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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끝뉴스] 국회의장 공관 앞에 찾아온 특별한 손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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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겨울 들어 가장 추운 아침이던 28일, 영하8도 강추위를 뚫고 서울 한남동 국회의장 공관 앞에 특별한 손님들이 찾아왔습니다. 두툼한 패딩 점퍼에 빨간 앞치마를 두르고 모자와 목도리, 마스크를 단단히 챙겨 입은 중장년 아주머니들입니다. 이들의 앞치마에는‘엄마부대봉사단’이라는 글씨가 선명했습니다. '봉사단' 뒤에는 '정의화 국회의장은 직권상정 결행하여 입법부를 정상화하라’는 현수막이 걸려있었습니다.
손에는 저마다 피켓도 들려있었습니다. ‘정의화 의장은 선거법 직권상정하기 전에 5개 법안을 먼저 처리하라’, ‘기업활력제고법 반드시 통과시키세요. 청년들에게 일터를 주고 희망과 꿈을 주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야가 팽팽히 맞서있는 노동개혁법ㆍ기업활력제고법ㆍ대테러방지법 등 5개 ‘쟁점 법안’이 처리되도록 국회의장이 직권으로 법안을 상정해야한다는 요구입니다. 이렇게 국회의장에게 의사를 표시하려 공관 앞에 사람이 모여든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고 합니다.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던 봉사단은 오전 8시 정의화 국회의장이 출근길에 오르자 소리 높여 피켓의 문구를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확성기가 동원됐고 어떤 이는 눈물을 보이며 절규에 가까운 호소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 봉사단 앞에 갑자기 정 의장의 차가 멈춰 섰습니다. 보좌진의 만류에도 “이 추운 날 이렇게 많이 나와 있는데 그냥 갈 수는 없다”며 지시한 것이지요. 그런데 그때 정 의장의 눈에 "국회의장은 국가비상사태라고 말씀하셨다"고 쓰인 피켓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정 의장이 직권상정을 위한 요건 중 하나인 '국가비상사태'를 인정했다면서 그러므로 직권상정을 해야한다는 의미입니다. 잠시 후 차문이 열리고 정 의장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정 의장은 "사실이 아닌 것을 쓰면 되겠습니까"라며 봉사단에게 다가갔습니다. 빨간 앞치마 부대가 정 의장을 금세 에워쌉니다. 한 회원이 “의장님이 국가비상사태라고 말씀하셨잖아요”고 따지자 정 의장은 "나라에서 대통령 다음 서열인 국회의장이 대외적으로 국가 비상사태라고 한다면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투자를 하겠습니까, 그러면 일자리가 생기겠습니까, 경제가 더 어려워지지 않겠습니까"라고 반문하며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정 의장은 "법으로 국회의장이 직권상정을 못하게 돼 있고, 법으로 할 수 있다고 해도 고민해야할 사안"이라며 직권상정을 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현재 대한민국 상황은 국회의장이 법안을 직권으로 상정할 수 있는 법적 요건에 해당하지 않으며, 만약 해당한다 하더라도 국가적 파급효과를 감안해 신중히 결정할 사안이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국회의장이니까 (직권상정을) 할 수 있다”는 볼멘 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그러자 정 의장은 “3년 전에는 가능했지만 법이 바뀐 것을 모르시는 모양이지요”라며 “국회선진화법이 제정되면서 전쟁, 전시, 또는 그에 준하는 비상사태가 아니면 의장이 직권상정 못하게 돼있다"고 직권상정이 불가한 상황임을 거듭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봉사단은 물러서지 않고 “지금 경제위기니까 국가비상사태가 맞다”고 주장했습니다. 정 의장은 "여러분, 크리스마스 연휴 때 공항이 북적대는 거 봤죠?"라며 또다시 조목조목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우리나라 신용등급이 세계 7등에 들어간 것도 봤죠? 이걸 경제위기라 볼 수 있습니까, 위기가 올 가능성은 있지만 가능성을 위기라고 할 수는 없다"며 "대통령 다음인 국회의장이 대외적으로 국가 비상사태라고 하면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투자를 하겠습니까, 그러면 일자리가 생기겠습니까, 경제가 더 어려워지지 않겠습니까"라고 강조했습니다.
이번엔 한 회원이 “의장님도 새누리당 의원이시잖아요”라고 외쳤습니다. 정 의장은 직권상정을 주장하는 새누리당 소속으로 국회의원, 국회의장에 당선됐으니 새누리당에 손을 들어줘야 한다는 것이지요. 정 의장이 “여기 오신 분들 새누리당 당원들이세요?”고 반문하자 당황한 봉사단은 "우리는 당원 아니에요. 아니에요"라며 일제히 손사래를 쳤습니다. 국회법에 의하면 대한민국 국회의장은 당적이 없습니다.
그러자 또 다른 회원이 "자기들 밥그릇만 챙긴다"고 불만을 표시했습니다. 정 의장이 정부여당이 요구하는 쟁점법안 직권상정은 거부하면서 국회의원 선거구를 조정하는 선거구 획정안에 대해서는 직권상정 방침을 밝힌 것을 두고 '국회의 밥그릇 챙기기'라고 비판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정 의장은 단호한 표정으로 "'국가의 밥그릇'이라면 맞지만 의원 개개인의 밥그릇 챙기기는 아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대한민국은 의회민주주의 국가로 국회가 꼭 있어야 한다"며 "그러려면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국회를 구성해야 하는데 선거구 획정이 안돼 선거를 못하게 되면 그야말로 비상사태가 아니겠냐"고 덧붙였습니다.
특히 정 의장은 “저는 포은 정몽주 선생의 20대손으로,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는 사람"이라고까지 밝히며 소신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거듭 강조했습니다.
정 의장이 말이 끝나자 봉사단은 "이렇게 의장님께 직접 말씀을 들으니 오늘 성과를 거둔셈"이라며 “마지막으로 악수를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단단히 여민 장갑을 하나하나 벗고 회원 전원과 악수를 하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강추위 속 시민과의 깜짝 문답을 마친 정 의장은 다시 출근길을 재촉했습니다.
정 의장은 그 동안 쟁점 법안에 대한 여야 협상을 적극 중재해왔습니다. 그러나 새누리당은 ‘연내 일괄처리 아니면 직권상정’을, 더불어민주당은 ‘독소조항 수정 후 처리’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양측은 여전히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외부적으로는 청와대의 이례적인 직권상정 압박도 있었습니다. 여기에 일부 시민의 직접적인 요구까지 맞닥뜨리면서 정 의장의 주름은 갈수록 깊어지고 있습니다.
송은미기자 mys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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