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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년에 독서동아리 41개…시골학교에서 기적의 독서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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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소리가 아름다운 홍천여고예요.”
함께 외치는 아이들 목소리에 자부가 넘친다. 곧이어 웃음이 튀밥처럼 터진다. 타고난 명랑이 재주를 높이 부린다. 바깥의 찬 공기는 아랑곳없다. 이야기꽃이 온도를 올리면서 도서실이 저절로 따스해진다.
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서가에 책들이 가지런하다. 오른쪽 창가로 색색으로 서류 파일이 나란하다. ‘연화’ ‘솔솔솔’ ‘나이끼’ ‘25시’ ‘베리’ ‘용팔이’ ‘또바기’ ‘늘봄’ ‘말글터’ ‘시나브로’ ‘안다미로’ 등이 흰 라벨에 적혀 있다. 2015년 한 해 동안 강원 홍천군 홍천여고 1학년 학생들이 꽃피운 독서동아리 이름들이다. 교실 붕괴를 염려하는 교육 환경을 생각하면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무려 수십 군데에 이른다.
‘2015 국민 독서실태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고등학생 열 명 중 한 명(8.7%)은 한 해 내내 책을 전혀 읽지 않는다. 다섯 명(51.9%)은 스스로 독서량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세 명(31.8%)은 공부하느라 시간이 없어서, 네 명 중 하나(24.1%)는 책 읽기가 싫고 습관이 들지 않아서 책을 충분히 읽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열 명에 한 명쯤(7.2%)은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몰라서 독서를 제대로 못하고 있다고 한다.
●모든 학생을 위한, 모든 주제의 동아리
이 수치만 해도 이미 충격적이다. 하지만 교사들 체감은 이보다 훨씬 심각하다. 책을 읽지 않는 것은 명예를 잃는 행위이기에 아이들이 이를 의식해서 상당히 부풀려 답할 뿐 사실상 우리는 학생들이 책을 읽지 않아도 공부할 수 있는 나라, 어쩌면 학생들이 책을 읽지 않아야 공부할 수 있는 나라에 살아간다는 것이다. 서현숙 교사가 말한다.
“지금까지 학생 독서동아리는 많은 경우, 학생들 사이의 경쟁을 유발하는 독서 경연 중심으로 지도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공부 잘하고 말 잘하는 엘리트 학생들 중심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죠. 나머지 학생들은 들러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책을 읽으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이러한 조건에서는 건강한 흥미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저희는 모든 학생을 위한 모든 주제의 독서동아리를 지향합니다. 학생들이 자율로 모임을 만들고 서로 읽을 책도 정합니다. 모임 크기도 두 명에서 대여섯 명까지 제 각각입니다. 동아리 운영 경험을 서로 나누는 자리에서도 자유롭게 발표하도록 형식을 정하지 않습니다.”
홍천여고는 기적을 이룬 학교다. 2015년 단 한 해 만에 학생 독서교육의 중대한 상징으로 떠올랐다. 250명에도 못 미치는 1학년 학생들이 결성한 독서동아리만 무려 마흔한 군데, 교사가 모임을 주도하지 않아도 자율적으로 모이고 흩어지면서 책을 스스로 골라 읽고 토론을 한다. 본래부터 친해서, 관심이 비슷해서, 우연히 마음이 맞아서, 공부에 도움이 될까 해서, 모임을 함께 하는 이유가 다양하다. 온 학교에 독서 동아리의 꽃이 활짝 피었다. 허보영 교사가 말한다.
“책이 아니어도 학생들이 할 만한 자치 활동은 많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는 것보다 아이들을 성장시키는 활동은 드물죠. 책을 읽으면 자신을 의식하게 됩니다.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 이렇게 살아도 좋은 걸까 하는 ‘불편한 의식’이 생기죠. 주어진 답을 외는 게 아니라 스스로 사고하고 세상에 질문을 던질 줄 알아야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생각하는 것 자체가 가장 중요한 성장입니다.”
