 능력은 비장애인보다 2배 이상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 2011년 일본 도호쿠(東北)대지진 당시 장애인 사망률은 전체 인구의 1.9%(1,658명)로 조사돼 비장애인 사망률(1.1%)의 두 배에 가까웠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아직까지 재난 약자로서 장애인을 대하는 연구와 개선 대책은 미미하다. 재난 약자에 초점을 둔 재난관리 매뉴얼이 나온 것도 불과 2년 전의 일이다. 그나마 ‘효율적 이동을 위한 보호자 또는 활동 보조인 동반 필수’ ‘구급준비가방 내 약품 및 물품구비’ 등 구체성이 떨어지는 내용이 대부분이어서 재난 발생 시 도움이 안 된다는 지적이 많다.

김창호 보라매안전체험관 교관은 “의사소통이 어려운 중증장애인들은 재난 대비 교육을 받는 것부터 쉽지 않다”며 “집이나 자주 가는 공간에서 보호자와 대피 연습을 해보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조언했다.

전문가들은 장애인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물리적ㆍ제도적 장벽을 허물자는 ‘배리어 프리(무장벽)’ 운동에 재난으로부터 안전할 권리도 포함시킬 것을 주문한다. 전미자 한국복지환경 디자인연구소 이사장은 19일 “한국에서는 휠체어 이동이 가능하고 유도 블록만 설치되면 배리어 프리라는 인식이 퍼져 있다”며 “그러나 장애인의 안전 사각지대는 화재와 지진 등 대형 재난이 발생했을 노출되기 쉬운 만큼 경제ㆍ생활복지를 넘어 안전복지에 대한 대안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현주 기자 mem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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