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

단독

관광지가 된 체르노빌 폐허… 흥미가 우선, 교육은 뒷전

입력
2016.03.14 04:40

우크라이나, 피폭 우려에도 상품화

'건강상 문제 책임 없다' 각서 쓰고

한 해 1만명 이상 제한구역 투어

관광 금지한 벨라루스와 대조적

사고 4년 지난 후쿠시마도 뒤따라

日정부, 공격적 관광 유치 나서

체르노빌 원전 사고로 폐허가 된 프리피야트를 한 소규모 방문객들이 방호복을 입은 채 돌아보고 있다. 프리피야트는 체르노빌 원전에서 약 3km떨어진 도시로, 4만 8,000여명의 시민들이 영구 피난했다. 피에르 엠마뉴엘 델레트헤 프리랜서기자 pe.deletree@gmail.com
체르노빌 원전 사고로 폐허가 된 프리피야트를 한 소규모 방문객들이 방호복을 입은 채 돌아보고 있다. 프리피야트는 체르노빌 원전에서 약 3km떨어진 도시로, 4만 8,000여명의 시민들이 영구 피난했다. 피에르 엠마뉴엘 델레트헤 프리랜서기자 pe.deletree@gmail.com

“8월까지 체르노빌 발전소에만 1,500명이 왔으니까 연말까지 2,000명은 거뜬히 넘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체르노빌 사고 30주기가 되는) 내년 4월 예약은 벌써부터 들어오네요.”

작년 11월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발전소에서 만난 국제담당 안톤 포발씨는 매일 2,3팀을 맡아 발전소 내부 투어를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소요시간 약 2시간. 발전소에는 그를 비롯한 3명의 직원들이 전세계에서 몰려드는 원전 전문가와 정치인, 언론인 등을 안내하고 있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당시 집권했던 간 나오토 전 총리도 포발씨의 손님 중 하나였다. 그는 “폴란드나 미국에서 온 원전 관계자와 핵무기 보유국 전문가들이 다수”라면서도 “유럽국가의 경우 일반 관광객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최소 33만 명 이상의 피난민을 남긴 체르노빌에는 30년이 지난 지금, 원주민이 강제로 떠난 자리에 세계인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정부와 가이드들은 체르노빌이 원전 안전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교육현장이라 강조한지만 이색장소에서 스릴을 즐기겠다는, 흥미 위주의 관광객도 적지 않다. 체르노빌 관광에는 교육과 상업, 얼핏 상충하는 이 두 가치가 공존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관광 유도하는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관광은 사고 25주기였던 2011년 본격적으로 허용됐다. 2002년부터 제한적 방문은 있었지만 법적으로 전면 허용한 것은 이때부터다. 당시 우크라이나 정부는 이듬해 자국에서 열리는 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 2012)를 겨냥, 체르노빌의 관광지화 방침을 공공연하게 밝히기까지 했다. 빗장을 열자 방문객은 급속도로 늘어났다. 2004년 870명에 불과하던 접근제한구역 방문객은 현재 연간 1만 명 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취재진과 체르노빌 취재를 동행한 비영리기구 프리피야트닷컴의 알렉산더 리박씨는 “주말에는 하루 200~300명과 마주친다. 단체버스도 여러 대 다닐 정도로 관광이 활발하다”고 했다. 특히 프리피야트(체르노빌 원전에서 3㎞ 떨어진 도시. 당초 원전노동자들을 위해 계획적으로 건설됐다가 사고 이후 폐허가 됐다)는 전체 체르노빌 투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코스로, 발전소 투어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몰린다. 외국인 관광객들은 미국 독일 네덜란드 출신이 가장 많고, 아시아에선 일본인이 압도적이다. 특히 올해는 사고 30주기여서 역대 최대 인파가 될 전망이다. 실제로 대표적인 체르노빌 여행사 중 하나인 ‘체르노빌 투어’ 홈페이지를 보면 연말까지 예약이 이미 빼곡히 차있다. 우크라이나에 이런 관광회사는 최소 20군데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체르노빌 투어를 진행하는 한 여행업체 홈페이지. 4월 예약이 꽉 차있다. 이 업체는 홈페이지에서 세계 유수언론과 협력한다고 광고하고 있다. 피에르 엠마뉴엘 델레트헤 프리랜서기자 pe.deletree@gmail.com
체르노빌 투어를 진행하는 한 여행업체 홈페이지. 4월 예약이 꽉 차있다. 이 업체는 홈페이지에서 세계 유수언론과 협력한다고 광고하고 있다. 피에르 엠마뉴엘 델레트헤 프리랜서기자 pe.deletree@gmail.com