●독서교육 이대로 안 돼…두 교사 의기투합
두 사람은 이미 십여년 전에도 홍천여고에 함께 근무한 적이 있다. 같이 독서교육을 고민했고, 그 동안 각자 다른 학교에서 공부를 깊이 하고 경험의 두께를 늘렸다. 학교 현장은 독서를 일으키기에 척박했고, 혼자만으로는 항상 힘에 부쳤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독서교육을 제대로 해보려고 근무지를 서로 맞추어 처음 만났던 홍천여고로 되돌아왔다. 오랫동안 고민하고 현장에서 절차탁마한 생각들을 꼼꼼하게 계획해 학생들 스스로 모임을 이루어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밑거름으로 부렸다. 동아리 대표로 여섯 아이가 차례로 둘러앉는다. 하은이가 이야기한다.
“저희 동아리 이름은 ‘나이끼’예요. 다섯 명이 뭉쳐서 이끼처럼 끈질기게 책을 읽겠다는 마음으로 이름을 지었어요. ‘나의 끼’를 마음껏 발산하자는 뜻도 있죠. 같이 책을 읽으니까 시야가 넓어진 느낌이에요. 훨씬 예민해진 것도 같고요. ‘김선우의 사물들’이라는 책을 같이 읽은 다음에, 식사하는데 갑자기 밥이 생명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전에는 그런 일이 한 번도 없었는데요. 저희 동아리는 책 읽은 다음에 토론 대신 책을 가지고 놀아요. 책 내용을 사진으로 찍는다든지 하는 활동을 해요. 좋아하는 활동으로 책을 표현하다 보니 어느새 책을 읽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게 되었어요.”
활동 이야기가 나오자 수민이가 말을 덧댄다. “저희 동아리 ‘25시’는 책 읽기에 24시간도 부족하다는 뜻이에요. 저희는 일상 속 과학을 다룬 ‘시크릿 하우스’를 읽고, 과학적 사실 네 가지를 골라 친구들이랑 동영상을 만들었던 활동이 좋았어요. 일인다역을 해 가면서 카메라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발로 뛰면서 촬영한 게 기억에 남아요.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세상을 멋있게 살려면 책 읽는 여유를 부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좋은 책은 움직임을 일으킨다. 책을 읽고 나면 심장이 두근대면서 입술이 근질거리고 몸이 들썩인다. 책은 사람을 춤추게 한다. 말은 글을 부르고, 글은 말로 이어지기 쉽기에 책을 읽으면 흔히 수다를 나누고 싶어하지만 풍선이 날아오르듯 자연스레 책이 일으키는 몸의 움직임을 따라붙는 것도 좋다. 책이 일으키는 연상을 활동으로 표현해 보는 것이다. ‘나이끼’는 ‘김선우의 사물들’을 읽고 본받아서 일상의 사물들을 사진으로 찍고 느낌을 기록한 ‘나이끼의 사물들’이라는 책을 만들었다. 성은이가 말을 쏟아 낸다.
“저희 동아리 ‘베리’는 한 주일에 두 번 모여서 그림책이나 동화책을 읽어요. 저는 중학교 때까지는 책을 거의 읽지 않았어요. 그림책 독서 모임을 시작하고 나서 매일 책을 읽어서 참 좋아요. 처음에는 친구들이랑 약속했으니까 어쩔 수 없이 책을 읽었지만 점점 읽는 게 좋아져서 지금은 꽤 두꺼운 책도 같이 읽을 수 있게 되었어요. ‘꾸뻬 씨의 인생여행’을 읽고 ‘나만의 인생수첩’을 진지하게 써 본 게 가장 기억에 남아요.”
●독서, 지식 축적 넘어 자유로운 놀이
교사가 동기를 마련해 주고 자유를 연습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면, 학생들은 스스로 활동을 기획하고 실천하면서 독서를 하나의 놀이로 이어 간다. 동화책에 나오는 각종 삽화들을 가지고 전시회도 하고 근처로 가볍게 독서기행도 떠나면서 재미를 붙여 간다. 지식을 머릿속에 담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배움을 갖가지로 변주해서 자신의 삶에서 실행해 보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인류가 이룩한 지식 전체가 이미 가상공간에 옮겨져 있고, 손 안의 화면을 통해 언제, 어디에서나 접속해서 이용할 수 있는 세상에서는 지식 자체보다 지식을 새롭게 배치하고 편집하여 세상의 온갖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응용할 줄 알아야 한다. 자유를 부여하면 학생들은 미래에 필요한 능력을 스스로 만들어 간다. 은경이가 활달하게 말을 잇는다.
