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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활자에서 삶의 현장을 끄집어 내다

입력
2016.04.10 13:11
독학자 장정일이 걸어온 여정을 보여주는 책들.
독학자 장정일이 걸어온 여정을 보여주는 책들.

1984년 무크지 ‘언어의 세계’ 3집에 시를 발표하면서 시인이 된 장정일은 1987년 희곡 ‘실내극’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극작가가 되었으며, 1988년 문학잡지 ‘세계의문학’ 봄호에 단편소설(‘펠리컨’)을 발표하면서 소설가가 되었다. 시집 ‘햄버거에 관한 명상’(1987)으로 유력 문학상을 수상했고, 소설집 ‘아담이 눈뜰 때’(1990)로 시대전환적 문학의 도래를 선언했다.

60세가 될 때까지 20권 이상의 ‘독서일기’를 내겠다는 포부로 1994년부터 출간하기 시작한 독서 후기 모음집이 ‘장정일의 독서일기’(전7권)에서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전3권)으로 이어지고 있다. 시, 소설, 희곡, 서평, 해설, 에세이, 비평, 인터뷰에 이르는 장르를 넘나드는 글쓰기로 한국문학사에서 독특한 위상을 마련한 장정일은 최근 ‘장정일의 악서총람’, ‘장정일, 작가’에서 보여주듯 문학 범주를 훌쩍 넘어 분야를 넘나드는 글쓰기로 폭넓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다. 독자가 그 이름만으로 무엇에 대한 어떤 책인지 묻지도 않고 그의 신작을 덥석 집어 들게 할 만큼 그는 신망 두터운 저술가다.

1980년대 문학상을 받았을 때의 장정일.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0년대 문학상을 받았을 때의 장정일. 한국일보 자료사진

읽고, 읽고, 읽고, 다시 읽는 사람

활자와 사람 그리고 현실을 가로지르며 읽고 써온 그의 이력만 슬쩍 둘러보아도 그를 두고 독학 운운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해야 온당할 듯 보인다. 그가 문학 영역에서 자신의 이력을 쌓아왔음을 환기하자면 더욱 그렇다. 그는 눈 밝은 비평가에 의해 뒤늦게 고평된 문단의 숨은 보석 쪽이 아니라 문학적 글쓰기가 시작된 이래 끊임없이 문단의 주목을 이끌고 독자를 매혹시킨 기린아 쪽에 가깝다. 장르의 벽을 넘어 자유롭게 비행하고 표현의 틀을 실험하는 그의 글쓰기는 우리가 금과옥조로 여겼던 문학에 대한 굳은 이해법을 재고하는 데 기여한 바 크다.

그의 문학적 성취를 차치하더라도 문학가에게 독학자는 그리 합당한 수식어라 하기 어렵다. 대체로 우리는 문학적 글쓰기에 관한 한 창작 혹은 생산을 가능하게 할 일반적 원리가 따로 있지 않다고 여긴다. 글쓰기의 수준은 가르치거나 배운다고 쉽게 습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기성의 눈으로 본 고귀하고 위대한 예술만이 예술이라 할 수는 없으며 기성의 눈이 볼 수 없었던 곳에서 새로운 예술이 움틀 수 있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문학적 글쓰기는 예술 일반이 그러하듯 아무나 할 수도 없고 배움의 유무가 성취를 결정하지도 않는 영역이라 생각하는 편이다. 상식의 진릿값을 따지는 일을 별도로 하자면, 창작물을 두고 배움(學)의 여부를 따지는 이해법이 사회적으로 폭넓게 통용되지는 않는 것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꽤 오랫동안 독학자가 장정일을 규정하는 주요 수식어 가운데 하나로 거론되었던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오래 전에 독학과 독학자에 대한 자전적 기록을 다음과 같이 남긴 바 있다. “우스개나 진지함으로 어떤 사람들은 ‘문학을 하기 위해서는 차라리 제도교육을 덜 받은 것이 다행이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나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의 고통은 여러 가지 종류의 것이지만 다른 사람이 다 하는 것을 하지 않았던 것은 많은 콤플렉스를 불러온다. 그러지 않아도 과대망상과 자기비하가 시계추처럼 늘 오락가락하며 정서불안을 형성해놓고 있던 내게 독학은 정신을 피폐하게 했다. 학교에서 공부를 하게 되는 사람은 자신의 스승이 있음으로 인하여 항상 모자라는 것을 알게 되고 이인자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겸손해지는 것이다. 반면 독학자는 자신이 세상에서 최고라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하여 독학자가 세상에 대하여 키우는 것은 시기와 질투와 원한과 독선과 오만이다.”

“공부는 삶을 위한 가장 적극적인 투쟁”

아주 오래 전 기록을 들추어내고 그것을 기준으로 장정일의 정체성을 새삼 확인하는 일이 무용에 가까운 것임을, 지금의 ‘작가’ 장정일이 전혀 다른 지평에 서 있음을 분명히 해두고 짚어보자면, 오래된 기록의 행간에서 읽게 되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독학의 의미가 ‘무학’과의 연관 속에서 뚜렷해진다는 점이다. 옛 현인들의 전언에 따르면 우연히 만난 지나는 행인에게서도 배울 게 있다고 했으니, 배움이 없다는 말은 좀 이상한 말이다. 누군가를 두고 배움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쓰임새 상 적절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배움이 없다는 말이 부가설명 없이 널리 이해된다. 최고령 입학이나 졸업, 혹은 가난으로 배우지 못한 한을 특정 학교에 전 재산을 기탁하고 배우지 못한 이들을 위한 후원으로 해소하고 대체하는 일은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미담으로 다루어진다. 개별적으로 동의하든 아니든 홀로 공부한 사람은 배움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여전히 공유되고 있다. 말하자면, ‘독학’은 제도권 바깥에서 배운다는 말로, ‘무학’은 제도권에서의 배움이 없다는 말로 규정되어, 제도 바깥에서 배우는 것과 배움이 없다는 말이 유사어처럼 사용되어온 것이다.

