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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하고도 인정 못 받고 친일하고도 유공자로 둔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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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집회 때 분신한 최현열씨 부친
사회주의 운동 경력에 유공자 탈락
일부 친일파가 유공자 심사 참여
보훈정책 첫 단추부터 오류 투성이
# 12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수요집회 현장인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분신한 최현열(80)씨의 부친은 1932년 6월 ‘영암 영보 농민 독립만세 시위’에 가담한 항일 독립운동가였다. 최씨는 1992년 국가보훈처에 부친을 독립유공자로 신청했지만 심사과정에서 사회주의 운동 경력이 문제가 돼 탈락했다.
# 일제강점기 언론인으로 활동한 서춘(1894~1943)은 일본 유학 중 3ㆍ1운동의 도화선이 된 2ㆍ8독립선언의 실행위원을 맡았다가 옥살이 후 변절해 일제에 부역했다. 춘원 이광수와 함께 대표적 변절자로 꼽혔지만 정부는 1963년 그에게 대통령 표창과 애국지사 서훈을 부여했다.
한국일보가 광복 70주년을 맞아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삶을 들여다 본 결과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한국사회의 치부가 확인됐다. 이들의 어려움은 3대를 넘어 4대까지 대물림 되고 있었다. 최씨 부친처럼 독립운동을 했어도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거나 설령 유공자가 돼도 보상 체계가 허술한 것이 무엇보다 큰 이유였다. 게다가 친일파가 독립유공자로 둔갑하는가 하면, 보상에 눈이 먼 일부 후손은 가짜 공적을 만들어 혜택을 받는 등 우리의 보훈정책은 총체적 모순에 직면해 있다.
독립유공자들에 대한 보훈ㆍ보상은 1962년 국가유공자 및 월남귀순자 특별원호법이 제정되면서 본격화했다. 6ㆍ25전쟁 참전용사를 지원하면서 덤처럼 시작됐지만 그나마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졌다. 독립유공자를 선정하는 심사위원 중 일부가 친일파로 채워진 것이다. 이준식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13일 “당시 국사학계 학자들로 구성된 문교부 공적조사위원회 위원 7명 중에 조선총독부 수사관보와 조선사편수회 등에서 식민사관 주입에 앞장섰던 신석호, 이병도가 포함됐다”고 말했다. 이듬해 내각사무처 독립운동유공자 상훈심의회(22명)에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편집국장 유광렬과 일제 밀정 논란이 있는 이갑성 등 친일 인사가 들어갔다. 친일파가 독립유공자를 선정한 셈이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상당수 친일파가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2차 세계대전 막바지인 1940년대 일본군을 위한 전쟁기금을 모아 일제에 헌납한 이종욱(1884~1969) 전 동국대 이사장이 독립장(1977)을 받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독립유공자와 동시대를 산 심사위원들이 친일 여부를 모를 리가 없다”며 “독립유공자를 선정하는 출발 단계서부터 친일파의 입김이 휘둘린 것”이라고 말했다.
국가보훈처는 결국 1996년 친일행위가 드러난 박연서 목사와 서춘 등 5명의 서훈을, 2011년에는 ‘시일야 방성대곡’을 쓴 황성신문 주필 장지연과 초대 내무부 장관을 지낸 윤치영 등 19명의 서훈을 취소했다. 하지만 친일 행적을 독립운동으로 포장한 가짜 독립유공자는 여전히 숨어 있다는 지적이 많다. 본보 설문조사에서도 독립유공자 및 후손(1,115명)의 14.4%가 ‘독립유공자에 섞여 있는 친일 잔재를 청산해야 한다”고 답했다.
일제치하 시절 친일 전쟁협력기구인 조선임전보국단에 참여한 사실이 공개돼 서훈이 취소된 김홍량(1885~1950)의 묘는 아직 국립서울현충원의 애국지사 묘역에 남아 있다. 김 전 관장은 “풍찬노숙하며 조국 광복에 힘썼던 진짜 독립운동가들이 이 사실을 알면 지하에서 통탄할 노릇”이라고 씁쓸해 했다.
독립유공자 선정과정 역시 문제가 많기는 마찬가지다. 보훈처는 10일 평북 출신 독립운동가 김태원(1902~1926)의 후손이라며 50년 가까이 보훈연금 등을 수령해 온 김모씨에 대해 “유족이 아니다”는 결론을 내렸다. 김태원 선생은 중국 콴디엔(寬甸)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ㆍ처형돼 1963년 독립장에 추서됐다. 하지만 김태원 선생과 동명이인 조상을 둔 후손 김씨는 “김 선생이 평양 감옥에서 사형집행을 기다리던 중 탈옥에 성공,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조국 독립을 위해 12년간 헌신했다”며 공적을 꾸며 제출했다. 공적 심사과정부터 허위 사실을 걸러낼 시스템이 전혀 작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유공자 선정 기준도 모호하다. 의병활동을 하다 체포된 김동신(1871~1933) 선생은 내란죄로 종신형을 선고 받아 독립장이 추서됐다. 반면 의병활동으로 종신 징역형에 처해진 박치량(1878~?) 선생은 애족장을 받았다. 형량은 같으나 2등급이나 격차가 생긴 것이다. 독립유공자 포상 심사기준에 따르면 8년 이상 독립운동 활동, 혹은 옥고를 치른 사실이 인정되면 1~3등급(대한민국장, 대통령장, 독립장)을 받게 돼 있다. 이준식 연구위원은 “심사 결과만 공표될 뿐, 과정은 공개되지 않아 어떤 기준으로 심사를 했는지 알 길이 없다”고 지적했다.
보상금을 둘러싼 후손 간 다툼에서도 정부는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 보훈처는 올해 1월 독립유공자 선정 관련 법을 개정하면서 수급자 지정 범위를 확대했다. 당초 유족 협의→부양자→연장자 순에 따라 수급자가 지정됐는데, 유족 협의 다음에 ‘기초생활수급자ㆍ차상위자ㆍ장애인연금 수급자ㆍ기초연금 수급자’ 항목이 추가됐다. 그러나 수급 대상이 3,4대로 내려오면서 후손이 10명이 넘는 경우가 많아 사실상 협의는 불가능해졌고, 혜택 대부분은 기초생활수급자에게 돌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한 독립유공자 가족은 “형편이 어려운 후손이 여럿 있는 가족 중에는 협의가 이뤄지지 않아 소송을 불사하기도 한다”며 “개정법이 유족들에게 싸움을 붙인 꼴”이라고 말했다. 보훈처는 “유족들의 불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생활 수준을 따져 수급자를 정하려면 확인 절차에 시간이 많이 소요돼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해명했다.
안아람기자 onesho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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