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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다리 저는 마지막 택시 손님… 흐릿한 CCTV가 야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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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수 형님에게서 날아온 무전엔
‘컥’ 하는 비명 후 신음소리만
전화 세 차례… 누군가 꺼버렸다
대낮에 야산 중턱에서 살인 사건
어깨, 목 등에 47개 칼부림 흔적
크게 저항한 듯 천장에 신발자국
용의자 승차한 은행 앞 CCTV
얼굴은커녕 성별 구분도 어렵지만
걸음 이상한 170㎝ 40~50대 유력
8년 만에 원점에서 뒤지고 있다
“고객이 전화를 받지 않아 삐 소리 후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가오니….”
점심을 함께 하려고 동료 A에게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차라리 잘됐다. 한 푼이라도 아껴 딸에게 용돈이나 주자. 택시를 경남 양산시 남부동에 있는 집 방향으로 몰았다. 올해 나이 쉰 둘, 내 이름은 이동수(가명). 10년 동안 회사택시를 운전했고 개인택시를 몬 지는 5년째다.
피해자 택시기사 “다리 저는 손님이 수상하다”
2008년 1월 30일 낮 12시 30분. 집에 도착했다. 딸이 준비해둔 밑반찬 몇 개로 점심을 뚝딱 해치우고 한 시간 뒤 다시 택시에 몸을 실었다. 평일이라 그런지 손님이 코빼기도 안 보인다. 북부동 쪽으로 핸들을 틀었다. 마침 북부동 S은행 지점을 지날 즈음 전방 30m에서 손짓하는 남성이 보였다. 170㎝ 정도 작은 체구에 40~50대로 보이는 사람이었다. 다리를 다쳤는지 아니면 장애가 있는 건지 왼쪽 다리를 절고 있었다.
“추운데 어서 들어 오세요. 어디로 모실까요.” 대답 없이 땅 바닥만 쳐다보는 그는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룸 미러에 비친 얼굴에선 초조함도 느껴졌다. 시계를 보니 오후 1시 42분.
남자의 목적지가 이상하다. 차를 탄 지 30분이나 됐는데 아직도 갈팡질팡하고 있다. 그가 마지막으로 가자고 한 곳은 양산 동면 내송리 인근 야산. 원래 탔던 곳에서 5㎞ 떨어진 곳. 차로 10분이면 충분한 거리를 20㎞나 돌아가고 있는 셈이다. 행색을 보니 타지 사람은 아닌 듯했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다른 택시를 타라고 말하려던 순간 15년 지기 동료 택시기사 B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래. 설 지나고 한 잔 하자. 운전 조심하고.” 통화를 마치니 그가 말한 목적지가 코 앞이었다.
남자의 요구대로 내송리 마을회관을 지나 야산으로 향하는 외길로 들어섰다. ‘대체 왜 이런 곳을 찾을까. 산 속 농장에서 일하는 인부인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빨간색 철제문이 보이는 농장 앞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요금 계산을 위해 뒷좌석으로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차갑고 날카로운 쇳덩이의 충격이 어깨에 느껴졌다. 남자가 악마로 돌변했다.
동료 택시기사 A “무전기 너머 비명과 신음소리”
집에 두고 온 휴대폰을 찾으러 점심시간 집에 들렀다. 그런데 휴대폰에 동수 형님의 부재중 전화 메시지가 찍혀 있었다. 같이 밥이나 먹자는 전화였을 게다. 조금 전인 오전 10시쯤 남부동 남부시장 입구 교차로에서 운행 중인 형님 택시와 마주치고 손인사도 나눴다.
오후 2시 30분. 갑자기 내 택시로 무전이 왔다. 그러나 무전기 너머로 ‘컥’하는 짧은 비명과 함께 작은 신음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무전기 송신 내역에는 형님 차량 무전 ID인 ‘113’이 떠 있었다. 이번엔 내가 무전을 보냈다. “무슨 일이세요.” 답이 없다. 형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게 틀림 없다.
타고 있던 손님을 목적지에 내려주고 급히 형님에게 휴대폰으로 전화를 했다. 1분 11초 동안 통화 연결음이 들리더니 음성안내로 바뀌었다. 다시 걸었다. 이번엔 42초간 연결음이 어어진 뒤 음성안내가 아닌 ‘뚜뚜뚜’하는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 누군가 형님의 휴대폰 전원을 강제로 끈 게 분명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전화했다. 아예 휴대폰이 꺼져 있다.
