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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함께 읽고 허심탄회한 얘기 나누는 ‘풀뿌리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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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뿌리 튼튼히 하기 위해
바닥에서부터 사회 문제 고민
읽기ㆍ말하기 중심의 공부 모임
책 속 지식보다 실천지혜 추구
제도권 밖에서 제대로 배우는 느낌
모임 올 때마다 놀랄 준비해야
/그림 1인터뷰를 끝낸 인천의 대표적 독서공동체 ‘마중물’ 운영진이 유범상(오른쪽 두번째) 방송대 교수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마중물은 책에 대해 얘기하는 게 아니라 책을 매개로 다양한 이야기들을 나누는데 초점을 뒀다.
“어느 날 갑자기 주민증을 잃고 주소와 생년월일을 까먹고 갑자기,/ 왜 사는지 도무지 알 수 없고”(이성복 ‘그러나 어느 날 우연히’)
세상이 ‘저렇게’ 무참해 보일 때가 있다. 열린 문은 갑자기 닫히고, 뻗은 길은 돌연 끊긴다. 언어는 제멋대로 뜻을 잃고, 열정은 더 이상 불꽃을 당기지 못한다. 살아왔던 대로는 살지 못하는데, 앞날은 짙은 어둠에 잠겨 보이지 않는다. 삶의 주소가 통째로 사라지고, 알 수 없는 비애와 견딜 수 없는 허무가 덮친다. 상실의 시대에 세계의 변혁을 꿈꾸었던 청년들은 줄줄이 무의미에 항복한다. 직장을 얻어 재산을 꾸리고, 자리를 얻어 출세를 갈망한다. 바쳐진 시간을 벌충하는 듯 더욱 그 길에 집요하다.
청년 유범상 역시 ‘노동’에 좌절한다. 노동운동이 더 이상 변화에 대한 열망을 담지 못한다고 느낀다. 힘차게 희망을 실어 나르던 노선이 어느새 환승역에 다다른다. 어디로 갈아탈 것인가를 불안해하다가 불혹을 앞두고 스코틀랜드로 공부 길을 떠난다. 사회복지를 전공하면서 ‘1980년대 문제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가?’라는 질문에 끝끝내 매달린다. 유범상 방송대 교수가 말한다.
권력에 버려져 공동체에 결박되기
“버니 샌더스는 절대로 이길 수 없습니다. 그는 잠시 불어 닥친 바람에 불과합니다. 그에게는 신념은 있을지 몰라도, 아래로부터 떠받치는 풀뿌리 조직이 없습니다. 설령 대통령이 될 지라도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백악관에 갇혀 좌충우돌할 뿐이겠죠. 중앙으로부터 내려온 혁명은 불가능합니다. 세상을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바꾸려면 지역에서부터, 아래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영국에 유학하면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그러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서 책을 읽으면서 세상 문제를 학습하는 스웨덴의 스터디 서클에서 한 희망을 보았습니다. 민주주의 정치에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 독일의 정치교육에서도 영감을 얻었습니다. 책을 친구로 삼아 세상을 깊게 읽고, 나와 내 친구들이 살아가는 공동체에 대한 정치를 고민하는 ‘독서 공동체 민주주의’가 자연스레 떠올랐습니다. 제 인생을 이러한 공동체를 이룩하는 일에 마중물로 쓰는 데 헌신하기로 했습니다.”
고민은 길고 치열했지만 답은 간결하고 소박하다. 심훈의 ‘상록수’가 증언하듯, 사회운동의 모든 뿌리는 ‘독서회’가 아니었던가. 오늘날 한국의 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이 명망가 몇몇의 활동만 격렬할 뿐, 조용히 성찰하고 참여하는 시민들을 얻지 못한 채 늙어 가는 중이다. 섣부른 지도 의식에 사로잡혀 해답을 열어둔 채 바닥부터 시민사회 문제들을 고민하는 ‘같이 읽기’를 버렸기 때문은 아닐까.
2009년 한국으로 돌아온 후, 유 교수는 고향인 인천에서 시민 독서공동체 ‘마중물’을 꾸린다. 마중물은 “혼자 힘으로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지하수를 마중하는 한 바가지 물”을 말한다. 땅을 파서 지하샘물에 닿아도, 물은 저절로 솟지 않는다. 물이 얕아서 우물을 채우지 못할까, 마음이 졸아드는 이때, 우물에 한 바가지 물을 살짝 쏟으면 지하샘물이 솟아올라 우물을 채우기 시작한다. 땅 밑으로 자신을 던져 형제를 맞이하고, 공동체를 새롭게 이루는 이 실천을 유 교수는 “(땅 위의)권력으로부터 버려져서 스스로 공동체에 결박되는 행위”라고 말한다.
