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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마 놀터’에서 만난 책, 세상 보는 눈이 열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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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협’ 조합원 주부들이 모여 시작
공부방 마련해 ‘줌마 놀터’라 불러
기존 회원들의 넉넉한 배려로
새로운 멤버들도 활발히 활동
“이제 내 인생은 내가 말한다…”
반복된 일상이 쌓여서 부른 권태
읽고 이야기하며 삶의 변화 일궈
어느새 봄이 내렸다. 보라매 하늘은 맑아서 높고, 불어오는 바람은 산들산들 따스하다. 두꺼운 외투 앞 단추를 풀고, 골목을 세어 길 찾아 들어간다. 한때 이 언덕 가득 층층이 쌓였던 판잣집들은 간 데 없다. 재개발을 거쳐 새로 지은 아파트 단지들이 늘어서 무심히 맞을 뿐이다. 기억이 통째로 씻기는 기분이다. 철저한 가난 속에서도 인정을 다지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생각에 잠겨서 걸음을 옮기다 보니 보라매동사무소다.
2층 다사랑문고. 책들이 빼곡한 작은 공간이 아늑하다. 창으로 들어온 오후 햇빛이 가득한 중에 올망졸망 아이들이 코를 박고 책을 읽는다. 재미난 대목이라도 읽는지 온 얼굴이 웃음이다. 아득하던 마음이 절로 누그러진다. 봉혜영씨가 입을 연다.
“오랫동안 서로 함께했습니다. 2005년부터니까 벌써 강산이 바뀌었네요. ‘땅을 지키는 모임’이라는 소비자생협이 동네에 있었어요. 생산자와 직접 연결해 유기농 농산물 등 바른 식품을 소비하려고 주부들이 힘을 합친 곳이었습니다. 지금은 두레생협과 합쳤죠. 저희는 모두 ‘땅모임’ 조합원이었어요.”
생협 조합원끼리 모여 시작한 책 읽기
지금은 유기농도, 생활협동조합도 당연하고 익숙하다. 그러나 ‘땅모임’이 결성된 1993년만 해도 일반인들은 그 뜻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사장을 맡아 ‘땅모임’을 이끈 한손남씨는 생활협동조합 활동가로 긴 세월을 헌신하면서 사람과 자연이, 생산과 소비가 서로 순환하면서 건강하게 공생하는 세상을 만들려고 애써왔다. 봉씨가 말한다.
“무엇보다 엄마들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항상 말씀했어요. 세상이 바뀌려면 사람이 바뀌어야 하고, 사람이 바뀌려면 책을 읽어야 한다고 하셨죠. ‘땅모임’보다 책 읽는 모임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조합에 들자마자 저희한테도 책을 같이 읽자고 권하셨죠. 몇몇이 의기투합해서 모임을 꾸려 같이 환경이나 육아에 대한 책을 읽었어요.”
살아가면서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먼저 답을 내리고 살아가는 것이다. 스스로 삶의 규칙을 세워 세상에 낯선 길을 내고, 자꾸 그 주변을 걷고 다지면서 길을 이룩한다. 세상의 헛됨에 지지도 않고 유혹되지도 않으면서,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을 계속 시도하여 진지를 구축해 간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읽어야 한다. 자본이 밀고 권력이 당기면서 비틀어진 세상의 법을 가로질러서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겠다고 선포하고, 이후에 밀어닥칠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아가려면 먼저 진리에 적합한 몸으로 영혼을 단련해야 한다.
가령, 농약을 쓰지 않은 유기농 음식을 먹는 간단한 규칙조차도 철저히 하려면 얼마나 무수한 난관을 지나야 하는가. 좁디 좁은 사육장에 가두어 일부러 비만을 유발한 고기를 먹지 않는 일은 또 어떠한가. 마음 먹기 전에는 엄청나게 풍요롭던 세상이 마음 먹은 후에는 갑자기 삭막한 사막 같을 것이다. 지배적 규칙에 맞추지 않는 삶을 살아 보려는 일은 사막을 걷는 일과 같다. 오아시스에 이를 때까지 체력을 아끼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자아에 갑옷을 입혀두지 않으면 몇 걸음 가지 못하고 속절없이 넘어질 게 틀림없다.
