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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런히 읽다 보니 경청하는 습관 몸에 뱄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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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에 잠긴 도시를 내려다보면서 혼자 가만히 중얼거린다. 가벼운 입맞춤 하듯, 입술이 둥글게 모이면서 열렸다 닫혔다 한다. 부꾸부꾸, 부꾸부꾸, 부꾸부꾸. 한 번 발음할 때마다 둥근홀소리 ‘우’가 네 차례 이어지면서 리듬을 만들어 낸다.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모임 장소인 순천 카페브라운의 창에 붙어 있던 책 표지들이 창 밖 어둠 위로 문장들을 미끄러뜨린다.
어떤 말이든 한 번 소리를 내면 뜻 전하는 소리이지만, 두 번 되풀이하면 마음 간절한 기도가 된다. 말에는 본래 신성함이 깃들어 있는데, 한 번으로는 그 빛이 드러나지 않아 인간을 위해 사용하고, 두 번이라야 비로소 그 힘이 스미어 나와 신과 부르는 데 쓸 수 있는 게 아닐까. 김유경씨가 먼저 말을 꺼낸다.
‘안전한 만남’의 자리 독서공동체
“모임은 2010년에 처음 시작되었답니다. 책 좋아하는 분들 대여섯 명이 모였습니다. 처음 모임을 시작한 분은 여섯 달 만에 일이 생겨서 서울로 올라가 버렸고, 나머지 사람이 이어받아 띄엄띄엄 모이다, 2012년부터 지금 같은 틀이 잡히면서 활발해졌습니다. ‘부꾸부꾸’는 부지런히 꾸준히 책을 읽자는 마음을 담아 지었습니다. 북(Book)을 꾸준히 읽자는 뜻도 있습니다. ‘시조새’님한테 들은 이야기예요.”
‘시조새’라는 말이 나오자 모두 웃음이 터진다. ‘시조새’는 모임 식구들이 이 모임을 가장 오래 나오고 또 부흥시킨 김인헌씨를 존중해서 부르는 말이다. 처음 시작되고 난 후 다소 지지부진했던 모임을 부추기고 이끌어서 지금과 같은 단단한 성세를 이루는 데 헌신한 사람이다. 수많은 책모임을 진행한 프로도 무섭다. 공들여 읽을 책을 선정해서 모임을 공지하고 사람들 반응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초조를, 텅 빈 공간에서 사람들을 기다리면서 조금씩 마음이 내려앉는 공포를 수없이 겪은 후에야 비로소 모임이 서는 법이다. 막내인 김형은씨가 말을 잇는다.
“고향이 해남입니다. 직장 때문에 여기로 왔어요. 짐 풀고 나니 이 도시에 나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은 어딘가 소속될 때 행복하잖아요. ‘안전한’ 모임을 찾고 싶었어요. 책 읽는 사람이 낫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시골 살 때 골방에서 책 읽는 걸 좋아했죠. 같이 책 읽는 모임에 대한 로망도 있었고요. 살아 있는 사람을 만나서 책 이야기를 나누다니, 너무너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이지성 선생님 카페에서 모임을 발견했습니다.”
‘안전한 만남’이라는 말에서 다시 웃음이 터진다. 지방 소도시는 서울 같은 대도시와는 사뭇 다르다. 직장을 얻어 온 타지 사람은 곧바로 티가 난다. 저녁이면 기대어 갈 곳 없고 마음 놓고 만날 이 없으니, 낯선 땅에 뿌리 내린 가슴은 외로운 줄을 더욱 탄다. 이럴 때 독서공동체는 마음을 내려놓을 ‘안전한’ 만남의 자리를 제공한다. 너무나 안전한 바람에 부꾸부꾸에서는 간절한 기대에도 여섯 해 동안 아직 커플이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누군가 이 말을 하자마자 다시 웃음이 터진다. 모임에 삶의 우울을 건강한 웃음으로 바꾸는 마술피리가 있는 게 틀림없다.
“취미도 없이 ‘아저씨’ 되는 게 싫었어요”
김형은씨를 부꾸부꾸로 이끈 카페는, 이지성의 온라인 카페 ‘폴레폴레’를 말한다. 이지성은 ‘꿈꾸는 다락방’ ‘리딩으로 리딩하라’ 등 자기계발서로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다. 그의 온라인 카페에는 다른 저자 블로그나 카페에는 없는 독특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서울을 제외하고 전국 각 지역의 독서모임을 등록해서 같이 읽기를 독려하는 공간이다. 이 공간을 들여다보고 나니 독서 공동체를 이룩하는 데 저자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작지만 중요한 실마리를 찾은 기분이다. 부꾸부꾸에도 이 카페를 통해 모임을 찾은 사람이 여럿 있다. 장정수씨가 이야기를 보탠다.