방문객들은 짧게는 당일, 길게는 1주일 동안 체르노빌 발전소와 폐허가 된 마을들, 사람이 떠난 자리에 생태계가 회복되는 풍경 등을 돌아보게 된다. 비용은 단체투어 기준으로 하루 약 90~165달러로 책정돼 있지만, 개별투어는 국적이나 교통수단, 체류기간, 방문지역, 통역 및 방사선 수치 제공 등 세부 옵션에 따라 가격이 크게 올라간다. 우크라이나의 경제규모나 물가수준에 비하면 꽤 비싼 셈이다.

체르노빌 관광에도 안전성 논란이 따른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체르노빌 내 많은 지역의 방사선 수치가 이미 일반적 수준으로 떨어진 상태이며 ▦전문 가이드가 동행하기 때문에 걱정할 것이 없다는 입장. 반면 그린피스의 원전전문가인 얀 반데 푸트 활동가는 “체르노빌 사고는 원자로 자체가 폭발해 방사성 낙진이 곳곳에 떨어진 경우로 몇 년 전 그린피스가 조사한 결과 아직도 땅 표면 등에 방사성 물질들이 잔존하고 있음이 확인됐다. 옷이나 신발에 이런 물질이나 오염된 잔해가 묻은 채 이동하면 계속적으로 피폭 당할 우려가 있다”고 주장했다. 취재진이 방문했을 때도 필수코스 중에는 프리피야트의 놀이공원, 코파치유치원 앞 등 ‘핫스팟’(높은 방사선 수치를 보이는 지점)이 많았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 참가자들이 투어 전 ‘건강상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내용의 문서에 미리 서명을 해야만 투어를 시작할 수 있다.

체르노빌 관광객을 싣고 온 현란한 도색의 핀란드 관광버스. 피에르 엠마뉴엘 델레트헤 프리랜서기자 pe.deletree@gmail.com
체르노빌 관광객을 싣고 온 현란한 도색의 핀란드 관광버스. 피에르 엠마뉴엘 델레트헤 프리랜서기자 pe.deletree@gmail.com

관광 금지시킨 벨라루스

‘다크투어리즘’이란 잔혹한 참상이 벌어졌던 역사적 장소나 재난, 재해현장을 돌아보는 여행을 뜻하는 말.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캄보디아 킬링필드 유적지 등이 대표적 사례인데, 체르노빌 투어도 그런 측면이 있다.

하지만 도처에 방사성 물질이 남아있는데다, 가이드의 지침을 완벽히 따른다고 해도 소량의 방사선 피폭을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를 충분히 고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체르노빌 관광은 다른 다크투어리즘과는 다른 안전성 논란, 윤리적 논쟁이 따른다. 특히 상업적 목적으로 뛰어든 관광업체들이 늘어나면서 애초 의도했던 ‘교육’기능은 갈수록 퇴색하고 있다는 평가다. 법제화 이전부터 활동해온 한 가이드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고액의 흥미위주 투어들이 성행하고 있다”며 “교육을 목적으로 한 투어만 허용하기 위해 전면 무료화하거나 최소한 면허증을 부여하는 등의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체르노빌 사고 최대피해국인 벨라루스는 아직도 원전 30㎞ 내 출입제한구역 에서는 상업적 관광을 일절 금지하고 있다. 피터 필로(30) 벨라루스 녹색당 체르노빌위원회 의장은 “접근 허가를 받는 데만 수개월을 기다려야 하고 허가 없이 드나들다 경찰에 적발되면 수백 달러 벌금을 내야 한다. 오염지역 내 숲에서 불이라도 나면 허가는 기약 없이 늦춰지기 때문에 영리를 목적으로 한 활동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벨라루스의 한 기자에게 이토록 두 나라의 대응이 극명하게 갈리는 이유를 물었더니, 예부터 내려오는 우스갯소리로 답을 대신했다. “못박힌 의자에 앉으라고 하면 러시아인은 못을 빼버리고, 우크라이나인은 뺀 못을 고쳐서 되팔며, 벨라루스인은 그 못 위에 앉아 꾹 참는다고 합니다.”

