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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전, 사람으로 세상읽기] 시인 백석

입력
2015.12.13 10:00

백석(1912~1996)은 ‘식민지 조선’의 탁월한 시인이었다. 평안북도 정주 출신인 그는 꾸밈없는 고향사투리로 시를 썼다. 한국인의 평범한 일상생활을 생생하면서도 아름답게 기록한 점에서 그는 한 사람의 역사가요, 일제가 강요하는 억압의 근대에서 벗어나 ‘자율의 근대’를 꿈꾼 민족지식인이었다.

그는 신구(新舊) 지식을 섭렵한 천재였다. 19살에 이미 ‘그 모(母)와 아들’이란 단편소설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될 만큼 글재주가 뛰어났다. 어려서 배운 한문을 비롯해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및 일본말에도 능통한 백석이었다. 고향 부자 방응모가 준 장학금으로 그는 도쿄 아오야마(靑山)학원 전문부 사범과(영어)에 입학하였다. 최우등으로 학업을 마친 백석은 귀국길에 올라 교사 또는 기자로 생계를 꾸리며 적잖은 시를 썼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근대의 다양한 문예사조와 사상을 널리 접하였지만 그는 자신의 시어에서 현학을 철저히 배제했다. 살아 숨 쉬는 고향의 입말이 아니고서는 한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되살릴 방법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사슴’으로 ‘식민지 근대화’에 반격

본명이 백기행(白夔行)인 그는 ‘독립시인’이었다. 1930년대에는 각종 문인 단체가 있었으나 어디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는 옛말대로 온갖 흐름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자신만의 독립적 세계를 유지했다. 여기에는 오산학교 시절의 은사 고당 조만식 선생의 가르침이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같은 학교의 선배 시인 김소월 역시 그의 지향점이었다.

그래도 백석은 소월보다 한층 적극적이요, 어느 면에서는 투쟁적이었다. 백석의 시 ‘정주성’(1935년)은 ‘홍경래의 난’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시어를 통해, 오래 전에 좌절되고만 민중의 꿈은 눈부시게 부활한다. “날이 밝으면 또 매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푸른 배)를 팔러 올 것이다”라고 했듯 전통은 반드시 이어질 운명이다.

백석은 33편의 시를 묶어 시집 ‘사슴’을 세상에 선보였다(1936년). ‘고방’, ‘가즈랑집’, ‘여우난곬족’ 등 수록작품의 목차만 쓱 훑어보아도 고유문화에 대한 그의 애착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만 하다. 33이란 숫자도 의미심장하였다. 3ㆍ1 독립선언 때 민족대표의 숫자를 떠올리고, ‘33천(天)’이란 불교적 세계관을 보여주면서, 한국 민중이 길하게 여기는 완전수 9로 노름판에서도 제일 끝수가 높은 ‘가보’다.

더 중요한 사실도 있다. ‘사슴’은 도시문명으로 상징되는 ‘식민지 근대화’에 대한 반격이라는 점이다. 시인은 일제가 근대화를 운위하며 숨통마저 끊어버리려 했던 한국의 가치와 전통을 되새기고 그 부활을 꾀하였다. 그리하여 소설가 이효석은 “잃었던 고향을 다시 찾았다”고 찬탄했고, 시인 박용철은 “모국어의 위대한 힘”을 재삼 느끼게 되었다고 호평하였다.

물론 그때도 견해 차이는 있었다. 시인 오장환은 백석의 시가 삶의 진실을 드러내지 못한다고 비판하였다. 또 임화는 백석의 “야릇한 방언”을 지방주의라고 낙인 찍었다. 임화 등도 탁월한 문인이었지만 백석의 시를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하였다.

전통의 미덕과 자율의 근대 함께 소망

여러 정황으로 보아 백석은 1930년대 한국인이 당면한 문화적 위기를 누구보다 심각하게 고뇌했고, 그래서 끝없이 방황하였다. 그 때는 민족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머지않아 한글조차 노골적인 탄압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징병과 징용의 피비린내가 휩쓸 판이었다. 한국은 위기의 심연으로 침몰하는 한 척의 배였다. 그때 백석은 고향의 순수한 토속 말을 가지고 그 뱃전에서 초혼가를 외쳤다고 봐야 한다. 역사의식 또는 각성된 문화적 자의식, 이것이 그 시인의 생명이요, 특장이었다.

‘목구(木具)’라는 시 몇 줄을 읽어보자.