“간혹 야심을 품고 지적인 이성과 만나고 싶어서 참여하는 분도 있긴 합니다. 하지만 회장단 취임식이나 송년회 등 한 해 몇 번 정도 제외하면 저희 모임은 뒤풀이가 거의 없어요. 책 읽고 이야기하는 데 열중하는 ‘안전한’ 모임이니까 썸 타러 오는 분들은 실망이 클 겁니다. 서른 살 넘어 취미가 없으면 남자는 급격히 초라해져요. 나날이 멋을 잃어가면서 ‘아저씨’가 되어버립니다. 저는 그런 식으로 나이 들기가 끔찍이 싫었습니다. 모임에 나와 다양한 책을 추천 받고 읽어가면서 한 주 한 주 새로운 인생을 사는 기분입니다. 수요일 저녁마다 아름다운 풍경의 일부로 살아가는 게 좋습니다.”
독서공동체를 이루는 공동의 규칙은 없다. 부꾸부꾸는 가장 소박한 길을 택했다. 매주 수요일 책을 읽고 카페 브라운에 모여서 열렬히 이야기를 나눈 후 그 마음을 담아서 일상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50대도 몇 사람 있지만, 주로 20, 30대 직장인들이 먹고살기에 바쁜 시간을 쪼개서 모이다 보니 다음 날을 생각하면 술 모임은 엄두를 내지 못한다. 회장단은 세 사람으로 이루어지는데, 정회원 중에서 맡아서 여섯 달 임기로 일한다. 회장은 책 선정을 주로 지원하고, 부회장은 신입회원을 도맡고, 총무는 모임비용 등을 관리한다. 세 번 이상 모임에 참여하면 정회원으로 승격되어 책을 추천할 권리를 얻는다.
독서율 94%…기적의 도서관이 낳은 기적
오직 책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뿐, 자라난 배경이 다르고 직장도 다르고 관심 역시 각자 다른 만큼, 같이 읽는 책의 다양성을 보장하는 게 독서공동체의 가장 큰 일이다. 부꾸부꾸는 매달 둘째 주에 제비뽑기로 장르를 선정하고, 셋째 주에는 그 장르에서 읽고 싶은 책을 각자 한 권 이상 골라 와서 투표로 선정한다. 다음 달에 읽을 책이 정해지는 것이다. 체계적이고 민주적이다. 그 다음은 곧바로 도서관 대출 경쟁이 시작된다. 도서관 이야기가 나오자 김유경씨 목소리가 한껏 밝아진다.
“저 역시 직장을 얻어 광주에서 여기로 왔습니다. 책 읽기를 좋아했는데, 친구가 같이 모임에 가자고 해서 모임으로 나왔습니다. 모임에 나오면서 같은 책을 다르게 읽는 경험이 신비하게 느껴졌습니다. 이곳으로 이사 와서 깜짝 놀란 것은 순천은 ‘책 읽기 좋은 도시’라는 겁니다. 인구 대비 도서관 숫자가 정말 많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순천에 와서 세 번 이사했는데 항상 10분 이내에 도서관이 있었습니다. 광주에 있을 때에는 도서관 가기 어려웠거든요. 작은 도시라서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제가 운이 좋았는지도 모릅니다.”
2003년 국내 최초의 어린이 전용 도서관인 ‘기적의 도서관’이 건립된 이래, 순천은 공공도서관과 작은도서관을 합쳐서 50곳이 넘는 도서관이 도시 곳곳에 실핏줄처럼 뻗어나가 ‘도서관 도시’라는 영예를 얻었다. 최근 발표된 국민독서실태조사에서 성인 평균 독서율이 65.4%밖에 되지 않는 참담한 상황이지만, 순천 시민들의 독서율은 놀랍게도 94.4%에 달한다. 기적의 도서관이 독서의 기적을 이룬 것이다. 이처럼 순천에 도서관은 넉넉하지만, 모임 회원 또한 서른 명이 넘기에 자칫 방심하면 책을 빌리기 어렵다. 그럴 땐 어쩔 수 없이 모임에서 쓰는 메신저인 틱톡 단체방에 빨리 읽어달라고 호소하거나, 지역서점에 부탁해서 구입할 수밖에 없다. 순천 토박이인 최명은씨가 뒤를 받친다.