“저희 동아리 연화는 선생님이 꿈인 학생들 다섯 명이 모였어요. 교육을 주제로 한 책을 읽고 서로 격려해요. 예전에는 ‘트와일라잇’ 같은 판타지 소설을 주로 읽었어요. 하지만 저희도 인생을 생각할 나이잖아요. 진로랑 결합해서 책을 읽기로 했어요. 카페 같은 데서 같이 점심을 먹으면서 오래 토론해요. 마음에 맞는 친구들을 만나서 다행이에요. ‘책갈피에 담아 놓은 교육이야기’ ‘수업을 비우다, 배움을 채우다’ ‘꼴찌도 행복한 교실’ 등을 읽으면서 교육이란 무엇인지, 선생님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배우는 중이에요. 송정지역아동교육센터에 가서 같이 봉사활동을 하면서 미리 선생님이 되어 보기도 했어요.”
●“책 읽으며 세상의 진실에 눈 떴어요”
“저희도 인생을 생각할 나이”라는 말에 아이들 모두가 웃음을 터뜨린다. 아이들도 고민이 많다. 틈만 나면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궁리한다. 인생이 자신에게 물어오는 것에 심각히 답하려 한다. 이럴 때 아이들한테 필요한 것은 경험을 갖춘 부모나 교사만은 아니다. 눈높이를 맞춘 우정의 연대가 더욱 필요하다. 친구들과 책을 같이 읽고 꿈을 나누는 것은 내면의 두께를 넉넉히 자라게 함으로써 평생의 힘이 된다. 수정이가 말을 보탠다.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 같은 책을 읽고 질문을 뽑아서 이야기 나누고 생활글을 써요. 개인적으로는 처음 독서 토론에 참여했는데, 자기주장만 늘어놓으면서 다투지 않고 여럿이 함께 토론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충격을 받았어요.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사소한 것부터 다시 보게 되었죠. 가령, 마트 같은 데에서 광고를 보면, 예전과 달리 그 상품에 얽힌 환경문제 등도 같이 떠올리게 되었어요. 자기가 성장한 것을 느낄 수 있으니까 행복해요.”
읽기는 가장 강렬한 대화다. 정신이 중첩되고 영혼이 뒤섞이는 내적인 충격의 연속이다. 쌓아온 삶의 경험에 따라서 다르게 연주될 수밖에 없기에 어떤 책도 나와 똑같이 읽는 사람은 존재할 수 없다. 같이 읽기를 통해 이 단순한 사실을 체험하는 것으로도 사유의 획일성은 깨어지고 창의의 몬스터들이 날뛰기 시작한다. 소연이가 수줍게 보탠 말이 긴 여운을 남긴다.
“책을 읽기 전에는 진실을 모르는 채로 살았죠. 친구들하고 탈핵 관련 책을 읽고 강의도 들으면서 세상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어요. 더 이상 바보가 되지 말자고 생각하면서 책을 열심히 읽게 되었어요.”
전국 어디에나 흔한 시골학교에서 ‘책의 학교’로 성장한 홍천여고. 올해 새로 맞는 신입생은 또 어떤 동아리를 이루고 거기에서 기적이 일어날지 자못 궁금하다. 다시 찾고 싶다.
장은수 출판평론가ㆍ순천향대 초빙교수
홍천여고 학생들이 읽고 권하는 책
학교에서 친구들과 독서동아리 활동을 시작하려는 학생들이 함께 읽고 토론하기에 좋은 책을 골랐다. 그 중에서도 먼저 오연호의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오마이북, 2014)를 우선 권하고 싶다. 친구를 상대로 경쟁하는 법부터 가르치는 한국의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청소년들에게 더불어 함께 성장하는 협동의 삶도 충분히 가능함을, 그런 꿈같은 삶을 현실로 살아가는 나라들이 있음을 알려주는 책이다.
공동기획 한국일보ㆍ책읽는 사회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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