하나의 법을 무너뜨리고 또 다른 법을 세우려 할 때, 읽기만이 쉽게 우리를 도울 수 있다. 타자의 혀로써 내면을 다시 씀으로써, 읽기는 삶의 기존 규칙을 시험에 들게 하고, 그 규칙의 근거를 흔들어 자유를 확보하도록 해 준다. 책 한 권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인생을 다시 산다. 읽기 전의 자아는 죽어 버리고 새로운 자아로 거듭난다. 읽을 때마다 죽음과 부활의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나이테를 두르는 나무처럼 자아가 무척이나 튼실해진다. 유정영씨가 말을 잇는다.
“세 해쯤 지나 독서 모임에서 몇몇이 돈을 추렴해 아예 작은 공부방을 마련했습니다. ‘아줌마들 놀이터’라고 해서 ‘줌마 놀터’라는 이름을 달았죠. 몇 해 여기에서 모였는데 이 시절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자기만의 방’이 생겼다 할까요. 같이 모여 책 읽고 공부하고, 북아트나 수지침 등도 배웠어요. 각자 반찬을 가져온 후 밥만 해서 나누어 먹기도 했죠. 일종의 생활공동체였어요. 거기서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세상 바라보는 눈도 키우고, 사람 대하는 자세도 달라졌죠.”
“네가 부르기 전에 나는 이미 꽃이었다”
공동체 경험은 사람을 성장시킨다. 나이 들어 독립하거나 가족을 이루면 생활의 틀이 만들어지면서 어느새 일상이 쳇바퀴를 벗어나기 어렵다. 매일의 반복이 쌓여서 권태를 부르고, 권태를 벗어나려고 여행을 가거나 친구를 만나는 등 갖은 애를 쓰지만 어느새 똑같이 사는 자신을 발견한다. 무의미가 찾아온다. 그러고 나면 삶의 보람을 어떻게든 찾으려고 아파트 평수에 집착하거나 아이들 성적에 몰두하거나 뒤끝을 남기는 허무한 수다에 빠져든다. 이게 정말로 잘 사는 걸까? 그러지 못함을 스스로 안다.
열 명 정도 돈을 추렴해 작은 공간을 마련한 후, 일상의 근심을 내려놓고 평소 해보고 싶었던 갖가지 상상을 함께 실험했던 경험은 무척 소중하다. 보라매 독서동아리가 2011년 이래 좀처럼 거르지 않고 한 달에 두 번 독서모임을 계속한 것은 아마도 약해진 자아를 되찾을 수 있었던 그때의 경험 덕분일 터이다. 줌마 놀터의 벽에 이런 말을 붙여두었다고 한다. “이제 내 삶은 내가 말한다./ 네가 부르기 전부터/ 나는 이미 꽃이었으므로….” 물론 이때도 읽기가 빠질 수 없었다. 읽기로 세상에 대한 눈을 열고 쓰기로 자신의 삶을 풀어낸 경험이 가장 기뻤다. 이처럼 서로 지지하고 함께 지탱하면, 새로운 나를 마련해 세상을 사는 일이 훨씬 덜 무섭게 느껴진다. 임정화씨가 이야기한다.
“다른 모임이 햄버거를 먹는 간식이라면, 책 읽는 모임은 한 상 잘 차려서 먹는 정식입니다. 아주 영양가 있는 시간이죠. 수다 모임 나가서 아이들 뒷이야기를 하거나 신세 한탄을 주고받는 일에 지쳤습니다. 그러고 나면 남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정말 허무하죠. 책을 같이 읽는 모임은 나 자신을 축복하는 일과 같습니다. 읽고 이야기하면서 한없이 나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죠. 다른 사람이 말하는 걸 들을 때마다 책에서 또 다른 사람이 보입니다. 같이 읽었으니까 공감이 커지고, 소리굽쇠처럼 공명하는 사랑을 느낍니다. 무엇보다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일입니다.”
덕과 지식 단련해 삶의 변화 일궈내
독서 공동체는 화려하지 않다. 읽은 책을 들고 와서 마음에 와 닿았던 구절을 짚어 가면서 낮은 목소리로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게 전부다. 그러나 그 작은 공간에 세상 모든 일이 지나간다. 이야기를 타고 우주로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시간을 움직여 머나먼 과거로 들어가기도 한다. 사랑과 미움, 정의와 불의, 선함과 악함 등 인생의 가장 중요한 가치들이 격렬한 논쟁과 조분한 발화 속에서 성찰된다. 오랫동안 모임을 함께한 덕분인지 다들 자매같이 편안하다. 개인사 탓에 나고 들기도 했고 때때로 모임을 쉰 적도 있지만, 오랫동안 큰 단절 없이 모임을 이어가며 인생을 주고받아 온 사랑의 공간이다. 한정아씨가 말한다.