독서와 토론은 타인에 귀 기울이는 연습
“어릴 때 친하던 친구들이 하나씩 서울 가고, 결혼하면서 주변을 떠나다 보니 어느새 혼자더라고요. 모임을 찾아 산악회 등도 기웃거렸는데, 결국 술 모임이었어요. 실망이 컸죠. 이 모임에 나와서 비로소 모임 하는 보람을 얻었어요. 특히 ‘책은 도끼다’를 읽었을 때 충격이 컸습니다. 독서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전에는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느냐에 매달렸는데, 한 권을 읽더라도 나한테 무엇이 얼마나 와 닿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마음에 남는 게 많은 인문학 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파이팅이 너무 넘치는 바람에 ‘성학집요’를 선택해 읽다가 모두 멘붕에 빠진 적도 있죠.”
‘성학집요’ 이야기에 다시 웃음이 터졌다. 모임에 나오기 싫었다는 둥, 딴이야기만 했다는 둥 스스럼없고 자연스럽고 자유롭다. 분위기를 타자 말릴 수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모임 이야기가 쏟아진다. ‘이기적 유전자’는 천재가 일부러 스캔들을 불러일으키려고 쓴 책이라느니, ‘미친 듯이 심플’은 내용이 허망해서 남는 게 없다느니, 하나같이 화제작들 흉을 보기 시작한다. 모임 분위기가 떠올라 슬며시 웃음이 난다. 김유경씨가 스르륵 수습에 나선다.
“부꾸부꾸는 캐주얼한 모임입니다. 남을 가르치려는 태도가 없습니다. 책을 읽고 내용은 함께 나누지만, 의견을 하나로 모으지는 않습니다. 다른 사람 생각을 굴복시키고 자신이 간직한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려고 논쟁을 거는 분도 가끔 있었지만 저희는 자유를 좋아합니다.”
독서공동체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시민적 가치인 경청을 두 번에 걸쳐 연습하도록 만든다. 첫 번째 단계는 저자가 말하는 바를 귀 기울여서 잘 파악하는 일이다. 두 번째 연습은 거기에 덧다는 사람들 의견을 존중하면서 차이를 듣는 일이다. 타자에 대한 인정이 가장 큰 자유다. 타자에 의해 억압받지 않는 내 자유의 기초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경청의 오랜 실천을 통해 부꾸부꾸는 이 땅에서 각자의 자유가 억압되지 않는 시민들의 공간을 또 하나 이루어낸 셈이다. 김형은씨가 말을 맺는다.
“모임 하면서 제가 추구하는 가치를 지속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풀뿌리 같은 작은 공동체에서도 아름다운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보면서 제 안이 조금씩 단단해졌어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았습니다.”
장은수 출판평론가ㆍ순천향대 초빙교수
부꾸부꾸 추천 ‘함께 읽으면 더 맛난 책’
혼자 읽는 것보다 여럿이 함께 읽었을 때 더 맛을 느낄 수 있는 책들이 있다. 뻔할 거라 생각했던 고전이 그러하고, 짧지만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는 시집이 그러하다. 또 너무 어려워서 혼자서는 읽을 엄두를 못 냈던 과학서적도 함께 읽으면 맛이 더 배가되는 책이다. 또 같이 읽고 문학기행이나 관련된 곳을 가 볼 수 있는 책도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으면 좋다. 마지막으로 ‘책을 읽는다는 것’에 대한 책은 독서가 좋아 모인 사람들이라면 꼭 함께 읽고 서로에게 독서란 어떤 의미인지 이야기해 보길 추천한다.
간송 전형필(이충렬, 김영사, 2010)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돌베개, 1998)
무진기행(김승옥, 민음사, 2007)
순간의 꽃(고은, 문학동네, 2001)
엄마 힘들 땐 울어도 괜찮아 (김상복, 21세기북스, 2004)
이기적 유전자(리처드 도킨스, 을유문화사, 2010)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밀란 쿤데라, 민음사, 2009)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무라카미 하루키, 비채, 2012)
책은 도끼다(박웅현, 북하우스, 2011)
피로사회(한병철, 문학과지성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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