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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국정화의 종착점

입력
2015.11.01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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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7일은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일제강점 말기 일본국의 신민을 양성한다는 의미로 소학교에서 바뀐 이 이름을 초등학교로 고친 건 1996년이다)의 마지막 가을 소풍날이었다. 어머니가 싸주신 김밥 도시락이며 삶은 계란 넣은 가방을 들고 기대에 부풀어 학교에 왔지만 어린 눈에도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운동장에 모여 가까운 산기슭 같은 곳으로라도 줄지어 가야 마땅한데 어찌된 일인지 모두 교실로 들어가란다. 교실에서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대통령이 서거하셨다.” 그때는 대통령이 술자리에서 자신의 측근 부하에게 총에 맞아 죽었다는 자세한 사정 같은 건 듣지도 못했고 사실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냥 나라에 큰 일이 났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잠시 머릿속을 맴돌았을 뿐, 소풍 안 가면 어때 교실에서 먹는다고 김밥 맛이 다를소냐는 기분이었다.

머리를 빡빡 깎고 진학한 중학교는 지방 사립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1학년 봄 하교 길에 대학생 형과 누나들이 무슨 함성을 외치며 도로에 몰려나온 것을 몇 번 봤다. 한국 사회는 격동의 현대사 한가운데 있었지만 아직 철 없는 중학생이었던 나는 그런 걸 잘 몰랐다. 신문을 보긴 했으나 정치 이야기는 너무 어려웠다. 데모 이야기가 나왔지만 대학교에 가면 다 이러는 건가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 기사마저도 언제부턴가 신문에서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그 시절 중학교에서 ‘국정’으로 역사를 배웠다. 국민학교 가을 소풍 전날 갑자기 돌아가신 대통령이 ‘유신’을 선포하고 얼마 뒤 정한 교과서 국정화 방침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었다. 국정과 검정이 다르다는 걸 안 건 한참 뒤였으니 사실 그때는 옛날엔 이렇게 살았고 지금은 이렇게 살고 있다는 낱낱이 어김없는 사실을 배우는 줄 믿었다. 그런 인식은 고등학교 가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역사에 대해, 특히 우리 근현대사에 눈이 동그래질 정도로 놀란 것은 대학에 간 뒤부터다. 거기에는 국정 교과서가 없었다. 대신 학생본부에는 동아리가 활발했고 각 학과마다 서너 개씩 ‘○○회’ 같은, 이른바 ‘의식화’ 모임이 수두룩했다. 국정 교과서에 충실한 공부만 해왔던 대학 새내기 중에서 그런 모임에서 읽으라고 권하는, 이를 테면 ‘해방 전후사의 인식’ 같은 책에 한 번쯤 눈 돌리지 않았을 사람이 있을까 싶다.

그 풋내기들이 다들 무슨 좌편향의 소양이라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중ㆍ고등학교에서 배우지 않았거나 배운 것과 다른 이야기들이 대학에 오니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탓이라도 할 셈으로 그런 책을 탐독한 이유를 찾는다면 그들의 왕성한 지식욕을 나무라든지, 대학에 오기 전부터 한 가지 역사만 가르친 것을 문제 삼아야 한다. 그리고 바로 1987년 6월이 왔다. 그 후 한국 사회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청와대와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강행이 종국에 어떤 결과를 낳을지 누가 물어본다면 이런 체험에 기대어 이렇게 도식화해서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한 가지 역사만 배운 청소년들은 늦더라도 결국 대학에 가면 ‘386’이 그랬던 것처럼 그 동안 배웠던 것이 역사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분노할 것이다. 때로 너무 기울어졌다 싶을 정도로 역사를 보려는 사람이 속출할지 모른다. 그런 일들이 모이고 모이면 언젠가 정권을, 사회를 바꿀 힘이 되지 말란 법 있겠나.

지난 날 군사독재정권은 그러지 못했지만 이런 역사의 반복을 막을 방법이 전혀 없는 건 물론 아니다. 검정교과서를 좌편향이라고 재단하는 기준으로 역사 관련 서적을 검열해 금서로 정하고, 좌파라고 지목하는 90%의 역사학자들을 학계에 발 붙이지 못하도록 하고, 국정화에 반대하는 97%의 역사교사들을 교단에서 내쫓는 것이다.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국정화는 결국 지난 역사의 전철을 밟고 말 것만 같다.

김범수 여론독자부장 bs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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