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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文ㆍ安의 호랑이

입력
2015.12.14 20:00

조선왕조실록에는 호랑이가 한양 도성 안팎에 출몰했다는 기록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선조 때 창덕궁 안에서 호랑이가 새끼들을 낳아 길렀다는 내용이 있고, 영조 시절 도성 안에서 호랑이가 마구 돌아다닌 일도 기록돼 있다. 요즘 서울에 멧돼지가 출몰하는 것만큼이나 흔했던 것 같다. 그렇게 흔하던 조선 호랑이는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종적을 감췄다. 서식지 파괴와 함께 일제의 해수(害獸)박멸 정책 탓이 컸다. 1922년 10월 경주 대덕산에서 한 마리가 잡힌 뒤 남한지역에서 호랑이는 옛날 얘기 속으로 사라졌다.

▦ 그렇게 사라진 호랑이가 연말 여기저기서 되살아 났다. 16일 개봉하는 영화 ‘대호’는 일제 강점기 조선의 최고 명포수 천만덕(최민식 분)과 조선 마지막 호랑이의 대결과 교감을 그렸다. 최민식의 혼 실린 연기와 컴퓨터그래픽이 생명을 불어넣은 ‘지리산 산군’의 생생한 비주얼이 벌써부터 화제다. 야당 정가에서도 호랑이 얘기로 시끌시끌하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며 새정치민주연합 공동창당에 나섰던 안철수 의원이 13일 호랑이 포획 실패를 자인하며 호랑이굴 철수를 공식 선언하면서다.

▦ 문재인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정말 정치가 싫어지는 날이다. 진이 다 빠질 정도로 지친다”면서 주저앉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토로했다. 그러나 이내“호랑이 등에서 내릴 수 없다”며 마음을 다잡았다. “아무리 파도가 높고 바람이 강하게 불어도 총선승리에 이르는 새정치민주연합의 항해는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자신을 호랑이 등에 탄 처지에 빗댄 심리가 선뜻 와 닿지 않는다. 달리는 호랑이 등에서 내릴 수 없다는 건 잡혀 먹힐까 하는 두려움이 있다는 뜻이다.

▦ 원래 본인 의지를 거슬러 정치판에 발을 담그게 된 것을 후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풍랑 거친 바다로 배를 몰아갈 용기라면 달리는 호랑이 등에서 내려설 결단은 왜 못했을까. 그렇게 내려서고 대신 안철수 의원을 그 자리에 태울 수도 있지 않았을까? 물론 안 의원은 호랑이 굴에 들어가서 호랑이를 잡았던 YS(김영삼 전 대통령)만큼 노련한 사냥꾼은 못 된다. 그러나 힘을 모아 함께 호랑이 잡는 꿈을 꾸었더라면 지금처럼 두 사람이 삭막한 광야로 내몰리는 상황은 피했을 것이다.

이계성 수석논설위원 wk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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