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

단독

[강남순 칼럼] ‘아이유 논란’과 성찰적 소통

입력
2015.11.17 10:00

최근 가수 ‘아이유’가 출시한 앨범에 수록된 ‘제제’라는 노래와 영상과 관련된 논란이 SNS를 뜨겁게 달구었다. 제제가 나오는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를 출판한 출판사 페이스북 페이지에 아이유의 ‘제제’ 해석과 표현에 대한 문제 제기가 등장했다. 아이유는 제제를 “성적 대상화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고 소설에서 “모티브만을 차용한 제3의 인물”이지만, 그를 “섹시하다고 느꼈다”고 말한 것이 “불찰”이라는 사과문을 내었다. 뒤이어 출판사도 해석의 다양성을 존중하지 못했다는 사과문을 발표했다. 당사자들의 사과문들로 인해 이 사건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일단락되었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이 논란의 직접적인 당사자들 밖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진보논객으로 알려진 한 지식인은 트위터에서 출판사를 “저자도 아니고 책 팔아먹는 책 장사들”이라고 규정하면서, 해석에 대하여는 “입 닥치는” 것이 예의라는 비난을 했다. 그의 원색적 비난은 종종 출판사에 대한 비방의 ‘권위적 텍스트’로 인용되곤 했다. 한편, 아이유에 반대하는 이들 역시 아이유에게 유사한 방식의 비난을 하면서 ‘음원 폐기 운동’을 벌였다. 결국, 아이유 논란은 비판이 아닌 비난에 근거한 편들기 양상을 띠게 되었다.

표현과 해석의 자유는 참으로 중요한 민주적 가치이다. 그런데 자유란 언제나 그에 따른 책임성이 동반된다. 특히 표현과 해석의 주체자가 공인(公人)의 위치를 지니고 있을 때, 그 표현과 해석 방식이 지닌 사회정치적 의미는 다층적인 비판적 논의를 통해 조명되어야 한다. 표현과 해석의 자유란 그것이 지닌 한계나 문제점들에 대한 비판적 문제 제기들을 통해서 그 의미가 다각도로 성찰되어야 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공적 공간에서의 표현과 해석 행위란 중립적이 아닌 ‘정치적 행위’이다. ‘누가’ 했는가에 따라서 공적으로 전달되는 메시지의 무게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서, “혼이 비정상”이라는 표현을 한 개인이 한 것과 대통령이 한 것의 그 사회정치적 의미는 매우 다르다. 원칙적으로 표현과 해석의 자유는 모두에게서 존중되어야 한다. 동시에 한 공인의 표현과 해석이 지닌 다층적 의미를 조명하는 것은, 자유의 존중만큼 중요하다. 아이유 논란을 단순히 표현과 해석의 자유의 문제로만 보는 것의 한계가 바로 이 지점이다.

표현과 해석의 자유를 존중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지니고 있는 공적 의미를 복합적으로 조명하는 비판적 문제 제기의 자유는, 표현과 해석의 자유와 함께 동반되어야 하는 ‘쌍둥이 가치’이다. 특히 특정한 배경을 가진 ‘이름’을 호명하는 경우, 그 호명 행위를 통한 표현과 해석은 호명하는 이의 의도와 상관없이 중요한 사회정치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세월호’의 예를 들어보자. 한국적 맥락에서 세월호는 이제 단순히 선박 이름 중의 하나가 아니다. 무고한 참사의 비극과 애도를 의미하는 상징적 이름이다. 한 공인이 자신의 작품들에서 ‘세월호’를 호명하고자 한다면, 그 이름이 지닌 특정한 역사적 정황과 그 내포된 상징적 의미를 고려하면서 호명해야 한다. 물론 누구든 ‘세월호’를 특정한 정황과 무관한 제3의 의미로 표현하고 해석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 세월호는 여전히 지속되는 국가적 무관심과 기업의 이기성이 빚어낸 참사를 의미하는 상징이며, 고통과 상실을 의미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세월호를 제3의 이름으로 호명하는 자유를 존중한다면, 동시에 그러한 탈정황적인 호명 방식에 대한 비판적 문제 제기의 자유도 존중해야 한다.

‘제제’도 마찬가지이다. ‘제제’를 원작과 다른 제3의 인물로 차용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 호명 행위가 지닌 복합적인 의미를 고려해야 하는 것도 자유와 동반된 책임이다. 어떤 이들에게 제제는 가족, 사회, 국가로부터 전혀 보호하지 못한 학대와 방치의 절망적 상황의 피해자로서, 저자가 헌사에서 표현하였듯이 “지독한 슬픔과 그리움에도 죽지 않고 살아” 남은 한 인간을 상징하는 특정한 이름이다. 표현과 해석의 자유는 그에 대한 다층적인 문제 제기들과의 성찰적 소통을 통해서 그 진정한 의미가 살아있게 된다.

‘비판적 문제 제기’와 ‘원색적 비난’의 경계는 매우 미묘하다. 비판적 문제 제기는 한 문제를 다층적인 시각으로 보게 하면서, 그것이 지닌 복합적인 층들을 세밀하게 드러내게 한다. 이러한 성찰적 소통에서 중요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다른 관점의 문제 제기를 경청하는 끈기 있는 인내력이며, 또 다른 하나는 상이한 입장에 대한 존중적 태도를 지키는 것이다. 원색적 비난은 이러한 비판적 성찰과 소통의 가능성들을 근원적으로 차단해 버리고 단순한 흑백 논의로 문제를 귀속시켜 버린다. 결국 원색적 비난은 ‘성찰적 소통의 문화’가 아닌, ‘편가르기 문화’를 조장할 뿐이다. 성찰적 소통은 하나의 문제가 매우 다층적인 복합적 이슈들과 연계된 것임을 인식하게 함으로써, 성숙한 민주시민성이 사회 안에 자리잡도록 하는 촉매제이기에 중요하다.

성숙한 사회는 편가르기로 나타나는 ‘양자택일적 소통방식’이 아니라, 서로가 지닌 인식의 한계들을 넘어서고자 하는 비판적 문제 제기들을 인내심을 가지고 서로 주고 받으며 함께 나아가는 ‘나선형적 소통 방식’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야만과 지성, 천박함과 숭고함, 원색적 비난과 비판적 문제 제기 사이에는 아주 정교한 선이 있을 뿐이다.

표현과 해석의 다양성에 대한 존중, 그리고 그 다양성 속에서 사회적 연대와 책임의 가치를 모색하는 비판적 문제 제기들에 귀를 기울이면서 야만과 지성의 그 정교한 경계를 구분해 내야 한다. 표현과 해석의 자유의 존중, 다양한 입장의 상호 경청, 그리고 그에 대한 비판적 문제 제기들을 서로 주고 받으면서, 다양한 사회적 약자들과의 연대를 확장해 가는 것은 성숙한 시민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한 우리 모두의 지속적인 과제이다.

강남순 미국 텍사스크리스천대 브라이트신학대학원 교수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