책을 동료 삼아 듣고 말하고 읽고 쓰다
마중물 모임은 2주에 한 번, 토요일 오후 3시 방송대 인천지역대학 503호에서 열린다. 학기제로 운영 중인데, 아무나 참여할 수 있다. 참가비는 무료다. 한 학기 동안 여덟 번에 걸쳐 정해진 주제를 놓고 책을 읽고 토론을 하고 강의를 듣는다. 이번 학기 주제는 ‘이념과 인권’이다. 인권의 기본 개념에서부터 시작해 자유주의, 진보주의, 인종, 종교, 장애, 북한 등 주요 쟁점 별로 시민들이 함께 나누어야 할 인권 문제를 이야기한다. 주제 도서를 중심으로 두 시간에 걸쳐 발제와 토론을 먼저 한다. 모임을 함께하는 정연정 마중물정책연구소 부소장이 말을 덧붙인다.
“듣고 말하고 읽고 씁니다. 책은 이야기를 위한 동료입니다. 나와 내가 속한 공동체의 등장을 위한 또 하나의 마중물이죠. 2009년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 술자리 수다로 흔히 끝나는 공허한 만남이 아니라 생각하는 ‘나’들의 모임에 대한 갈증이 있었습니다. 이 모임을 우연히 알고 참여했는데, 시민들이 일상에서 깨달은 지식에 담긴 통찰력에 커다란 놀라움을 느꼈습니다. 제가 배우고 연구해 온 지식이 현실과 다소 거리가 있는 스테레오타입의 지식이라면, 이 모임에서 함께 생각하면서 만들어지는 지식은 살아 숨 쉬는 역동성이 있습니다. 모임에 올 때마다 놀랄 준비를 하고 옵니다.”
‘마중물’은 책을 읽고 거기 담긴 지식을 챙기는 것보다 듣고 말하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 책 자체를 전혀 물신 삼지 않는다. 책을 읽어오면 그로부터 더욱 풍성히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읽어 오지 않는다 해도 모임을 참여하는 데 아무 제한을 두지는 않는다. ‘같이 읽기’에서 책이란, 그 안의 주장이나 내용을 계기로 생각을 촉발하는 훌륭한 도구상자 중 하나일 뿐이다. 책은 “나와 우리 그리고 공동체를 둘러보는” 일을 말하려는 데 좋은 계기가 되면 족하다. 책에 ‘대해’ 학습하지 않고 책을 ‘통해’ 같이 생각하는 일에 무게 중심을 두면, 모임을 같이하는 일이 좀 더 즐거워진다. 정향진 씨가 이야기한다.
“정리해서 말하지 않고 말하면서 정리합니다. 저희 ‘마중물’의 토론 원칙입니다. 2014년부터 모임에 참여했습니다. 이런 공부를 시작한 것은 모임에 들고 나서입니다. ‘부담은 없고 가치를 얻고 돌아가는 모임’이라는 모토에 걸맞게 ‘마중물’에 와서 삶을 깊이 있게 고민하는 시민들을 자주 만나면서 매번 놀라고 돌아갑니다. 모임에는 보호자 손을 잡고 나온 여덟 살부터 여든 살 어르신까지 함께합니다. 그만큼 폭이 넓은 이야기가 쏟아집니다. 제도권 바깥에서 제대로 공부하는 느낌입니다. 저는 늘 세상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모임을 나오다 보니까 어느새 제가 조금씩 바뀌어 있는 겁니다. 제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부모형제들에게서도 새로운 면을 발견하면서, 가족과의 만남도 깊이 있게 변했습니다.”
시민사회 뿌리 내리는 책읽기 실천
다른 사람들과 차이를 이루는 나를 확인할 때 사람은 비로소 성숙한다. 어린아이는 자기밖에 모르지만, 철든 다음에는 자신과 주변을 배려하면서 조금씩 조화를 이룬다. 굳어지고 딱딱한 자아의 껍데기를 무너뜨리고 나를 다시 이룩하는 지름길은 나와는 다른 인생길을 걷는 이들과 깊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차이에 놀라면서, 겸손히 그 경이를 몸에 새기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삶의 길이 유연하고 부드러워지면서 전에 없던 활력이 생긴다. 무심히 지나쳤던 사물들이 빛을 던지고 무감히 대했던 친인들이 눈에 들어온다. 일찍이 워즈워스는 “저 하늘의 무지개를 보나니, 내 가슴은 뛰노네.”라고 했다. 무지개를 보고 뛰노는 가슴이 없는 한 인간은 결코 자신을, 사회를, 세상을 바꿀 수 없으리라. 이연수 마중물 시민교육센터장이 이어서 말한다.