“내 손자의 손자와 나와 나의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와(…) 수원백씨(水原白氏) 정주백촌(定州白村)의 힘세고 꿋꿋하나 어질고 정 많은 호랑이 같은 곰 같은 소 같은 피의 비 같은 밤 같은 달 같은 슬픔을 담는 것 아 슬픔을 담는 것(…)”

시인은 ‘슬픔을 담는 것’이 목구, 즉 나무로 된 목기라고 했다. 아름답고 유구한 그 전통이 끝없는 슬픔에 싸여있었기에 시인의 비애가 절절했다. 그런데 그가 노래하는 그 전통은 일제의 압박으로 박살 날 만큼 허약한 것이었던가? “힘세고 꿋꿋하고 어질고 정 많고 곰 같고 소 같고 피의 비 같고 밤 같고 달 같”은 그 전통이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는 것인가.

백석이 노래하는 비운의 당사자는 얼핏 그 자신을 포함한 ‘수원 백씨’ ‘정주 백촌’ 사람들로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파고들면 이야기는 확 달라진다. “내 손자의 손자와 나와 또 나의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와”라고 했으니, 사실은 한국 사람 모두가 운명의 당사자다. 과거, 현재, 미래를 초월해서 그런 것이다. 그럴진대 백석은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서 민족의 위대한 전통을 또렷이 기억하고, 부활의 주술을 걸었다고 평가해야 한다.

적극적으로 말해, ‘목구(木具)’는 총독부가 추구하는 ‘경성’(=서울)의 근대화를 부정한 것이다. 다른 시에서도 보이듯, 백석은 식민지의 근대를 제국주의의 가면, 전통의 파괴로 간주했다. 그는 고유 전통의 미덕을 바탕으로 자유와 평등의 날개를 단 자율적 근대를 소망한 시인이었다.

식민지에서도, 북에서도 비운의 삶

시대는 백석을 일탈과 방랑의 길로 내몰았다. 민족차별의 문제 역시 그 가운데 하나였다. 피지배층인 한국인으로서, 그는 일본군국주의자들이 강요하는 구조적 차별에 분노했다. ‘팔원’에서 일본인 순사 집에서 식모살이하는 한국인 소녀의 얼어터진 손등에 눈물을 흘린 이유다. 식민지 사회 내부의 계급적 갈등도 그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여승’은 옥수수를 팔며 생계를 잇던 시골여성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절간으로 피신한 사실을 폭로하였다. 절간으로의 도피는 결국 미봉책이란 점에 시인은 고뇌했다.

한 번도 그는 드러내놓고 민족주의자 또는 사회주의자를 자처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민족과 계급 문제에 대한 백석의 관심은 뿌리가 깊었다.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그였기에 함부로 ‘카프’ 계열의 사람들과 뒤섞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역시 정의와 평등의 사회개혁을 염원하였다.

‘백석은 순수 민족시인이다’ ‘이념과는 거리가 먼 방랑의 시인 또는 자유의 시인이다’ ‘해방 뒤 백석이 비록 북한에 눌러앉았다 해도, 그것은 이념 때문이 아니었다’ ‘북한에서 그는 아동문학에 전념했으나, 결국 문단에서 축출되었다’. 이런 식의 평가가 한동안 대세를 이루었다. 그러나 백석이 과연 북한의 정치적 이념과는 아무 상관도 없었는지 의아하게 여기는 학자들도 있다.

백석의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해방 당시 백석은 만주에 있었다. 그가 만약 사회주의 체제를 반대하였다면, 남쪽으로 내려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어에 능통했던 백석이었다. 그는 사회주의에 일말의 기대를 걸었던지, 평양으로 내려가 은사 조만식 선생의 통역비서를 맡았다. 은사가 숙청된 뒤에는 문학 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러다가 1959년 백석은 함경남도 삼수의 국영협동농장으로 옮겼다. 농장생활에서 그는 공동체문화의 단초를 발견하고 북한체제를 찬양하기도 했다.

6ㆍ25전쟁이 있자 남쪽에서는 백석의 아름다운 서정시도 금서가 되었다. 냉전적 사고의 결실이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 말 백석의 시들은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그 화려한 귀환에 다들 열광했다. 언어의 주술사 백석은 시로써 우리 전통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또,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고 불의와 불평등이 사라진 새 세상을 꿈꾸었다. 안타깝게도 그 꿈은 식민지에서도, 북한에서도 파탄으로 끝났다. 그럼 여기서는 과연 가망이 있는 것일까.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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