“저는 뒤늦게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학부모 모임에 지친 참이었어요. 아이들 이야기가 아니라 나한테 집중하고 싶었습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차에 여기서 독서모임을 한다는 말을 듣고 제 발로 찾아왔어요. 눈빛만 봐도 아는 분들이라 어울리지 못할까 걱정했는데, 잘 받아주셔서 쉽게 적응할 수 있었어요. 모임에 나오면 여행 떠나는 기분이 들어요.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느낌이에요.”
보라매 독서동아리 같은 오래된 독서공동체의 경우, 서로 다져진 관계로 생긴 고유한 분위기 때문에 자칫 새로운 이가 함께하는 데 부담을 가질 수 있다. 기존 회원들의 넉넉한 배려와 의식적 노력 없이는 외연이 좀처럼 넓어지지 않는다. 보라매 독서동아리는 이 부분에서 노하우가 생기면서 고비를 넘어선 듯하다. 한씨에 이어 최근에는 장형선씨가 모임에 합류해 활발히 활동 중이다. 유주희씨가 책으로 말을 돌린다.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읽고 이야기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슬프고 아름답고 행복한 작품입니다. 문장이 정말 좋았어요. 이 책을 읽고 나서 살아온 세월의 길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았습니다. 사랑하면서 살아가지 않으면 무슨 소용 있겠어요. 저는 성 소수자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 있는 그대로 사람을 바라보는 법을 깨달았습니다.”
같이 읽기는 사람을 바꾼다. 편견에 사로잡힌 시야를 열어주고, 경험에 붙잡혀 고집하는 태도를 줄여준다. 인간으로서 누구나 비슷한 삶을 살아간다는 공동의 경험을 환기하면서 어느 하나도 같지 않은 차이를 호명함으로써 ‘따로 또 같이’라는 아크로폴리스적 가치를 실현한다. 거기로부터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단테는 ‘신곡’에서 오디세우스의 입을 빌려서 “너희는 짐승처럼 살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덕과 지식을 구하려고 태어났다”라고 말한다.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 일상 속에서 무뎌져 가는 자신을 채찍질해 몸을 일으킨 후, 옛날 함께 항해했던 수부들을 불러놓고 연설한 말이다. 격정이 살아난 수부들은 배에 올라 다시 바다로 나선다. “덕과 지식”은 일상을 깨는 모험 속에서만 인간에게 주어진다. 같이 책을 읽는 일은 오디세우스의 항해와 같다. 낯선 의식의 침투 속에 온 정신을 노출하면서 덕과 지식을 이룩하는 실천이다. 이러한 종류의 실천을 통해서만 인간은 단련되고, 단련을 통해서만 인간은 진리에 적합한 몸으로 변화한다. 같이 읽기로 덕과 지식을 쌓고, 생협 활동으로 바른 삶을 고민하는 보라매 독서동아리의 앞이 빛으로 가득하기를 소망한다.
장은수 출판평론가ㆍ순천향대 초빙교수
공동기획: 한국일보ㆍ책읽는사회문화재단
보라매 독서동아리 추천 도서
더 늦기 전에 자기 인생의 의미를 찾고 싶은 이 땅의 주부들에게 페터 한트케의 ‘소망 없는 불행’(민음사)을 추천한다. 아내로, 엄마로 주어진 삶을 두려움과 불행 속에서 살아가던 여인은 아들도, 남편도 떠나 보낸 후 뒤늦게 책을 읽으면서 인생이 의미를 찾기에 너무 늦었음을 깨닫고 자살한다.
페터 한트케 ‘소망 없는 불행’(민음사ㆍ2002)
박경리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마로니에북스ㆍ2008)
에밀 아자르(로맹 가리) ‘자기 앞의 생’(문학동네ㆍ2003)
매튜 매케이 등 ‘살며 배우며 성장하며’(유노북스ㆍ2015)
김찬호 ‘모멸감-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문학과지성사ㆍ2014)
김태진 백승휴 ‘아트인문학 여행-이태리’(카시오페아ㆍ2015)
장일순 ‘나락 한 알 속의 우주’(녹색평론사ㆍ2009)
신영복 ‘담론’(돌베개ㆍ2015)
기시미 이치로 ‘늙어갈 용기’(에쎄ㆍ2015)
미겔 데 세르반테스 ‘돈키호테’(열린책들ㆍ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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