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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진칼럼] 지금도 늦지 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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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교과서 만들기 유보할 수 없나
내부 동력 약하고 국민 다수가 반대
정치적 이해도 失보다는 得이 많아
여전히 기대를 접지 않는다. 박근혜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한다. “대한민국의 장래를 위해 올바른 교과서, 정확한 역사관이 필요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정부 시책에 국민 다수가 반대하고 있습니다. 국론이 심각하게 분열되고 국력이 현저하게 낭비되고 있습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는 새로운 사회적 합의가 이뤄질 때까지 유보합니다.” 기대를 접지 못하는 이유는 많다.
우선 정부와 여당 내에서도 충분한 합의가 이뤄진 것 같지 않다. 애초 청와대는 짐짓 뒷짐지는 모습을 보였다. “교육부가 알아서 할 일이어서, 언급할 내용이 없다”는 식이었다. 이후 청와대 내부 분위기가 일부 알려지더니 지난 달 27일 대통령이 시정연설에서 ‘추상 같은 지침’을 선포했다. 대통령의 잰 걸음을 따르지 못하던 교육부는 여기저기서 혼쭐나는 모습이 역력했고, 국무총리가 서둘러 고시를 발표했다. 새누리당 내에서도 ‘현행 역사교과서에 문제점이 있지만 국정화는 아니다’는 분위기가 적지 않다. 물론 내놓고 말하는 이는 극히 소수다.
역사교과서를 국가가, 특정 정권이 일률적으로 제작하는 일이 옳지 않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정부여당도 이를 모르지 않는다. 논란이 본격화하자 ‘국정교과서’ 대신 ‘올바른 교과서’라고 표현하며 애써 초점을 피해가는 것만 봐도 그렇다. ‘올바른 교과서가 필요한데 뾰족한 방법이 없으니 국가가 만들 수밖에 없다’는 군색한 논리를 제시하고 있다. ‘위에서 지침이 내려왔는데 어떻게 거부할 수 있느냐’는 소극적 주장도 적지 않다. 시책을 추진할 동력이 떨어지고 있다.
또 다른 이유는 학자와 교사의 절대다수가, 일반 국민의 과반수가 반대하고 있다는 대목이다. 정부가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국정교과서를 완성하겠다며 정한 기간이 1년이다. 정부는 내년 말까지 학자와 교사, 일반 국민의 생각을 그스르면서 시책을 강행해야 한다. 코뚜레를 꿰어 소를 잠시 끌고 갈 수는 있다. 하지만 오래도록 팽팽한 고삐로 끌고 가기는 불가능하다. 끄는 쪽이나 끌려가는 쪽이나 모두 상처만 커진다. 반대 여론은 앞으로 더욱 높아질 듯하고, 긴장감은 커질 것이다. 국론 분열과 국력 쇠진이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절차와 과정이 생략되고, 위로부터의 일방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현재 역사교과서의 문제점들을 공론화하면서 올바른 교과서를 만들기 위한 논의를 이어갔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올바른 교과서를 만들겠다는데 참여할 학자가 부족하고, 그나마 죄라도 짓는 양 익명으로 집필하겠다고 한다. 이런 현실에서 내년 말쯤 한 권의 교과서가 나온다 해도 가르치는 교사나 배우는 학생이 올바르다고 여길 교재는 아닐 것이다.
정치적 측면도 생각해 본다. 최근의 논란은 ‘국정화=대통령’이라는 인식과 상관관계를 갖게 됐다. 국정화를 밀어붙이는 일이 대통령의 지지를 끌어올리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며, 거꾸로 유보하거나 백지화 한다면 대통령이 힘을 잃고 바로 레임덕에 들어선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내년 총선과 내후년 대선을 앞두고 대통령의 정치적 동력이 현저히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에서 나온 판단들이다.
대통령이 국정화를 유보나 포기한다면 명분은 ‘국민 다수가 반대하기 때문’일 텐데, 그것이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깎아 내리는 요인이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동안 심어져 있던 부정적 이미지를 불식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겠다. 중간층으로 불리는 국민들은 오히려 대통령의 판단과 결단을 높이 사게 될 것이다. 정치적으로 실(失)보다 득(得)이 많다.
기대를 접지 못하는 이유는 많다. 정부여당 내의 솔직한 분위기를 설명하고, 여론의 실체를 정확하게 전달해야 한다. 국정교과서 집필진에서 사퇴한 최몽룡 서울대명예교수가 남긴 말이 기억에 뚜렷하다. “나의 집필을 말렸던 그 친구들 생각이 옳았다. 큰 왕조가 오래 지속될 때는 충신이 많았다. 그들의 말을 좀더 잘 들을 걸…” 그가 유능한 역사학자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인다.
정병진 논설고문 bjj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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