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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김준엽과 김정배

입력
2015.10.18 13:25

역사학자이자 교육자인 고 김준엽 선생은 기자의 은사다. 단아한 외모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강의를 하던 모습이 35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일제강점기 학병 탈출과 광복군 시절 일화를 들려주며 제자들에게 꿈을 잃지 말라고 당부하곤 했다. 선생은 늘 자신의 안위보다 제자들을 걱정했다. 고려대 총장 시절 전두환 정권에 맞서 시위하는 학생들에게 “부디 몸을 다치지 말라”고 독려했고, 구속된 학생들을 제적시키라는 압력에 “고대 학칙에는 총장에게 그런 권한이 없다”고 맞섰다.

▦ 기자가 된 후 몇 번 찾아 뵐 때마다 선생은“역사학도라는 걸 명심하라”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노태우 정권의 국무총리 제의에 “많은 학생이 감옥에 있는데 스승이라는 자가 어떻게 그 정부의 총리가 될 수 있느냐”고 뿌리친 일화는 널리 알려졌지만, 광복군 동지인 장준하 선생과의 약속은 아는 이가 많지 않다. 해방된 조국에서의 역할을 상의하다 “장준하 형은 정치를 하고, 난 교육계에 투신하겠다”고 한 약속을 어길 수 없었다고 했다. “지식인들이 벼슬이라면 굽실거리는 풍토를 고치기 위해 나 하나만이라도 그렇지 않다는 증명을 보여야 한다”고 학자의 길을 고수한 이유를 후에 자서전에서 회고한 바도 있다.

▦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의 총대를 맨 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도 기자의 은사다. 한반도 고대사 연구의 권위자인 그는 결이 조금 달랐다. 학생들 시위에 엄격해 운동권 제자들에게는 “부모를 모셔오라”며 나무랐다. 제자들 편에 서기보다는 권력의 눈치를 보는 행태로 그리 신망을 얻지 못했다. 고대 총장 재임 때 재단측이 연임을 결정하자 교수와 학생들이 퇴진 운동에 나선 것만 봐도 평판이 어땠는지를 알 수 있다.

▦ 고대 총학생회가 김 위원장에 대해 “민족 고대 이름에 먹칠하지 말라”는 비판 대자보를 붙였다. 그는 1974년 ‘창작과 비평’에 유신체제 국사 국정화에 맞서 비판하는 글을 썼다. 그러나 이젠 학자적 양심을 버리고 역사를 정권 입맛에 맞게 재단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김 위원장은 김준엽 선생 밑에서 역사를 배웠다. “현실에 살지 말고 역사에 살아라. 긴 역사를 볼 때 진리와 정의와 선은 반드시 승리한다”고 했던 스승이 살아있다면 제자를 뭐라 꾸짖을지 궁금하다. “넌 내 제자가 아니다”고 하지 않았을까.

이충재 논설위원 cj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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