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우리는 너무 함부로 침범한다

입력
2015.10.29 10:53

아직 한 해가 다 가지는 않았지만, 내게 ‘올해의 책’은 김현경의 ‘사람, 장소, 환대’다. 저자는 현대 사회이론에 대한 어빙 고프먼의 주된 공헌이 사회구조에 종속되지 않고 그 자신의 고유한 논리를 따르는 독자적인 영역으로서의 상호작용 질서를 발견한 데 있다고 말한다.

고프먼에 따르면 이 질서는 개인들이 대면접촉 상황에서 수행하는 상호작용 의례(儀禮)를 통해 표현되고 유지된다. 인간의 존엄과 인권이 헌법적 가치로 선언되는 문명적 차원이 분명 존재함에도, 우리의 나날은 차별과 모욕, 굴욕에 점점 더 많이 노출되고 있다. ‘자존감’은 ‘정신승리법’이라는 자조적 역설을 통해서 확인되기 일쑤다.

한동안 한국소설은 무력하고 왜소한 주체의 자기 방어술을 다양한 정신승리법의 유머와 비애로 표현해야 했다. 너무 쉽게 말해지는 느낌은 있지만, 이른바 ‘신자유주의 시스템’이 여기에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을 테다. 자본에게는 무한한 자유와 힘이 주어지는 반면, 노동에게는 극도의 순응이 요구되는 구조 말이다. 우리는 이상하게 분열된다. 우리는 문자메시지 한 통으로 해고를 통고 받기도 하지만, 대형매장 노동자들이 서비스라는 이름으로 수행하는 굴욕적 노동에 무심하다. 우리는 쉽게 무릎 꿇지만, 또 아무나 무릎을 꿇린다.

김현경의 책에 기대면, 상호작용 의례를 통해 우리가 경의를 표하는 대상은 개인이 아니라 그의 인격이다. 그런데 이 인격은 안정된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의 흐름 속에서 그때그때 타인들의 협조에 힘입어 표현되고 확인되는 그 무엇이다. “상호작용에 참여하는 개인은 그러므로 다른 참가자들의 사람다움을 확인해주고, 사람이 되려는 그들의 노력을 지지해줄 도덕적 의무를 갖는다. 역으로, 그는 남들이 자신을 사람으로 대우해주기를 기대할 도덕적 권리를 갖는다.”

이렇게 인용하고 보니, 지금 우리 사회가 얼마나 이 의무와 권리를 기억하기 힘든 장소인지 실감이 난다. 문제는 구조와 상호작용 질서는 개념적으로 구별될 뿐, 현실에서는 결합되어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신자유주의든 퇴행적 민주주의든(다시 국정교과서라니) ‘신분제 사회’로의 회귀든(“한국 사회가 신분제로 회귀하고 있다는 증거는 많다”는 저자의 분석과 예견이 빗나간 것이기를 바란다) 전체적 안목에서 사회의 향방에 관심을 가지는 만큼, 오늘 만나는 관계에서 서로를 ‘사람’으로 확인하고, 사회적 성원으로 대접할 도덕적 의무와 권리를 끊임없이 환기하는 일은 더없이 중요하다.

연전에 노벨문학상을 받기도 한 앨리스 먼로의 단편 ‘자존심’은 인간 각자가 지켜나가고자 하는 자존감에는 발설되기 힘든, 타인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감동적으로 전한다. 소설의 화자는 ‘언청이’라는 이유로 2차 세계대전 징집에서 면제된다. 그것은 그에게 부끄러운 일이었던 듯하다. 그는 겨우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어머니에게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그에게도 결혼하고 싶은 여성은 있었다. 어느 날 그 여대생은 요즘은 얼굴을 더 괜찮게 고칠 수 있다고 알려준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었겠는가? 병원으로 찾아가 지금껏 내게 없었던 것을 바란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소설의 마지막, 화자인 ‘나’는 친구인 오나이다와 함께 뒷마당의 오래된 물통을 찾아든 스컹크들을 구경한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여기서 번쩍 저기서 번쩍 춤을 추듯 움직이지만, 서로의 길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몇 마리나 있는지, 한 마리의 몸이 어디에서 시작해 어디에서 끝나는지도 절대 알 수 없다.” 영락한 부잣집 딸 오나이다와 화자의 모호한 관계가 자연의 우연한 질서와 마주 서 있는 장면인데, 작가는 결코 더 묻지 않는다. 그게 그이들의 ‘자존심’일 테니까 말이다. 우리는 너무 함부로 침범한다.

정홍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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