후쿠시마도 시작됐다

사고 뒤 ‘겨우’ 5년이 지난 후쿠시마에는 벌써부터 관광 부흥을 위한 각종 시도가 한창이다. 체르노빌과 다른 점이 있다면 민간 아닌 정부가 나서서 공격적으로 관광객 유치에 나서고 있다는 것. 그러나 이들은 후쿠시마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야외활동을 부각시킬 뿐 방사능 정보는 별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

실제로 후쿠시마현 공식 관광안내 홈페이지를 보면 사고 뒤 2012년부터 한국을 비롯한 해외 청소년 초청 문화체험행사 개최이력들이 유독 눈에 띈다. 칠레 출신 유학생 크리스티앙씨는 “2년 전 후쿠시마 공장과 경작지 등을 방문해 방사선 수치를 확인하고 쓰나미 현장을 돌아보는 일정에 참여했다”며 “안전하다는 말에 채소를 사오기도 했다”고 했다. 도쿄에서 만난 한 시민은 “3.11 이전에는 도쿄에서 후쿠시마 여행 홍보물을 본 기억이 없지만 지금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지하철 등에 도배된다. 도심 한복판에 후쿠시마 농산물 판매 부스도 종종 차리는데 찝찝해서 사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지난해 여름 도쿄 긴자역 지하에서 열린 후쿠시마 지역특산물 전시 및 판매행사. 최근들어 도쿄역과 오다이바 등 관광객들이 자주 오가는 금싸라기 땅에 후쿠시마 지역특산물을 알리고 판매하는 일이 잦아졌다. 피에르 엠마뉴엘 델레트헤 프리랜서기자 pe.deletree@gmail.com
지난해 여름 도쿄 긴자역 지하에서 열린 후쿠시마 지역특산물 전시 및 판매행사. 최근들어 도쿄역과 오다이바 등 관광객들이 자주 오가는 금싸라기 땅에 후쿠시마 지역특산물을 알리고 판매하는 일이 잦아졌다. 피에르 엠마뉴엘 델레트헤 프리랜서기자 pe.deletree@gmail.com

안전이나 교육보다는 지역경제부흥 목적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정부와 달리, 민간에서는 방사능 사고 여파를 직접 보여주겠다는 체르노빌식의 ‘다크투어리즘’상품이 서서히 생겨나고 있다. 아직은 주로 개인 가이드 수준에 머물고 있지만, 후쿠시마 젊은 여성들로 구성된 ‘여자 생활연구소’(Girls life labo)처럼 단체단위 참여도 없지 않다. 이들은 ‘후쿠시마의 현재를 통해 미래를 생각해보는 스터디 투어’라는 콘셉트를 내걸고 주민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자리를 마련하거나 재난현장을 방문해 제염상황을 상세히 전달하고 있다. 이 밖에도 후쿠시마를 문화적 관점에서 현실적으로 재건하겠다는 목표아래 사회학자, 언론인, 건축가, 미술가 등이 만든 ‘후쿠시마 제1원전 관광지화 계획’이라는 모임도 있다.

개인 자격으로 후쿠시마 오염지역을 안내하고 있는 히라이 유타씨는 “후쿠시마 방문을 권유하면서 정작 위험성은 숨기는 정부의 홍보방식에는 문제가 있다”면서 “다크투어리즘이라고 하면 어감 때문에 지역민들이 불쾌해하는 경우가 있지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기억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어쨌든 아픔의 현장을 직접 보여주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고 말했다. 다만 “다만 관광이 본격화한다면 후쿠시마 사람들이 직접 참여하는 형태가 돼야 할 것”이라면서 아픔을 겪은 현지주민들을 외부인의 돈벌이 도구나 구경거리로 만들어선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현지에선 2012년 유럽축구선수권대회가 체르노빌에 그랬던 것처럼, 2020년 도쿄올림픽이 후쿠시마 투어에 불을 지피는 도화선이 될 거란 전망이 우세하다.

체르노빌ㆍ후쿠시마=김혜경 프리랜서 기자 salutkyeong@gmail.com

다무라 히사노리 프리랜서 기자 hisanori.ymr@hotmail.fr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