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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현의 유행어사전] 시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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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드란 시댁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국어로는 굳이 귀댁이라고 번역할 수가 있고 쓰임새에서는 듣는 이를 높여 부르던 일본말 오타쿠(お宅)가 오덕으로 번역되어 쓰이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시댁은 시덕이라고 불릴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되지 않았다.
소리 자체만으로는 테마파크 이름처럼 들리는 시월드란 말은, 결혼한 여성의 입장에서 과거에 시댁이라고 불렀던 것이 알고 보니, 같은 세계 안에 있는 어떤 다른 집이 결코 아니라 아예 전혀 다른 세계, 그러니까 시(媤)자를 돌림자로 쓰고 있는 다른 종족의 사람들, 즉 샵쥐(시아버지), 셤니 혹은 셤마(시어머니), 시누 등이 살고 있는 세계라는 통찰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영어 ‘월드’는 원시 게르만어, 혹은 게르만 조어라고 부르는 계통에서 생겨났으며, 어원적 의미 성분은 ‘old man’이라고 한다. 최초의 용법에서 ‘world’는 사후 세계와 다른 바로 이 세계, 혹은 이 지상에서의 삶 등을 가리키는 것이었다고 한다. 월드란 말 자체가 오래된 세속적 세계란 뜻에서 만들어졌다는 얘기다.
한자어 시(媤)는 고대 중국에서 여성의 인명으로 쓰였다고 하는데, 갑골문에서 전서체에 이르는 형태가 없는 것으로 보아서 비교적 후대에 만들어진 글자로 여겨진다. 현대 중국어에는 시어머니 집의 의미로 포지아(婆家)나 남편 집의 의미로 푸지아(夫家)가 있고, 일본어에는 남편이나 아내의 본가란 의미로 짓카(實家)란 말이 쓰인다.
이에 반해서, 한국의 시월드는 명절이나 제삿날에 며느리들이 ‘시댁 교복’(간편한 옷)을 입고 온종일 ‘졸라’ 음식 장만을 한다는 용례상의 뉘앙스가 강하다. 시월드란 말은, 좁게는 시부모의 생신이나 시댁의 관혼상제 및 기타 기념일이나 행사 등과 관련해서 며느리들이 겪어야만 하는 과중한 가사 노동 및 각종 스트레스를 연상시킨다. 또 크게는, 시댁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여러 가지로 신경을 써야만 하고 동시에 계속해서 늘 상당한 정도로 정서적으로 학대를 받거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들이 쌓이고 쌓이는 과정에서 억압받는 타자인 며느리들이 시댁 전체를 억압하는 타자들의 세계로 표상해내고 있는 말이다.
시월드에서의 갖가지 체험이나 사건은, 한국의 매스미디어가 수십 년 간 고질적, 타성적으로 재현해내고 있는 바의 소위 고부 갈등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다. 요즘에는,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란 말과 다르게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의 갈등도 점점 커져가고 있다. 또, 아들-남편들도 결코 중립 지대나 비무장지대에 머물 수만은 없는 게, 시월드에서의 남편 정체는 결국 마더 보이였다는 게 아내에게 폭로되기 때문이다. 온통 지뢰밭인 시월드에서는 성격 좋고 능력 있고 똑똑한 여성들도 끊임없이 시친며(시어머니 친구 며느리)와 비교당하게 되며, 마침내 이 세계에서는 모든 사람이 서로를 끊임없이 피곤하게 만들거나 크든 작든 서로 학대를 하고 서로 상처를 입히게 된다.
한자어 시(媤)는 여자와 생각(思)으로 이뤄진 글자다. 중세 한국어에서 사랑이란 말은 생각이란 뜻과 사랑(愛)이란 뜻 두 가지를 동시에 지녔었다. 애증이란 말이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말의 순서에서 일단 사랑/ 생각이 먼저다. 민족의 명절 추석이 다가온다. 시월드의 극장에 출연하는 모든 사람들은, 여자들끼리는 물론이고, 여자에 대해서, 그리고 또 여자들 스스로가 어떤 말이든 간에 입 밖에 내기 전에 한 번쯤 조금 더 깊이 생각을 해야만 한다.
어차피 오늘날 한국의 시월드에서 모든 사람은 상처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다. 이 세계는 단지 젠더나 세대라는 점에서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세계는, 그 밖에도 노동, 계급, 재산, 지역, 나이 등의 다른 여러 요인들에 있어서 수직적인 것과 동시에 수평적인 것이 얼기설기 짜여 있으며 가족사에서의 폭력적 정서로 얼룩져 있는 세계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서로 상처를 덜 받고 덜 주는 편이 마구 주고 받는 편보다는 훨씬 낫다. 따지고 보면, 나르시시즘을 제외하고 모든 사랑은 결국 타자와의 것이며, 부모도, 남편도, 아내도, 자식도, 형제자매도 본디 모두 다 타자다. 이런 생각에서만이 더 모던하게 둥근 보름달을 맞을 수 있다.
이재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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