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

단독

[임윤선] 우리 '사면'이 달라졌어요

입력
2015.08.18 10:00

부끄럽지만 난 아직도 소개팅에 나가거나 선을 종종 본다. 그런데 나이가 나이다 보니 상대방의 배경이 아주 다양하다. 그 중 일부는 말투나 눈빛, 행동에 아주 익숙한 느낌이 나기도 한다. 내 의뢰인에게서 많이 본 느낌, 즉 ‘평범하게 규칙을 지키며 사는 분’ 같지는 않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런 분들에게 돌려 돌려 직설적으로 물어볼 때도 있다. 혹시 “전과”가 있으시냐고. 왜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을까. 그들은 씨익 웃으며 사춘기 소년이 싸움 전력을 자랑하듯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대학생이 학사경고 받은 사실을 말하듯 또 한 번 씨익 웃으며 사면되었다는 말을 개구지게 붙이곤 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난 전두환 대통령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출두하는 모습을 뉴스로 본 적 있다. 전경환이라고 했다. 세상은 이제야 정의가 바로 서는 거라는 듯이 떠들어 댔지만 그 후 그 대통령의 동생은 아주 조용히 사면ㆍ복권됐다.

전두환, 노태우 두 명의 전 대통령이 푸른색 수의를 입고 법정에 들어서서 무기징역과 징역 17년을 선고 받았을 때, 난 같은 인간으로서 측은지심마저 느꼈었다. 순진하게도 말이다. 그러나 어른들은 그들이 기소된 순간부터 조만간 사면으로 풀려날 것을 알고 있었다.

제13대 국회의원선거를 한 달 정도 앞두고 전두환 전 대통령의 친동생인 전경환(가운데) 새마을운동중앙본부회장이 횡령 및 탈세 혐의로 연행되는 모습.
제13대 국회의원선거를 한 달 정도 앞두고 전두환 전 대통령의 친동생인 전경환(가운데) 새마을운동중앙본부회장이 횡령 및 탈세 혐의로 연행되는 모습.

특별사면은 국회의 동의가 필요 없기 때문에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다[정확한 절차는 이렇다. 법무부장관이 상신하고(법률용어인데, 쉽게 풀어쓰면 “여쭙고”란 뜻이다),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치면 대통령이 행한다].

그러다 보니 어느 정권에서나 전 정권의 부탁으로 혹은 전 정권과의 차별을 위하여 목적형 특별사면이 행해지고는 했다. 시기도 대통령이 마음 먹기 나름이었다. 당선 되자마자 할 때도 있고, 광복절에 할 때도 있고, 재임 후기 후임 대통령에게 잘 봐달란 뜻으로 하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풀려난 사람이 김대중 전 대통령(전두환 대통령 시절), 전경환, 임수경 의원(노태우 대통령 시절), 전두환 노태우, 장세동(김영삼 대통령 시절),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 김선홍 전 기아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박지원 의원,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 최도술, 이학수 전 삼성그룹 본부장, 성완종 회장, 김우중 회장, 이석기 전 의원(노무현 대통령 시절), 이건희 회장, 김승연 회장, 정몽구 회장, 최태원 회장, 손길승 회장, 최원석 회장,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 천신일 회장(이명박 대통령 시절) 등이다. 1997년 이후 특별사면이 없었던 해는 2001년과 2011년 딱 두 해밖에 없었다.

헌법 수업 시간에 특별사면제도와 일반사면제도는 대통령의 권한을 강하게 만드는 제도 중 하나라고 배웠다. 조선시대 왕의 말씀 하나로 죄인이 풀려나던 것과 똑같다. 당연히 역대 대통령들 중 그 누구도 이것을 굳이 포기하고 싶어하지는 않을 법했다. 그런데 문제는 입법부도 국민들도 사면에 대하여 생각보다 너그럽다는 것이다. 아마도 언젠가 자신들도 사면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인 것일까?

하지만 사면을 하게 되면, 그들을 처벌하고자 몇 달 몇 년을 고생하여 수 만 쪽의 수사기록을 만들고 살펴봐야 했던 수사기관과 사법부의 노고는 뭐가 되는가. 생고생해서 겨우 교도소에 넣었건만 몇 달 후 다시 양복입고 거들먹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사법부는 3권분립의 허무함을 온 몸으로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특별사면을 계기로 박근혜 정부의 특별사면을 보건데, 이건 분명 다르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 특별사면의 모습이 조금씩 바뀌고 있는 것이다. 먼저 취임 기념 사면이 없었다.

첫 사면이 2014년 1월에서야 있었는데, 경제사범이나 부패사범은 모두 제외되고 생계형 운전사범이었다.

이번 광복절을 맞아 경제인들을 대폭 사면하려니 예상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필자도 마찬가지이다), 생각보다 훨씬 적은 숫자였다. 물론 정치인이나 부패사범은 또 제외되었다.

그 이유는 나름의 기준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과거 5년 이내에 사면 받은 적이 없을 것, 형이 확정된 지 6개월 후일 것, 피해가 회복되었을 것, 부패사범이 아닐 것 등의 원칙을 가지고 임한 덕이었다.

야당은 특별사면이 여전히 특혜이고 무원칙이고 뭐고 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그 야당이 여당일 때에도 특별사면의 무원칙 비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잘 한 것은 잘 한 것이라고 하자. 분명 박근혜 정부 들어 특별사면의 모습은 바뀌고 있다. 더 적어졌고 더 정교해졌고 더 어려워졌다. 대통령의 의지가 충분히 느껴진다. 가진 것을 놓기가 얼마나 힘든가. 다만 대통령 특성대로 은근하고 요란하지 않아 티가 덜 날 뿐이다.

난 지금까지도 경제적으로 어렵지도 않고 사회적으로 약자이지도 않았던 내 소개팅의 상대들이 왜 사면의 대상이 되었어야 하는지 잘 이해가 안 간다. 그들 얼굴에 스치던 미소는 부끄러움의 미소가 아니라 분명 장난 섞인 자랑스러운 모습이었다. 그 미소를 생각하면 더더욱 얄밉다. 그들이 내게 더 이상 연락을 안 해서 미워하는 게 결코 아니다.

변호사

임윤선의 '누드로'☞ 모아보기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