“유 교수님하고는 에든버러 대학에서 같이 공부했습니다. 유학생 독서 모임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함께 했습니다. 2010년부터 모임에 나왔습니다. 책상물림인 저로서는 삶을 배우는 공간입니다. ‘마중물’은 지식과 현장이 만나 형성되는 ‘실천 지혜’를 추구합니다. 모임을 함께 하면서 지식을 많이 갖춘 분은 오히려 말을 잘 못하고, 살면서 치열한 고민을 많이 하던 분들이 강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단련되면서 얻어진 자기 이야기가 있는 사람이야말로 지혜가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분들은 솔직하고 주관이 뚜렷하지만, 다른 사람들 의견을 존중합니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자기를 고집해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차이의 지혜를 획득하신 거죠.”
읽기와 말하기를 축으로 하는 공부를 통해서 시민사회의 뿌리를 든든히 하겠다는 ‘마중물’의 실천은 처음에는 한 사람의 깊은 헌신으로 소박하게 시작했지만 일곱 해 만에 사단법인으로 크게 자라났다. 연구소, 교육센터, 문화예술센터 등을 두고 본래 하던 독서공동체 모임인 마중물 세미나 말고도 시민 인문축제를 기획하고 인문학 강좌를 진행하는 한편, 시민교육과 정책 분야의 전문가를 양성하는 아카데미 등을 운영하는 중이다. 한 그루씩 나무를 심어 황무지를 숲으로 이루어낸 ‘나무를 심는 사람’을 보는 느낌이다.
“전문가와 시민이 함께 어우러져서 공부하지만 ‘전도’가 아니라 ‘전파’가 되도록, ‘소유’가 아니라 ‘소통’이 되도록 힘껏 애쓰는 중입니다. 차이가 편안하게 드러나는 풍성한 공론장을 만드는 것이 ‘마중물’의 목표입니다. 흔히 ‘손은 마주잡되 발까지 맞추지는 말자’고 하고 있습니다. 서로를 존중하면서 공동체를 함께하면서 지혜를 모으되, 몸까지 모두 한 방향으로 전진할 까닭은 없습니다. 나와 남을 돌아보면서 삶의 처지에 맞도록 각자 실천하면 되지요. 중요한 것은 ‘내가 생각한다’라는 독단에서 벗어나서 ‘우리가 생각한다’는 공동 사유를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실제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명확히 말해 주는 근거 없는 낙관주의가 아니라 ‘우리’가 만나 같이 대화하고 시도하면서 낙관의 근거를 현실로 만드는 일입니다.”
말하는 그 얼굴이 찬란히 밝다. 권력과 자본의 무차별적 공세로 인간적 삶의 의미가 무색해진 이 궁핍한 시대에 1980년대의 참된 의미를 묻고 좇는 이가 있다. 창 밖으로 4월 꽃들은 이미 세상을 바꾸고 있다. 파울로 프레이리를 빌려서 유 교수가 한 말이 마음의 북을 연신 두드린다.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는 압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나서 이야기해야 합니다.”
장은수 출판평론가ㆍ순천향대 초빙교수
공동기획: 한국일보ㆍ책읽는사회문화재단
‘마중물’이 선정한 질문, 성찰, 상상을 위한 책
책은 나와 나를 둘러싼 공동체에 대해 질문하고, 성찰하고, 더 나은 삶과 세상에 대해 상상하는 매개이다. 좋은 질문은 근본적인 성찰과 상상을 이끌기 때문에 특히 중요하다. 쉽고 짧으면서도 깊은 울림과 여운이 있는 질문을 던지는 책으로 ‘지금은 없는 이야기’를 함께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이 책은 영원할 것처럼 보이는 이 시대의 상식에 대해 질문하고 이를 전복하여 미래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질문
지금은 없는 이야기(최규석 지음ㆍ사계절ㆍ2011)
푸른눈 갈색눈(윌리엄 피터스 지음ㆍ한겨레출판ㆍ2012)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다(밀턴 마이어 지음ㆍ갈라파고스ㆍ 2014)
#성찰
의자놀이(공지영 지음ㆍ휴머니스트ㆍ2012)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김원영 지음ㆍ푸른숲ㆍ2010)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토머스 게이건 등 지음ㆍ부키ㆍ2011)
휴버먼의 자본론(리오 휴버먼 지음ㆍ어바웃어북ㆍ2011)
#상상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하워드 진ㆍ이후ㆍ2016)
페스트(알베르 카뮈 지음)
우리가 걸어가면 길이 됩니다(파울로 프레이리, 마일스 호튼 지음ㆍ아침이슬ㆍ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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