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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열 칼럼] 국가를 멸망케 하는 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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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자극적인 이 글귀는 한말 민족주의 사학자 단재 신채호가 1909년 3월 16일자 ‘대한매일신보’에 기고한 논설의 제목이다. 지금 말로 한다면 ‘국가를 멸망케 하는 교육부’라는 뜻쯤이 될 것이다. 그 내용도 교과서 검정에 관련된 것이어서 오늘의 교육부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그 글의 첫 줄을 풀어 쓰면 다음과 같다. “근일에 소위 학부 교과서 검정의 방법이 각 신문에 떠들썩하여 각지에 전파되매 일반 한인(韓人) 동포가 이를 놀라워하며 심하게 욕하기도 하여 미친 듯 취한 듯 여러 의견이 분분하다.”
이 글이 발표된 때는 대한제국이 마지막 숨을 몰아 쉴 때다. 1904년 이래 ‘고문(顧問)정치’가 시작되었고 을사늑약 이후에는 통감정치가 시행되어 한국은 반식민지 상태에 들었다. 그런 만큼 학부에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시기였지만, 단재는 학부의 교과서 검정을 두고 굳이 ‘국가를 멸망케 하는 학부’라고 준열히 꾸짖었다. 단재가 그렇게 주장한 것은 학부가 ‘편협한 우국심’을 고취하거나 국가의무를 강조하는 교과서는 검정에서 통과시킬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단재는, 우국심 고취를 불허하고 국가의무 국가사상을 부지(不知)케 하는 학부의 이 같은 교과서 검정은 한국인을 외국인의 노예가 되게 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학부는 한국인들의 정치적 각성을 촉구하는 교과서는 위험하다 하여 이런 책은 조금이라도 차매(借買)할 여지가 없도록 했다. 당시 단재는 학부가 ‘위험한’ 것이라고 분류한 서적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한국의 당시 상태를 통론(痛論)하는 것, 과격한 문자로 자주독립을 언급하거나 국가의 각성을 촉구하는 것, 한국의 상황을 풍자하거나 ‘편협한 애국심’을 말하는 것, 국가론ㆍ의무론을 들어 분개한 언사를 쓰는 것, 일본과 외국에 대해 적개심을 고취하는 것, 비분(강개)한 문자로 당시의 역사를 서술하는 것 등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한말 나라가 기울어질 당시 나라를 걱정하며 구국론을 펼치는 교과서는 빌리거나 사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걸 보면서 며칠 전 국정화 고시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이 비슷한 언사가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교과서 검정에는 시대를 불문하고 이런 비수가 숨겨져 있다고 느꼈다. 단재는 당시 이 같은 학부의 검정 원칙에 대해 혈성(血性)을 가졌다면 통곡할 수밖에 없다고 분개했다.
오늘날의 교과서 문제도 권력의 지시를 받아야 하는 점에서 교육부만의 책임이라고 할 수 없지만, 단재가 이 시대를 향해 붓을 든다면 분명 ‘학부’의 책임이라고 적시할 것이다. 국사교과서로 정치권이 문제를 제기한 것은 비극이지만, 교육부는 이런 때에 정치계와 학계를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하고 정치권의 학문 외적 요구를 순리로 여과하는 구실을 감당해야 했다. 여당에서 내건 엉뚱한 “김일성 주체사상을 우리 아이들이 배우고 있습니다”라는 펼침막도, 그것을 검정교과서에 책임을 돌릴 것이 아니라 집필 지침을 시달했던 교육부가 책임있게 해명했어야 했다. 그런 책임은 고사하고 자기들이 통과시킨 검정교과서를 두고 헐뜯고 나섰으니 이는 아부에 책임회피요, 제 얼굴에 침 뱉는 꼴이었다.
정부 여당은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강조한다. 역사학계도 국민 모두와 함께 그걸 강조한다. 그 자랑스러움은, 이승만이 강조했듯이, 일제의 포악한 통치에 피나는 독립투쟁을 통해 대한민국을 건설했기 때문이요, 대통령과 총리가 된 병역기피자들 때문이 아니라 나라 위해 피 흘린 수많은 젊은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며, 4ㆍ19민주혁명과 같은 민주화 전통 위에서 산업화를 이루었고 앞으로 민족의 평화통일도 이룰 것으로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런 대한민국은 ‘국가를 멸망케 하는 학부’를 갖게 되거나 독립운동을 폄훼하고 독재와 친일, 부패를 용인하면서 자기비판을 게을리하는 그런 정부에 의해서는 더 발전할 수 없다.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ㆍ전 국사편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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