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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의 저울] 정치의 실종… 헌재는 웃는다

입력
2016.04.02 09:23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이 3월 31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심판정에서 법률 위헌 여부를 심리한 결정을 내리고 있다. 뉴스1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이 3월 31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심판정에서 법률 위헌 여부를 심리한 결정을 내리고 있다. 뉴스1

선거 직전까지 집안 싸움을 벌이던 여야를 보고 “정치의 실종”이라며 탄식한 국가기관이 청와대 말고 또 있습니다. 이 기관은 탄식에 그치지 않고 국회가 방치한 임무를 일부분이나마 대신 짊어지겠다고 자임하기까지 합니다. 바로 헌법재판소입니다. 박한철 소장은 지난달 언론과 가진 토론회에서 “정치가 본래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요즘, 사회적 갈등을 오히려 심화시키고 헌법적 가치가 침해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고 일침을 놨습니다.

정치 부재로 가중되는 사회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 헌재가 수줍게 내민 카드는 개헌을 전제로 한 ‘추상적 규범통제’입니다.

추상적 규범통제. 일반인은 언뜻 봐서 이해가 안 가는 단어입니다.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법안이 국회에서 효력을 가지기 전에 미리 헌재가 그 위헌성 여부를 심사하는 제도를 말합니다. 차라리 ‘법 시행 전(前) 위헌심사’ 같은 이름을 붙였더라면 좋았을 텐데, 법률이 재판에 적용됐을 때 위헌성을 심사하는 ‘구체적 규범통제’와 대비되는 개념이라고 하니 그러려니 해 봅니다.

추상적 규범통제의 위력은, 입법부가 만든 법을 헌재가 시행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그 의미가 정치권의 갈등 중재의 보완 역할에 그치지 않습니다. 박 소장뿐 아니라 헌재는 그 동안 추상적 규범통제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수 차례 강조했습니다.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이 3월 18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편집인협회 토론회에 참석해 추상적 규범통제에 대해 기조발표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이 3월 18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편집인협회 토론회에 참석해 추상적 규범통제에 대해 기조발표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회 입장에서는 입법권에 대한 심각한 침해로 여기는 것이 당연하지만,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개헌을 먼 얘기로 여겨 그럴 수도 있고, 선거 때문에 정신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입법권의 신성함을 주장하며 헌재를 다그칠 만큼 국회의 입장이 떳떳하지 못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회초리를 든 헌재와 그 앞에서 쩔쩔매는 국회의 모습이 극명하게 드러난 것은 지난 1월 헌재에서 열린 국회선진화법 권한쟁의 심판 공개변론이었습니다. 야당 반발로 쟁점법안 처리에 애를 먹자 새누리당은 국회의장의 직권상정 및 국회 본회의 신속상정 요건을 강화한 국회선진화법이 위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다수당이었던 새누리당이 통과시킨 법안을 위헌이라고 주장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헌재 재판관들은 국회를 매섭게 질타했습니다.

“시중에 떠도는 얘기가, 동물 국회가 되는 것을 방지하려고 국회 선진화법을 만들었더니 식물 국회가 됐다고 한다. 동물들은 생식이나 먹이활동 아니면 안 싸우고 식물도 계속 한 자리에서 성장 지속하는데 빗대 얘기하는 것은 동ㆍ식물 입장에서 모욕이라고 생각할 것 같다.”(김이수 재판관)

“선진국(국회)은 직권상정 없어도 잘 돌아간다. (직권상정이 필요한 것은) 국회 수준 문제인가.”(박한철 소장)

청구인 측 대리인으로 나선 주호영 권성동 새누리당 의원은 “(새누리당이 당시 선진화법에 찬성한 것은 다음 총선에서) 과반이 되기 어렵다고 봤기 때문”이라거나 “선진화법에 따라도 다수당이 180석을 넘으면 역시 동물 국회가 된다”, “사실 국회가 결정한 것을 헌재로 오는 것 자체가 부끄럽다” 등 듣고 있기에도 민망한 답변을 내놨습니다.

박한철 소장은 최근 국회선진화법에 대한 헌재 심판을 19대 국회의원 임기가 끝나는 5월 29일 전에 결론을 내겠다고 밝혔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일단락되겠지만 국회가 보인 추한 민낯의 잔상은 오래 남을 것 같습니다.

정의화 국회의장은 국회선진화법 개정과 관련, "잘못된 법을 고치는 데 있어서 또 다른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고영권기자 youngkoh@hankookilbo.com
정의화 국회의장은 국회선진화법 개정과 관련, "잘못된 법을 고치는 데 있어서 또 다른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고영권기자 youngkoh@hankookilbo.com

2014년 5월 국회의장 산하 헌법개정 자문위원회가 마련한 헌법 개정안은 참의원(지역구 의원)과 민의원(비례대표 등)의 양원제를 전제로 해서 ‘정부 또는 민의원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의 청구가 있는 법률’에 대해 법률이 시행되기 전에 헌재가 위헌여부를 심판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청구 시점을 법안의 국회 통과 이후부터로 할지, 법안 공포 이후~시행 이전으로 할지 등 여전히 많은 논의가 필요하지만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나온 추상적 규범통제의 가장 구체적인 안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의원 3분의 1 이상이 심판 청구를 할 수 있도록 한 조항은 국회선진화법이 신속처리 조건으로 내세운 전체 의석 ‘5분의 3 동의’ 조건보다 훨씬 소수당에게 유리합니다. 나중에 추상적 규범통제에 대한 논의가 구체화된다면, 국회는 기억상실에 걸리지 않고서야 헌재를 향해 “국회의 역할을 무시한 처사”라고 반박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프랑스나 독일 등 일부 선진국에서 추상적 규범통제가 적용되고 있다고 하지만, 우리나라 상황에서 적절한 것인지는 따져볼 문제입니다. 헌재가 입법과정에 개입한다는 것의 전제는 국회의원 다수가 국민의 기본권이 침해되는 법안을 가결했다는 것이어서 영 달갑지 않습니다. 여소야대 국면에서는 단순히 국회에 제동을 걸기 위해 정부가 위헌심판 청구를 할 우려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정치 상황에서 보면 ‘동물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국회를 감시하기 위해 (국민에 의해 선출되지 않은) 헌법재판관들이 최종적인 심사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비춰져 답답합니다.

헌법이 있기에 존재하는 헌재가 정치 실종을 개탄하며 스스로 개헌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권한과 역할을 강화하고자 나서는 상황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공약도 제대로 들어본 적 없는 국민들 앞에서 여야가 이전투구만 거듭하고 있을 때 조용히 웃고 있을지 모를 헌재를 국민은 마음 편히 받아들여야 할까요.

조원일기자 callme11@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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