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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천고사설] 내몽골 포두에서

입력
2015.10.22 10:35

내몽골 성도(省都) 호화호특(呼和浩特ㆍ후허하오터)과 포두(包頭ㆍ바오터우)에는 중국 4대미녀라는 왕소군(王昭君) 유적이 있다. 서기전 1세기경 한(漢)나라 원제(元帝ㆍ서기전 74~서기전 33)의 후궁이었던 왕소군은 북방의 강국 흉노(匈奴) 황제에게 보내졌던 비운의 여인이었다. 한나라 황제들은 후궁들의 초상화를 보고 시중 들 여인을 간택했는데, ‘서경잡기(西京雜記)’에는 여러 후궁들이 화공(畵工)에게 뇌물을 주며 예쁘게 그려달라고 간청했다고 전한다. 그 금액이 많을 때는 10만, 적을 때도 5만 이하로는 떨어지지 않았다고 하니 간택 경쟁이 치열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부하는 성격이 아니었던 왕소군이 뇌물을 바치지 않자 화공은 추녀로 그려 바쳤고, 흉노의 선우(單于ㆍ황제) 호한야(呼韓邪)의 요구에 따라 원제는 왕소군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정작 왕소군의 실물을 처음 본 원제는 속은 것을 알고 화공 모연수(毛延壽)의 목을 베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흉노로 간 왕소군은 수많은 이야기들을 남기며 주(周)나라의 서시(西施), 삼국시대의 초선(貂禪), 당나라 때의 양귀비(楊貴妃)와 함께 중국의 4대미녀로 꼽히게 되었다. 이후 중국인들은 왕소군이 흉노에 우수한 중원문화를 전해주었다면서, 가을이 되어도 다른 풀들과 달리 왕소군 무덤의 풀만 푸른 청총(靑塚ㆍ푸른 무덤)이었다고 주장했다. 소군출새(昭君出塞)라는 성어(成語)를 만든 왕소군은 흉노 선우와 아들 하나 딸 둘을 두었는데, 언제 내릴지도 모를 황제의 총애를 다투던 후궁 시절보다 너른 벌판에서 자유롭게 산 것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2천년도 더 지난 이 이야기는 현재 호화호특의 왕소군 박물관에 흉노황제 호한야와 함께 말 타고 다정하게 걷는 ‘화친(和親)’ 조각상으로 되살아나 현재 중국의 소수민족 융합정책의 한 상징으로 활용되고 있다. 매년 한나라의 막대한 조공을 받던 흉노가 지금은 그 흔적조차 사라진 채 거꾸로 한족들의 소수민족 정책에 활용되는 것을 볼 때 역사에서 단절된 국가나 민족이 처하는 냉엄한 현실을 생각하게 한다.

호화호특에서 서쪽으로 180여km 떨어진 포두에도 왕소군묘가 있는데, 이 머나먼 포두에 한국 독립운동 사적지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포두에서 음산산맥(陰山山脈)을 따라 서쪽으로 가다보면 파언진이시(巴彦津爾市) 오랍특전기(烏拉特前旗) 선봉진(先鋒鎭)이란 곳이 나온다. 선봉진에는 선봉향(先鋒鄕) 조가사(趙家社)라는 마을이 있는데, 마을 이름이 조가(趙家)인 것에 한국독립운동의 숨겨졌던 사연이 담겨 있다. 이곳은 평북 의주 출신의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조병준(趙秉準) 선생이 배달농장을 꾸렸던 곳이다. 망국 직후부터 독립운동에 나섰던 조병준은 1923년 자신과 제자들의 가솔 10여 가구 70여명의 한인(韓人)들과 함께 이곳으로 집단 이주했다. 일제의 만주침략을 예견하고 이주했다는 것이다. 이 지역을 관할하는 서공기(西公旗)로부터 60만여평의 황무지를 15년간 조차해서 배달농장을 설립했다. 또 의민부(義民府)를 꾸려서 총재에 취임하고 임시정부 직할로 만들어 자금 등을 지원했다. 이곳에 또 배달학교와 대종교의 수광시교당(綏光施敎堂)도 세웠는데, 의민부 군사부장이었던 황학수는 1934년, “한인 수백 명이 스스로 농사를 지으며 한 촌락을 이루었다”면서 황토로 세 분의 제단을 쌓아 춘추로 모여 제사를 지냈다고 전하고 있다. 세 분이란 ‘제1위는 단군 황조이며, 제2위는 고구려 시조 주몽이며, 제3위는 조선충신 임경업 장군’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지역은 한인들이 모여서 자치를 이루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는 의미만 있는 곳이 아니다. 의민부 총무부장 희산(希山) 김승학(金承學)은 서간도 지역의 무장항일부대였던 참의부의 총사령관격인 참의장도 역임했던 인물이다. 그는 해방되면 기쁜 ‘한국독립사’를 쓰기 위해 독립운동 관련 자료들을 모았다. 그는 1929년 만주에서 일제에 체포되어 7년여의 옥고를 치르는데, 그의 회고록인 ‘망명객행적록’ 등에는 체포 후 일제로부터 팔다리가 부러지는 수십 차례의 고문을 당했다고 전한다. 고문의 주요 목적이 독립운동 사료의 소재를 대라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올바른 민족사였음을 알 수 있다. 김승학은 숱한 악형(惡刑)을 견디며 끝내 사료의 행방에 대해서는 함구하는데 이 사료가 있던 곳이 이곳 배달농장이었다. 일제의 만주침략으로 배달농장이 해산되면서 이 사료들은 남경으로 피신한 백범 김구에게 전해졌다가 해방 후 김승학에게 다시 전달되었는데, 이 사료를 바탕으로 김승학은 여러 생존독립운동가들과 함께 1964년 ‘한국독립사’를 출간했다. 이 사료들이 이번에 증손자 김병기 박사가 공개한 ‘희산 김승학 사료’다. 이는 역사사료가 어떻게 생산되고 보존되며, 역사로 서술되는지 증언하고 있다. 역사가 어떻게 서술되고, 또한 어떻게 사라지는지 흉노와 김승학의 사례는 잘 말해주고 있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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