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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순에야 받게 된 유공자 연금… 고생한 세월 서럽기만

입력
2015.08.12 04:40

독립운동 기록 겨우 인정받았지만

정부는 달랑 유공자 증서 한 장만…

올해 법 바뀌며 연금 156만원 혜택

"몇 해나 더 받을 수 있을까요"

한상조씨가 서울 고척동 자택에서 할아버지 한태석 선생의 훈장증(건국훈장 애국장)을 들어 보이고 있다.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한상조씨가 서울 고척동 자택에서 할아버지 한태석 선생의 훈장증(건국훈장 애국장)을 들어 보이고 있다.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10일 서울 고척2동의 한 구멍가게. 10㎡(3평) 남짓한 비좁은 실내 한 귀퉁이에 대통령 3명의 이름과 직인이 찍힌 훈포장과 독립유공자 증서가 나란히 철사줄에 걸려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7년, 노태우 대통령은 1990년, 노무현 대통령은 2005년에 증서를 주었다. 이를 바라보며 ‘용감한 형제 독립군’ 할아버지들의 공적을 말하는 가게주인 한상조(79)씨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볼품 없는 가게 하나밖에 없는 내게도 이렇게 훌륭한 선대가 있어 뿌듯할 뿐입니다.” 그의 할아버지 한태석(1876~1949) 선생은 1916년 충남 청양 출신으로 의병 활동을 하며 대한광복회 군자금을 모금하고, 조선총독 암살 거사를 계획했다가 8년간 옥고를 치렀다. 동생 한훈(1890~1950) 선생도 광복단 대표로 활동하며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다 무려 19년6개월간 감옥 생활을 했다.

한씨의 자부심은 거기까지였다. 나라만 알던 의병이 자손에게 물려줄 수 있는 건 가난뿐이었다. 조부는 일제의 모진 고문에 오른팔이 잘려 외출조차 어려웠다. 아버지는 장티푸스에 걸려 광복을 2년 앞둔 어느 날 할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떴다. 열살 터울의 형 내외가 함께 살았지만 일제 수탈로 궁핍해진 동네에서 머슴이 되는 것도 하늘의 별 따기였다. 한씨는 “자존심을 지키려던 할아버지는 닷새를 굶고서야 이웃에게서 겨우 보리밥과 열무김치를 얻어 먹었다”고 회상했다.

그토록 바랐던 광복이 와도 어찌된 일인지 가세는 갈수록 기울었다. 한씨는 할아버지가 숨진 뒤 친척집을 전전하며 연명하다 스무 살이 되던 해 고향인 충남 청양을 떠나 무일푼으로 상경했다. 독립유공자 후손이란 타이틀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한 ‘스펙’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독립운동에 매진한 집안 탓에 후손인 그는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된 노동뿐. 과수원 농사부터 시작해 여름에는 남대문 주변에서 아이스크림 장사를 하고 겨울엔 신촌에서 화투를 팔았다. 20대 중반에 운 좋게 철강회사에 입사했으나 800도가 넘는 열기 속에 일하면서 졸도하기 일쑤였다. 냉수를 맞고 정신을 차리는 생활도 포항제철(현 포스코)이 생기면서 회사가 망해 5년 만에 끝이 났다. 그래서 서른 살에 아내와 차린 구멍가게가 오늘까지 그의 직장이 됐다. 한씨는 “중학교를 나온 아내가 자리를 비울 때면 덧셈을 못해 손님 앞에서 진땀을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했다.

밥벌이의 무서움은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란 사실도 잊게 만들었다. 생계에 쫓겼던 한씨는 1977년에서야 지인의 도움으로 할아버지의 독립운동 기록을 인정받았다. 한태석 선생은 건국포장을 받고 1990년 애국장에 추서됐다.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정부는 독립유공자 증서 한 장만 달랑 건넸다. 당시 광복 후 사망한 ‘애국지사’는 자녀까지만 연금이 지급 됐다. “국가보훈처에 전화를 걸어 아무리 생활이 어렵다고 호소해도 ‘예산이 없을뿐더러 법률상 지급할 수 없다’는 말만 되돌아왔지요.”

지난해 이사하기 전까지 한씨 부부와 큰 딸은 비가 새는 반지하 집에서 스티로폼으로 바닥을 채운 채 10년 넘게 살았다. 가게도 적자를 면치 못했다. 할아버지는 독립운동 자금을 모았지만 한씨는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렸다. 8년 전 끝내 개인파산을 신청해 빚 6,000만원을 탕감 받았다.

그는 얼마 전 비로소 할아버지의 공훈을 보상받을 수 있게 됐다. 올해 1월부터 독립유공자 자녀가 혜택을 받지 못하면 손자 세대에게 연금을 주도록 법이 바뀌면서 한씨에게도 연금 156만원이 지급됐다. 여든을 바라보는 한씨가 얼마나 더 연금을 받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없는 살림에 한시름 덜게 돼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론 고생만 했던 80년 세월이 서럽게 느껴졌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면서 “나라가 망해가는데 할아버지가 후손에 대한 걱정까지 했을까요. 원망은 안 합니다. 나라도 그렇게 했을 테니까요”라고 했다. 그가 두려운 것은 독립운동에 대한 사회의 관심이 흐려지는 일이다. 한씨는 “젊은이들이 가게 벽에 걸린 건국훈장들을 보고는 ‘건축 관련 문서냐’고 물어오곤 한다”고 말했다.

정준호기자 junho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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