인적 드문 야산, 단서는 흐릿한 CCTV 영상뿐
양산 동면 내송리 H농장 진입로 부근에서 발생한 택시기사 살해사건. 강력사건에 잔뼈가 굵은 경남경찰청 미제사건팀 베테랑 형사 5명이 머리를 맞대 재구성한 범죄 상황은 이랬다.
피해자 얼굴과 양손, 머리, 어깨 부위에 난 칼부림 상처는 47개. 흔적으로 미뤄 운전석 뒤에서 흉기로 공격하는 범인에게 피해자는 몸싸움을 벌이며 극렬히 저항한 듯 했다. 운전석 천장까지 묻은 피해자의 신발 자국은 좁디 좁은 공간에서 어떻게든 범인을 막아내려 했던 처절한 사투의 증거였다.
범인도 피해자를 단번에 제압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렇게 그는 10여분간 흉기를 휘둘렀고, 이씨는 계속 칼에 찔리면서 기력이 다해갔다. 그러던 이씨 눈에 운전대 오른쪽에 놓인 무전기가 보였을 터. 택시기사 동료들끼리 연락을 취하는 수단이었다. 이씨는 마지막 희망이 될지도 모를 무전기로 한 손을 뻗었다. 하지만 나머지 손만으로 예리한 흉기를 쥔 범인을 당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방어자세가 무너지자 흉기는 피해자의 목을 향했다. 겨우 무전기를 쥐었지만 ‘컥’하는 단말마만 동료 기사 A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부검 결과 이씨의 사인은 최후의 일격으로 보이는 기도와 목 부위 자상, 그로 인한 출혈 쇼크사였다.
초기 수사는 난항이었다. 범행 장소는 사람 왕래가 없는 야산 중턱. 사건이 한낮에 발생했는데도 목격자는 전혀 없었다. 사건 직후 현장을 지나간 차량이 한 대 있었지만 특이한 건 못 봤다고 경찰에서 진술했다. 차량 안에서 피해자 혈흔과 모발 다섯 점, 범인 것으로 보이는 손수건이 발견됐지만 유전자정보(DNA)는 검출되지 않았다. 돈이나 다른 물품이 없어지지도 않았다. 피해자 휴대폰 지문도 싹 지워진 상태였다. 범인은 오히려 흉기에 묻은 피를 닦은 손수건 한 장을 남겨뒀다. 면식범일 수도, 계획 범죄일 수도, 우발범일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양산 일대 우범자와 출소자, 전과자 등 2,415명을 샅샅이 훑었으나 죄다 범행시간대 알리바이가 있었다. 유일한 증거는 북부동 은행 앞에서 택시에 승차하는 용의자 모습이 찍힌 폐쇄회로(CC)TV 뿐. 나중에 확인한 택시 운행기록장치(타코미터)에는 이씨 택시가 쉬지 않고 40여분 간 양산 일대를 돌아다닌 기록만 남아 있었다. 중간에 택시에 탄 손님은 없었다는 얘기다.
CCTV에 찍힌 이 놈이 범인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흑백 화질은 엉망이었다. 얼굴은커녕 성별 구별도 쉽지 않았다. 걸음걸이가 다소 이상하다는 정도가 CCTV에서 찾아 낸 전부였다. 동영상 전문가들은 ‘왼쪽 다리의 불편을 호소하는 부상자 혹은 장애인’이라는 소견을 내놨다. 즉시 해당 지역 병원에서 다리 치료를 받은 남성과 인근에 거주하는 출소자들을 조사했지만 이번에도 허탕이었다.
수사는 8년 만에 원점에서 다시 시작했다. 경찰은 혹여 무심코 지나친 수사 기록은 없는지 이 잡듯 뒤지고 있다. 용의자와 비슷한 신체 특징을 가진 인물들의 소재지, 동일사건 가해자들의 기록도 죄다 펼쳐 놨다. 미제사건팀 소속 형사는 17일 “용의자와 비슷한 특징을 가진 범죄경력자 중 과거 전담팀에서 소재 파악을 못했던 몇몇을 현재 추적하고 있고 있다”며 “피해자와 유족의 억울한 한을 풀어드리기 위해 꼭 범인을 잡겠다”고 강조했다.
양산=김현빈기자 hbkim@hankookilbo.com
이 기사는 과거 수사 기록, 형사들의 설명 등을 토대로 재구성했습니다. 관련 제보는 경남경찰청 장기미제사건팀 (055)233-3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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