장정일이 탐독했던 삼중당 문고.
장정일이 탐독했던 삼중당 문고.

계몽의 시대가 남긴 부정적 여파라고 해야 하겠지만, 그것이 지나간 과거의 것이라 단정 짓기는 쉽지 않다. 모든 형태의 배움이 제도교육으로 귀결되는 강도와 속도가 배가되고 있는 게 현실이고, 학력지상주의가 완화되고 있는 기미는 좀체 감지되지 않는다. 고학력 인플레로 대학 졸업장과 대학원 졸업장이 넘쳐나는 시대가 되면서 학력지상주의는 은밀하게 극심해졌고, 모든 것을 개인 탓으로 돌리는 기이한 시대정신은 여전히 아니 이전보다 표 나게 배운 사람을 고평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 부끄러움을 강요한다.

국가공인 교육 프로그램을 이수하는 것 사이에도 등급이 있고, 같은 등급 내에도 수많은 세부 등급이 만들어지고 있다. 사교육 공화국인 이 땅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차고 넘치지만, 대개 그 공부는 스마트기기의 매뉴얼을 숙지하는 과정과 그리 다르지 않다. 배워서 얻은 능력인 학력(學力)과 제도권 교육을 이수한 이력 즉 학교를 다닌 경력인 학력(學歷)의 의미는 거의 같아지는 중이다.

장정일이 온전한 의미를 채우며 만들어내는 독학의 영역이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은 모든 형태의 ‘배움’이 제도교육으로 빨려드는, 시대의 이상 열기 속에서 그가 ‘배움’ 자체의 의미 영역을 구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읽으면서 쓰는 ‘작가’ 장정일에게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는 삶을 위한 가장 평범하지만 가장 적극적인 투쟁”이 ‘공부’이고 그것이 곧 독서 자체임을 환기해 봐도 좋다. 독서 즉 공부를 통해 그가 만들어내는 영역이야말로 배워서 얻은 능력인 학력이 축적되는 곳이다.

활자에서 삶의 현장으로 가 닿은 독학자

장정일의 독서열은 삼중당 문고 독파로 더 유명하다. 그에게 독서는 “열 다섯 살,/ 하면 금세 떠오르는 삼중당 문고/ 150원 했던 삼중당 문고”로 시작하는 시 ‘삼중당 문고’에서도 엿볼 수 있듯, 삶의 방향과 방식을 틀 지운 원천 즉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처이자 세상과의 싸움의 도구였다.

하지만 장정일이 명실상부한 독학자인 것은 식지 않는 그의 독서열 때문이 아니다. 역사성과 공간성이 비교적 흐릿해진 이야기나 사상이 맥락과 상관없이 동일한 비중으로 다루어지는 것이 전집류의 특성이라면 그 성격이 극대화된 형태가 바로 문고본이다. 삼중당 문고 100권이 한꺼번에 발간되던 1975년을 앞뒤로 외판을 위주로 한 출판문화가 박리다매형 문고 판매로 돌아섰다.

이러한 흐름을 주도한 동력은 ‘양식 있는 문화층’의 형성에 대한 사회의 열망이었다. 대중적 독서열을 불러일으킨 문고본 붐의 사회적 소임이 이미 가치가 확립된 문화를 폭넓게 사회에 유포하는 일에서 완수되고 있었다. 사회과학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번역서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문고본 붐이 잦아들고 다시 회복되지 못했다. 현실과의 교호관계 속에서 책 읽기를 지속하고자 하는 다른 줄기의 독서 열망이 뚜렷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껏 독서를 무조건 좋은 것으로 교육받아왔지만, 현재 ‘넓고 얕은’ 교양을 위한 독서나 ‘읽은 척 매뉴얼’이 독서문화의 새로운 주류가 되고 있다. 묻지마식 독서의 유용성에 대한 성찰의 일환으로 이해되어야 할 터, 독서일기를 축적하면서 장정일도 지적했듯, 독서는 배움의 길이지 배움 자체가 아니다. 독서가 배움을 둘러싼 ‘왜 무엇’의 답안을 마련해주지는 않는다. 제도교육이 잠식한 배움의 영역에서 스스로 질문을 만들어가면서 배움의 의의를 건져 올렸다는 의미에서 장정일은 명실상부한 독학자다.

지칠 줄 모르는 탐독가여서가 아니라 활자에서 삶의 현장, 그 복판에 선 사람들로 읽기의 대상과 배움의 영역을 스스로 재설정해갔기에, 자신으로의 깊은 침잠이 끝내 이 땅의 현실에 가 닿게 하는 것, 그것이 독서이며 공부이고 배움임을 보여주었기에 그는 독학자다. 그 길이 비록 순탄한 확장일로도 아름다운 성장의 기록만도 아니지만, 독학자로서의 장정일을 신뢰하는 것은 독학자란 새로운 질문을 품고 좌충우돌의 투쟁에 나설 용기를 가진 자임을 그가 줄곧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소영현 문학평론가ㆍ연세대 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공동기획: 한국일보ㆍ인문학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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