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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 '못'한 스마트시대

입력
2015.09.02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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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모컨 등 각종 전자기기 기능 알 수 없고 필요 없는 것 넘쳐

빠르게 변하는 사회 시스템에 적응하기 힘든 노인·장애인들

배려의 문화 찾기 힘들어

서울 용산에 사는 유모(41ㆍ여)씨의 거실엔 8개의 리모컨이 있다. 평소 기능도 모르고 사용도 하지 않는 리모컨 버튼을 반창고로 가려봤다.
서울 용산에 사는 유모(41ㆍ여)씨의 거실엔 8개의 리모컨이 있다. 평소 기능도 모르고 사용도 하지 않는 리모컨 버튼을 반창고로 가려봤다.

미국의 한 유명 블로그는 몇 해 전 몸체 대부분을 테이프로 감아놓은 TV리모컨 사진을 실으며 ‘매우 유용한 아빠인증(Dad-proof) 리모컨’이라고 소개했다. 기계조작에 어두운 아빠(노인)를 위해 전원과 채널, 볼륨 버튼만 남겨둔 모양이 우스꽝스럽다가도 한 편으론 “쓸모 없는 버튼이 이렇게 많았나” 싶어 고개가 끄덕여 진다. 그런데, 엉뚱한 버튼을 건드렸다가 원상복귀를 못해 애를 먹는 상황이 과연 노인들에게만 해당하는 일일까. 이 블로그는 “어쩌면 이 리모컨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일지 모른다”라고 적고 있다.

미국 블로그 등에 올라 있는 TV리모컨 사진. 볼륨과 채널, 전원 버튼만 남기고 모조리 테이핑 했다.
미국 블로그 등에 올라 있는 TV리모컨 사진. 볼륨과 채널, 전원 버튼만 남기고 모조리 테이핑 했다.

TV리모컨뿐 아니라 각종 전자기기에 탑재된 기능 중엔 알 수 없고 필요도 없는 것들이 넘친다. 스마트폰을 끼고 사는 젊은이들도 정작 사용하는 앱은 20~30%에 불과하고 온갖 신 기술을 갖춘 가전제품 역시 전체 기능 중 극히 일부만 사용하는 게 보통이다. 어찌 보면 사용하지 않는 기능까지 구입하느라 아까운 추가 비용을 치르고 있는 셈이다.

앞만 보고 달리는 사회 시스템에선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기 어려운 노인이나 장애인에 대한 배려도 찾아보기 힘들다. 인터넷에 익숙하지 않은 노인들은 추석 열차표를 사기 위해 몇 시간씩 줄을 서야 하고 스마트폰이 점령해 버린 통신사 대리점에서 실버폰 구하기는 여간 어렵지 않다. 세상은 점점 스마트해지는데 스마트하지 못한 일상, 우리 모두에 해당하는 불편한 이야기들을 모아 봤다.

#1. 리모컨, 유모(41ㆍ여)씨

가전기기는 물론 난방과 가스, 보안 시스템까지 스마트폰 하나로 제어하는 세상이라는데 우리 집 거실엔 리모컨이 8개나 뒹굴고 있다. TV나 셋톱박스, 오디오, 에어컨 등을 작동하려면 우선 리모컨부터 찾는 게 일이다. 편리하자고 만든 리모컨인데… 리모컨마다 알 수 없는 버튼이 너무 많은 것도 이해가 안 된다. 버튼에 탑재된 기능을 다 익히려면 사용설명서를 펴 놓고 따로 공부를 해야 할 판이다. 괜히 쓰지도 않는 기능에 대해 추가 비용만 지불한 것 같아 억울한 생각이 든다.

#2. 드럼세탁기, 선별기(26ㆍ여)

집에서 쓰는 드럼세탁기 계기판을 보면 울세탁부터 섬세세탁, 이불세탁, 드라이클리닝 등 여러 기능이 있는 것 같은데 거의 안 쓴다. 지금까지 눌러본 버튼이라고는 본세탁과 온도조절, 탈수 정도. 그냥 구식 통돌이 세탁기처럼 사용하고 있다.

#3. 실내 사이클, 추리아(25ㆍ여)

처음엔 이것저것 기능이 많아서 신기했다. 경사 각도를 설정할 수도 있는데 이렇게 타보니 너무 힘들었다. 집에서는 가볍게 운동하고 싶기 때문에 이 기능은 이제 안 쓴다. 심폐지구력 측정기능은 정말이지 쓸모가 없다. 도대체 내 심장박동 측정해서 어디에 쓰는 지 모르겠다. 운동하는 동안 칼로리 소모량도 나오는데 그걸 보다 보면 칼로리 강박증에 걸릴 것 같다. 그래서 아예 전원을 안 켜고 사용한다. 러닝머신과 달리 전원 없이도 잘 돌아간다.

