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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1988에 우리가 두고 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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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격에 겨운 목소리가 학교 옆 길가를 내달렸다. 한 당선인은 차량에 달린 스피커로 야당의 승리를 알리며 연신 감사하다고 외쳤다. 불과 5개월 전 대립과 분열로 눈앞까지 왔던 대권을 군인 출신 후보에게 헌납했던 비극은 잊은 듯한 목소리였다.
그럴 만도 했다. 그 해 4월 실시된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야권은 대약진했다. 전체 299석 중 여당인 민주정의당은 125석만을 차지했다. 여소야대 국회의 첫 탄생이었다. 사람들은 민주주의의 힘을 곧 실감했다. 국회는 대통령이 지명한 대법원장의 임명동의안을 부결하며 힘을 과시했다. 입법기관이 국가원수이자 행정수반인 대통령을 견제한다는, 사회 교과서의 글귀가 현실에서도 의미를 지니게 된다는 걸 깨닫게 한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 해 가을은 환희의 계절이었다. 한 소년이 잔디 위에 굴렁쇠를 굴리며 시작한 세계 스포츠 축제는 한반도 남부를 보름 동안 들뜨게 했다. 대한민국은 안방이라는 이점을 활용해 금메달 순위 4위에 올랐다. 세계 4대 강대국에 둘러싸여 매번 얻어터지고 눈치 보기 바쁜 약소국인줄 알았는데 세계 4강이라니. 마치 지구촌을 호령하는 강대국 국민인 된 듯한 기분이었다.
tvN 금토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보다가 짧은 생각들이 맥락 없이 이어졌다. ‘추억팔이’ 상품이라는 비아냥이 있기는 하나 사람들은 이 복고풍 드라마를 보며 과거로 빠져든다. ‘그 땐 그랬지…’라는 회고가 곧 ‘그 때가 좋았지’라는 감상으로 이어지는 분위기다. 사람의 뇌리엔 좋았던 기억들만 남는다고 하나 과연 정말 그 때가 지금보다 행복한 시절이었을까.
그 해가 마냥 흥겹고 자유롭고 거리에 정이 넘쳐나던 감격시대는 아니었다. 어두운 골목길에 세워진 승합차만 봐도 부녀자들은 소스라쳤고, 떼강도와 인신매매라는 살벌한 단어가 신문을 채웠다. ‘보통사람’의 시대를 자처한 정권이 들어섰다고 하나 여전히 권위주의적 체제가 시민의 삶을 압박했다. 대통령의 친구가 다음 대통령을 하기로 했고, 그 대통령의 인척이 그 다음 대권을 이어 받기로 서로 약조했다(셋은 육사 동기동창이다)는 농담 같은 소문에 대한 우려는 사라졌으나 여전히 군인들이 사회 곳곳에서 위력을 발휘하던 시절이었다. 어느 언론인은 군대 문화 척결을 주창하는 칼럼을 썼다가 출근 길에 테러를 당했다.
그래도 호시절은 분명했다. 곳곳에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까지는 아니어도 풍요의 서막이 열린다는 믿음이 가득했다. 대학을 나오면 취업걱정을 그리 하지 않던 때였고, 대학 문턱까지 못 가더라도 호구지책을 구하기 어렵지 않았다. 집마다 차 한대씩을 갖게 되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그 때 즈음 이런 말씀을 자주 하시곤 했는데 요즘 젊은 세대라면 공감하지 못할 듯하다. “이제 밥 굶는 시대는 지났다. 게으르지만 않으면 뭐든 하며 먹고 살 수 있는 시대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앞날을 긍정했고 사회는 전진하고 있었다. 아직 성에 차지 않으나 조금만 더 힘쓰면 민주화가 진전되리라는 낙관이 있었다. 정치뿐 아니었다. ‘응팔’의 여러 부모들이 그러하듯 넉넉하지 않은 형편 속에서도 아이들을 공부시켜 좋은 대학을 보내면 자식들이 더 나은 삶을 살리라는 기대가 온존했다. 어렵게 서울대에 보낸 딸이 운동권 활동을 하자 감금을 불사하는 고지식한 아버지일지라도 전투경찰에 쫓기는 대학생을 도와주고선 만원 지폐 한 장을 쥐어주던 시절이었다. 그 때도 계층간 갈등이 있었고 세대가 불화했으나 인심이 사회 바닥에 흘렀다. 조금만 인내하고 조금만 더 노력하고 조금만 더 희생하면 보다 나은 생활이 펼쳐지리라는, 삶에 대한 긍정이 팽배했던 시절이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1988년에 놓고 온 것이 무엇인지 갑작스레, 그리고 서늘하게 떠오른다. 우리는 그것을 두고 왔기에 27년 전 ‘화려했던 시절’을 회상하며 감회에 젖고 그 시절을 추억하는지 모른다. 우리가 그 시절 두고 온 것은 슬프게도 희망 아니었을까.
라제기 엔터테인먼트팀장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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