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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머] 'I KOREA YOU'라 쓰고 '헬조선'이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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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도시들은 각각의 브랜드와 이미지로 경쟁한다. 뉴욕은 ‘I love NY', 암스테르담은 “I'amsterdam'. 서울에도 새 브랜드가 생겼다. ’아이 서울 유(I SEOUL YOU)‘. 너와 나의 서울, 그러니까 서울이 너랑 나를 이어준다는 뜻이다. 앞으로 외국인에게 나눠줄 관광안내책자마다, 그리고 관광명소마다 아마 ’아이서울유(I SEOUL YOU)‘의 메시지가 적히겠다.
서울의 새 브랜드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시민 참여형으로 만들었다는 데 의의를 두는 사람도 있고,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의견도 많다. 패러디도 이어지고 있다. ”너도나도 경기도에 살고 서울엔 못 사는 세태니, 우리 사이에 서울이 있다는 뜻이냐“, ”’너를 재개발하겠어‘의 다른 뜻이냐“. ’서울‘이 동사라면 어떤 뜻일지 생각해보게 하는 이야기들이다.
서울이 세계 도시로 외국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이든, 한국 사람에게 ‘서울’이란 동사는 반짝반짝 예쁜 이미지랑은 거리가 멀다. 내가 사는 서울에 대해 생각해 보면 ‘지하철 지옥’과 ‘경찰 차벽’, ‘재개발’, ‘임대료 인상’, 그리고 ‘쉴 틈 없는 시간’ 등이 떠오른다. ‘아이서울유’에 대한 패러디가 어쩌면 가장 정확한 서울이 얼굴일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 코리아 유(I Korea You)'는 어떤 의미가 될까. ’Korea‘를 동사로 쓴다면 80년대엔 ’널 잘 살게 해줄게‘가 아니었을까 싶다. 시대가 변하고 'Korea'의 상징도 변한 것 같다. 지금의 'I Korea You'는 ’네가 다 타버릴 때까지 널 연료로 쓸 거야“라고 해석되지 않을까. 지금 내게 ‘Korea’는 악다구니 쓰고 서로 싸우며 만들어내는 열기로, 누군가를 착취한 열기로 달리는 열차 같다.
‘아이 코리아 유(I Korea You)'를 이미 표현한 상징어도 있다. ’헬조선‘. 지옥 같은 한국이란 뜻이다. 우리는 이미 이런 상징이 반복해서 유행하고 있는 것을 안다. 가라앉는 배와 지옥 같은 후진(後進)국가. 부모의 계급이 자식의 생존을 결정하는 ’금수저’와 ‘흙수저론’. 이런 비유의 홍수 속에서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려고 줄을 선다. 북적대는 취업 박람회 부스에서 줄을 서고, 북적대는 이민 유학 박람회에 가서 줄을 선다. 미디어는 ’탈조선‘을 꿈꾸는 청년세대에 관해 이야기하지만 사실 청년세대만의 절망일 리는 없을 것이다. ‘아이 코리아 유(I Korea You)'는 어느새 많은 이들에게 절망적인 문장이 되었다.
이민을 꿈꾼다는 청년들에게 훈계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민 가도 똑같이 힘들다.’ ‘거기 가면 건강보험료가 더 높네 마네’ 이런 이야기들. 더 나은 복지, 더 나은 경제 조건을 향하는 것에 대해서 비난들을 하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마음의 문제. 이 국가가 나에게 지옥일 수 있겠다는 마음. 절망감과 무력감. 이 국가 나에게 반복해서 주는 메시지가 그런 마음을 만들어낸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재보궐 선거 지원 유세 중 “청년들이 뭐만 잘못되면 국가 탓을 한다”며 “이것은 학교 교육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 ‘국가’는 청년의 불만에 귀 기울일 생각이 없다는 메시지가 정치인들에게서 반복해서 나온다. ‘헬조선’의 상징은 자꾸 반복된다.
왜 지옥인가. 누군가에게 모욕을 주고 다른 사람에게 모욕을 주는 것으로 그 화를 푸는 사회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갑과 을의 구조. 그리고 이 구조가 확장되면서 누구나 갑이 될 수만 있으면 어디서든 갑이 되려고 한다. 섬뜩할 때가 있다. 국가는 “이 곳이 내 마음에서 ‘지옥’이란 메시지”를 들어주지 않고, 분노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길 위의 수많은 생명을 서로 찌른다. 길에서 죽는 작은 동물들. 무릎 꿇는 백화점 직원. 전세금이 올라 8년 공들인 가게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는 길거리의 현수막. 매일 마주친 아파트 경비 직원과 학교 청소노동자에 대한 하대. 그리고 고공에서 농성하는 수많은 사람.
김무성 대표는 “왜 대한민국의 젊은 청년들은 우리나라를 못난 나라라고 자학하게 됐는가”라고 자문했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일이다. 자기가 사는 이곳에서 잘못된 것들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을 과연 ‘자학’으로 표현해도 되는가. 내가 사는 이곳에서 ‘I KOREA YOU’가 어떤 의미인지 말하는 것이 과연 자학인가. 이런 왜곡은 이제 지겹다. ‘I SEOUL YOU’에 대한 패러디가 오히려 서울을 더 잘 담고 있다. 한국의 얼굴도 나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살자는 말밖에 할 수 없는 것 같다.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조금씩 변화를 만들면서….
※ 이번 글을 끝으로 썸머의 어슬렁 청춘, 5개월간의 연재를 마칩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많은 분께 감사드립니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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