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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윤선] 날라리 변호사, 꿈의 드라마 출연기

입력
2015.09.08 11:55

별 걸 다 한다고들 한다. 그런데 아는가? 그 “별 것”이 누군가에게는 아주 오랫동안 간직해온 꿈일 수도 있다는 것을.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로 유명한 테네시 윌리엄스의 ‘여름과 연기’라는 작품이 있다. 주인공인 알마는 10대 소녀였을 때부터 옆 집 꼬마인 존을 짝사랑했다. 계기는 아주 작은 것이었다. 돌로 만들어진 천사의 이름을 불러달라고 한 게 전부였다. 알마는 10년이 훌쩍 지나서야 겨우 존에게 사랑 고백을 한다. “그렇게 어렸을 때부터 이 사랑의 열병은 시작됐던 거죠. 내 일생의 하루하루를 난 당신의 옆집에서 살았어요. 당신 자체를 숭배하면서….”

법조인이라는 직업을 희망하기 훨씬 전부터 난 연기를 하고 싶었다. 초등학교 때 영어연극이라는 것을 준비하면서부터 말이다. 연기가 왜 좋은지 알지도 못 한 채 그저 열광했다. 그렇게 중학생일 때에는 희곡을 썼고, 고등학생일 때에는 연극부(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에는 그 연극부가 지금까지 존재한다!)를 만들었고, 대학생이 되어서는 입학식 대신 연극 동아리방을 찾아갔다. 알마가 어린 시절부터 존을 그저 사랑했듯이, 나 또한 어린 시절부터 영문도 모른 채 연기를 좋아했다.

변호사가 되었으나, 변호사답지 않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싫었다. 나도 변호사답고 싶었다.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밖이 아니라 안으로 연소하는, 보통의 변호사이고 싶었다. 의뢰인의 사연에 감정이입을 덜 하고, 세상의 미추(美醜)에 덜 민감하며, 웬만한 일에는 지루함을 느끼지 않는 그런 변호사처럼 살고 싶었다.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한 선배는 “네가 변호사다운 에너지를 갖지 않아 꺼려졌다”라는 말까지 했다. 인정해야 했다. 난 변호사답지 않다는 것을. 마치 “여자답지 않다”라는 것을 훨씬 전부터 인정해야 했던 것처럼.

내가 태어난 뒤 직업을 택한 것이지, 직업을 택하고 내가 난 것이 아닌데도, 나 그리고 세상은 왜 그리 “OO다운”것을 요구했을까.

드라마는 처음이지만 따져보니 방송 출연은 참 많이 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최강연승 퀴즈쇼 Q', 'SBS 일요일이 좋다-골드미스가 간다', '더 지니어스', 그리고 임백천씨와 함께 진행한 '뉴스 콘서트'다.
드라마는 처음이지만 따져보니 방송 출연은 참 많이 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최강연승 퀴즈쇼 Q', 'SBS 일요일이 좋다-골드미스가 간다', '더 지니어스', 그리고 임백천씨와 함께 진행한 '뉴스 콘서트'다.

그리하여 두 개의 직업을 갖게 되었다. 변호사이자 방송인. 난 방송인이라 칭한 적 없으나, 언제부터인가 위키피디아라는 인터넷사전에서 나를 방송인으로 부르고 있었다. 내가 부인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어차피 나란 존재는 타인의 타인 아니던가. 이미 날 방송인으로 분류하는 사람들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기실 나는 그 새로운 직업분류가 그다지 싫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것은 바로 방송이 내게는 무대였기 때문이었다. 막연히 사랑했던 무대. 방송을 하는 순간 전문직종들은 같은 무리의 전문직종으로부터 “날라리” 소리를 들어야 하지만, 차라리 그 소리를 듣는 게 변호사다운 척 하는 것보다 행복했다.

열망은 아마추어도 가질 수 있지만, 프로는 실력이 있어야 한다. 난 내가 아마추어라는 것을 알기에 차마 드라마 출연은 꿈도 못 꿨다. 아니 꿈이야 꿨다. 특히 드라마에서 법조인으로 나온 사람들이 전문용어를 힘들게 치는 모습을 볼 때면 안타까운 맘이 들면서 내가 그 자리에 서 있는 상상을 하곤 했었다. 그러나 나 같은 생초보에게 드라마 출연이라니 언감생심 아니던가.

그런 내게 기회가 왔다. 간혹 법률자문을 제공하던 드라마였다. KBS2의 수목드라마 ‘어셈블리’. 이 드라마의 작가는 ‘정도전’이라는 공전의 히트작으로 더 유명한데 워낙 꼼꼼한 성격이라 스스로 충분히 리서치를 한 후, 내게 가끔 의견을 물어보는 정도로 자문을 구하곤 했다. 누군가의 창조 활동에 0.001%라도 일조하는 게 마냥 행복했다. 드라마 자체가 묵직하고 완성도 있어 더욱 뿌듯했다.

그리고 그 자문을 계기로 드디어 내게도 기회가 왔다. 언감생심이라고만 생각한 그 기회가. 주인공을 신문하는 “검사역”으로 까메오 출연을 하게 된 것이다! 할렐루야!!(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무직이다). 위에 장황한 성장기를 늘어놓은 까닭은 사실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대부분의 겸손한 변호사라면 당연히 고사했을 그 제안을 변호사답지 않은 나는 덥석 물었다. 그리고 지난 토요일 녹화를 마쳤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내게 있는 것 중 가장 비싼 정장과 구두를 골라 손에 소중히 들었다. 미용실에 들려 화장과 머리를 단정히 하고, 오전 7시 30분까지 수원에 있는 KBS 드라마센터로 갔다. 한 살이라도 어려 보이려면 머리를 풀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검사가 라푼젤처럼 머리를 치렁치렁 늘어뜨린 것도 보기 싫고 시청자들의 눈에도 정신 없어 보일 것 같아, 아주머니 소리가 나올 것을 뻔히 알면서도 머리를 묶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연기 한 길만을 걸어온 분들과 조우했다. 같이 촬영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다. 전문 연기자도 아닌 나를 삐딱한 눈빛으로 보더라도 당연한 반응이니 내가 감수해야지 하는 맘으로 갔으나, 시청자들 평가가 워낙 좋아서 그런지 작가님, 감독님, 스탭분들, 배우분들 모두 활기차고 따스했다.

저녁 8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난 참으로 많은 분들께 마음 속으로 감사인사를 드렸다. 비록 단 하루 까메오로 잠시 출연하는 역할이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상상조차 부끄러워 남 몰래 해야 했던 꿈이었다.

그런데 기쁜 것은 기쁜 것이고, 무서운 것은 또 무서운 것이다.

이 좋은 드라마에 민폐를 끼친 것은 아닐까?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서 오버액션을 한 것은 아닐까? 머리를 묶어 너무 아주머니처럼 나오면 어떻게 하지?(이미 아주머니 나이면서…) 마주보고 있던 배우 김서형씨의 외모랑 많이 비교될 텐데 어떡하지? 이런 걱정들이 수시로 튀어 나온다.

2015. 9. 9. 저녁 10시가 다가오고 있다. 첫 신부터 등장한단다. 벌써부터 부끄럽다. 그렇지만 꾹 참고 보련다. 내 꿈의 실현을. 난 제법 뻔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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