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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윤선] 정부는 위안부 역사의 채무자다

입력
2015.08.11 11:56

한 노인이 돌아가신 나의 할머니를 연상케 하는 외모를 하고 회상한다. 정신대에 끌려가 일본군에게 얻어맞던 장면을 떠올리면서…. 70여년 전 겪었던 그 긴 고통의 시간을 감히 잊으라 할 자 누구인가. 내가 한 방송국에서 시사토크쇼를 진행할 때의 일이다. 함께 MC를 보았던 가수 임백천과 나는 도저히 진행을 할 수가 없었다. 흐르는 눈물 때문이었다.

그때 그 분이 하셨던 말씀이 기억난다. “우리가 돈에 욕심이 나서 이렇겠는가. 이 나이에 돈 가지고 뭐 하겠는가. 하지만 우리가 죽으면 분명히 일본은 없었던 일로 취급할 텐데, 우리나라 후손들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어버릴 텐데,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어떻게든 사과를 받아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후손들이 역사를 기억할 것 아닌가.”

우리는 역사의 채무자이구나, 우리는 역사에 빚을 지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광복 70주년이 다가온다. 정부가 분주하다. 광복절에 맞춰 사면도 하고, 대국민 메시지도 던져야 하고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한다.

그런데 정작 해야 할 일 한 가지는 어찌된 일인지 추진한다는 소식이 안 들린다. 그것은 도의적 의무가 아니라 법적인 의무다.

일본이 위안부 문제에 당당한, 가장 큰 근거는 1965년 한일협정이다. 일본은 이미 식민지 수탈에 대한 피해를 3만 달러 배상을 통해 모두 정리했다고 말하는데, 위안부 문제도 당연히 같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거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는 당시에는 위안부 문제를 일본의 국가 범죄행위로 인식하지 못하였으므로 협상의 대상이 아니었고 따라서 배상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필자야 당연히 우리 정부측 입장에 동조하지만, 일본 측 주장이 일리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왕왕 나타난다. 아니 아예 위안부 문제는 일본이라는 국가의 범죄가 아니었으므로 배상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었고(이 학자가 집필한 도서는 위안부들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한다는 이유로 출판금지 당했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박근령 전 육영재단 이사장마저 일본에 가서 비슷한 취지의 발언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여동생 근령 씨가 지난 4일 오후 일본 동영상 사이트 니코니코에서 방영된 인터뷰에서 "우리가 위안부 여사님들을 더 잘 챙기지 않고 자꾸 일본만 타박하는 뉴스만 나간 것에 대해 죄송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진은 4일 방영된 니코니코의 박근령 씨 인터뷰 장면. 방송 캡처.
박근혜 대통령의 여동생 근령 씨가 지난 4일 오후 일본 동영상 사이트 니코니코에서 방영된 인터뷰에서 "우리가 위안부 여사님들을 더 잘 챙기지 않고 자꾸 일본만 타박하는 뉴스만 나간 것에 대해 죄송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진은 4일 방영된 니코니코의 박근령 씨 인터뷰 장면. 방송 캡처.

헌법재판소는 이런 논란이 있는 까닭 자체가 정부의 책임이라고 봤다. 이 같은 분쟁이 엄연히 존재하므로 과연 당시의 한일협정이 위안부 배상문제까지 포함한 것인지 아닌지를 국가가 분쟁해결을 통해 도모할 작위의무가 있는데, 국가가 분쟁해결 절차의 이행이라는 작위의무를 충실히 이행하였다고 볼 수 없으므로 국가의 부작위는 헌법에 위반해 청구인들의 기본권들을 침해한다고 본 것이다.

한 마디로 한일협정을 맺은 것이 정부이므로 한일협정에 위안부 배상문제가 포함된 것인지를 국가간 분쟁해결 절차를 통해 말끔히 정리하라는 것으로, 결국 정부가 역사의 채무자인 격이다.

그리하여 분쟁해결 절차를 밟는다고 가정해 보자. 정부 주장처럼 위안부 문제가 포함되지 않은 것이라면 일본에 다시 배상을 요청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만일 그게 아니라면 이야기가 꼬인다. 그때는 위안부 배상 문제를 일본과의 협정에 임의로 포함시켜 버린 우리 정부에 오히려 배상책임이 있을 것이다.

헌법재판소가 이 같은 판결을 내린 게 2011년 8월 30일이니 어느 새 4년이 됐다. 그런데 문제는 정부의 부작위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거다. 현 정부 들어 정부는 일본과의 대화를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다. 국장급 회의 한 번도 어렵게 하더니, 그 이후 또 진척되는 게 없다. 국제형사재판소나 국제조정위원회에 이 사건을 회부하는 것도 회피하고 있다. 일본에 더 유리한 결정이 날 것으로 예상된다는 게 그 이유다. 오히려 회부하자고 나서는 쪽도 일본이다.

서울 종로구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설치된 위안부 소녀상이 대사관을 바라보고 앉아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서울 종로구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설치된 위안부 소녀상이 대사관을 바라보고 앉아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우리 정부는 도대체 언제쯤 움직일까. 고령의 할머니들은 한 발 떼는 것도 어려운데, 그런데도 그 몸을 일으켜 14시간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가서 호소하는데, 도대체 역사의 채무자인 우리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당장 우리 정부가 자국 헌법재판소의 해석도 무시한 채 이렇게 미적거리는데, 일본 정부가 미쳤다고 나서서 배상할까.

자꾸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상상도 하기 싫은 의심이 스물스물 올라올 듯하다. 설마 아니겠지만 그래도 혹시… 우리 정부가 일부러 이 문제를 회피하는 게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의심 말이다. 혹시 우리 정부는 이대로 시간 끌다가 우리 국민이 결국 위안부 문제를 잊기 바라는 것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의심 말이다.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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