#4. 에어컨, 박모(44ㆍ남)씨

오랜만에 집에서 고기를 구워먹으려고 에어컨을 켰는데 찬 바람도 안 나오고 바람세기도 조절이 안됐다. 리모컨을 붙잡고 이 버튼 저 버튼 눌러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에어컨 산지 2년 남짓 밖에 안 됐는데 벌써 고장이 난데다 몇 일 차이로 무상 수리도 못 받는 상황에 화가 났다. 다음날 수리 기사가 와서 고장이 아니라 리모컨 기능설정이‘냉방’ 대신 ‘제습’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일러줬다. 평상시 전기기기를 잘 다룬다고 자신했는데 조그만 리모컨 조작 하나 제대로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슬펐다.

#5. 시계, 서명수(26ㆍ남)

친구들이 가진 시계가 좋아 보여 나도 40만원 주고 샀다. 수심 몇 십 미터까지 방수도 되고 스톱워치도 된다는데 쓰다 보니 그런 기능은 거의 필요 없었다. 시계 차고 그렇게 물 속 깊이 들어갈 일도 없고… 그냥 시간만 확인한다.

#6. 전기밥솥, 전슬기(24ㆍ여)

자취방에서 1인용 밥솥을 쓰고 있다. 잡곡, 현미, 쌀밥, 죽 등 기능이 많이 있는데 잡곡취사 버튼 하나만 누른다. 다른 기능은 잘 모르고 또, 쓸 일도 없다.

#7. 태블릿PC, 홍성호(31ㆍ남)

대학원 다닐 때 논문 작성 용으로 구입했는데 졸업하고 나선 영화 볼 때만 사용한다. 깔려 있는 앱 중 쓰는 건 20% 도 안 된다.

#8. 휴대폰 자판, 정모(70ㆍ남)씨

평소 원고 교정 작업을 하고 있어 글자에 익숙한 편인데도 문자 메시지를 보내려면 여간 힘든 게 아니다. 휴대폰 자판으로 모음과 자음을 조합하는 법을 매번 주위의 젊은 사람들한테 물어본다. 특히, 된소리(ㄲ ㄸ ㅆ ㅃ)나 이중모음(ㅑ ㅕ ㅛ ㅠ ㅒ ㅖ) 은 정말 어렵다. 지인 중엔 스마트폰을 쓰면서도 문자 메시지는 물론 인터넷도 못쓰는 경우가 많다. 그에 비하면 나는 그나마 나은 편이라고 위안하고 있다.

#9. 스마트폰, 유모(78ㆍ남)씨

휴대폰은 넘치는데 나이 든 사람을 위한 휴대폰은 구하기 힘들다. 통신사 대리점에서 실버폰(2G폰)은 별도로 사 와야 개통해 준다고 했다. 알아보니 기계 값이 30만~40만원 선인데 할인도 없이 일시불로만 판대서 결국 폴더폰 모양의 스마트폰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저렴한 실버 요금제로 해달라고 하니 다른 매장에서는 실버요금제로는 개통 안 해 주는 곳도 있다며 온갖 생색을 다 내더라. 자식들 없이 혼자 갔으면 훨씬 비싼 전화기에 터무니 없는 요금제로 개통했을 게 뻔하다.

#10. 각종 자동화기기, 이봉재(74ㆍ남)

강원 양양에서 한 달에 한 번 병원 치료 받으러 서울에 올라오는데 고속버스 타는 것부터 난관이다. 예전엔 창구에서 표를 사서 타면 그만이었지만 언제부턴가 버스에 설치한 기계에 QR코드를 읽히라고 해 성가시다. 안 그래도 복잡한 병원에서는 처방전 발급이나 수납절차가 자동화되어서 더 힘들다. 작동방법도 복잡하고 글씨도 잘 보이지 않는 기계 앞에 설 엄두가 안 난다. 그래서 매번 딸이 하나부터 열까지 도와준다. 사람이 사람을 좀 도와주면 될 텐데 점점 기계화니 자동화니… 젊은 사람들한텐 편하고 좋을지 몰라도 노인들 살기엔 갈수록 불편한 세상이 되어가는 것 같다.

류효진기자 jsknight@hankookilbo.com

박서강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최민영 인턴기자(숙명여대 법학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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