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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글씨가 두려워도 가족이라는 이유로 친일 오점 숨기지 말아야"

입력
2015.08.13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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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후손 조현정 목사·윤석윤씨

"괴롭지만 역사의 진실 바로 세워야"

“할아버지의 친일행적을 알고 굉장히 당황했죠. 미리 알았더라면 민족색채가 강한 교회의 목사로 부임하지 않았을 겁니다.”

서울 향린교회 조헌정(61·사진) 담임목사는 조부의 친일행적을 알게 됐던 2003년을 떠올리며 이같이 말했다. 당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 목록 작성을 담당하고 있던 후배 목사가 조부의 삶이 담긴 자료를 보여줬다. 그는 “‘대동아전쟁 승리를 위한 기도’ 명단에 할아버지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며 “조선장로교당 서기였다는 사실도 그때 처음 알았다”고 회고했다.

조부인 조승제(1898~1973) 목사는 1939~41년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 회의록 서기를 지냈고, 이후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총회 의장과 전남교구장을 겸임했다. 서기장이던 1941년 11월 장로회 창립 30회 기념사에선 “일본적인 기독교 건설에 매진하는 체제를 갖춰 바야흐로 국민적 자각을 촉진하여 신도실천(臣道實踐)의 정신, 종교보국의 이념을 철저화하자”고 주장했다.

조부의 부역 사실을 인지한 조 목사는 그 해 광복절 설교 도중 신도들 앞에서 조부의 잘못을 고백했다. 그는 “향후 통일운동과 설교를 계속 하려면 (조부의 친일행적을) 분명하게 매듭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물론 내적 갈등이 없지 않았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인간 조승제는 “흠 잡을 데 없던, 인격적으로 존경할만한 할아버지”였다. 그가 할아버지와 작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3대째 목사로 성장하는 데도 조부의 기도는 큰 힘이 됐다. 그런 할아버지의 손자, 그리고 향린교회 목사라는 서로 다른 정체성이 그의 마음 속에서 줄곧 맞부딪쳤다고 한다.

집안의 반대도 있었다. 조 목사는 “아버지와 고모는 ‘목회자는 신자를 돌보는 것이 최우선인데 이를 위해 한 (조부의)행위를 꼭 친일로 봐야 하느냐’고 되물었다”며 “결국 내 판단에 맡기긴 했지만 할아버지의 선택을 친일행위로 인식하지 못하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일제 치하에서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군수를 지낸 윤수병(1876~?)의 손자인 윤석윤(58·사진)씨 역시 조부의 친일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그는 “할아버지의 행적에 대해 늘 궁금했는데 2011년 친일인명사전에서 조부의 이름을 발견하고 적잖이 당황했다”며 “사죄하는 마음으로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으로 등록하고 사과 글도 올렸다”고 말했다. 이후 조용히 독서운동을 하고 있는 윤씨는 그전까지 일본 유학을 다녀온 할아버지가 개화기 지식인으로 국가 발전에 힘썼다고 믿었다. 하지만 ‘한국병합기념장(강제병합에 기여한 사람을 대상으로 일제가 수여한 메달)’까지 받은 행적을 전해 듣고 뒤통수를 맞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그제야 윤씨는 잊혀진 기억이 하나 둘 떠올랐다. 그는 “어린 시절 장롱에 있던 할아버지의 예도(칼)와 공무원이던 형님이 전북 부안군청 벽에서 발견한 할아버지 사진 등 단편적인 사실들이 퍼즐처럼 맞춰졌다”며 “순간 ‘조부에 대한 해석은 후대가 할 일이고, 내 일은 사죄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조 목사와 윤씨는 친일 후손들에게 당부의 말을 전했다. 조 목사는 “가족이라는 이유로 조상의 오점을 감싸려는 움직임에 동의하지 않는다”며 “괴롭겠지만 개인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밝혀야 역사의 진실이 바로 설 수 있다”고 말했다. 윤씨 역시 “한 마디 사과 없이 떵떵거리고 살고 있는 이들을 보면 ‘참 뻔뻔하다’는 생각이 든다”며 “‘주홍글씨’가 두려운 것은 이해하지만 과거를 숨기고 미화하는 행위가 옳지 않다는 인식만이라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강조했다.

박주희기자 jxp93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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