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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장편(掌篇)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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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하나가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라는 기고문은 드레퓌스 사건을 완전히 바꿔놓았고 결국 프랑스 사회를 변화시켰다. 때로는 짧은 호흡의 팸플릿이나 얇은 책이 시대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정곡을 찌르며 문제의식을 확장시킨다.
세상이 참 빠르다. 현대인들에게 빠름은 익숙한 일이 되었지만 그 익숙함으로도 감당하지 못할 만큼 끊임없이 일이 터지고 꼬이며 허무하게 넘어간다. 사실 그건 빠름이 아니라 착시다. 온갖 착시가 난무하고 그런 착시를 믿으라고 윽박지른다. 하나하나 캐고 따지면 도저히 그대로 넘어갈 수 없는 일들조차 권력과 돈이 힘으로 간단히 눌러버린다. 나라를 뒤흔들 중대한 사건들이 연일 터져도 이젠 무감해진다. 그걸 의도한 세력에게는 더 이상 바랄 나위 없는 호조건이다. 나쁜 곰팡이들, 세균들이 득세하기에 이보다 좋은 여건은 없을 것이다.
모두 제 살기 바쁘다고, 혹은 아무리 외치고 떠들어봐야 바뀌는 것도 바로 잡히는 것도 없고 외친 사람만 손해를 보는 걸 너무나 익숙하게 경험해서 애써 외면하는 데에 길들여졌다. 그렇게 우리는 체념을 학습하며 지난 몇 해를 살아왔다. 국정원의 선거부정 개입과 정치 관여 사건 등은 그 차제만으로도 정상적인 국가라면 국기가 흔들릴 엄중한 사건이었지만 오히려 그 당사자들이 더 떵떵대는 세상이다. 아무리 발뺌하고 지록위마(指鹿爲馬)로 호도해도 눈 제대로 뜨고 따지고 캐면 밝혀질 일들인데, 계속해서 일이 터지면서 아예 체념해버린다. 그렇게 터지는 일들이 이어지니 생각하고 따질 겨를조차 없어진 세상이다.
최근에 멋진 기획의 책이 나왔다. ‘왜 우리에게 불의와 불행은 반복되는가?’ ‘곡해된 애덤 스미스의 자유경제’ ‘삼성이 아니라 국가 뚫렸다’ ‘좌파는 어디 있었는가?’ 등 네 권의 책은 63쪽에서 90쪽에 불과한 짧은 책이다. 그러나 내용과 목소리는 그 두께와 무관하게 묵직하고 예리하다. 나무 빨라 자칫 잊히기 쉬운 주제들을 발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건 얇은 책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세월호, 메르스 사태 등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문제를 간결하되 깊은 시선으로 다룬다. 사회적 분석과 학문적 접근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있다.
‘커피 한 잔 값’의 책이다. 두꺼운 책을 읽지 않으려는 세태의 탓도 있겠지만 속도의 신속함과 적절한 분석과 대응이 필요한 시점에서 딱 맞는 방식의 책이다. 크기도 예전 문고판보다 조금 큰 판형이어서 손에 쥐기 좋고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읽기에도 적합하다. 나는 이것을 ‘장편 에세이’라고 부르고 싶다. 길다는 뜻의 장(長)이 아니라 ‘손바닥 장(掌)’의 장편(掌篇)이다. 신문의 보도는 지나치게 사실 위주거나 그나마도 왜곡과 조작의 의도가 많아서 오히려 판단을 흐리게 할 뿐이고, 두꺼운 책은 이미 한참 지나친 뒤의 일이라 정작 그 문제의 해결에는 자칫 뒷북에 그치기 쉽다. ‘MB의 비용’ 같은 책은 많은 공력을 기울인 뛰어난 것이었지만 정작 사후약방문이기 쉬워서 아쉬웠는데, 이 책들은 속도와 내용이라는 적절함을 담고 있다.
조금 두꺼우면 어렵다고 발을 빼고 얇으면 가벼울 것이라고 외면하는 독서 세태다. 커피 몇 잔 값 거리낌 없이 지불하면서 한 저자가 여러 해 공들여 쓴, 귀한 정보의 책들은 비싸다고 내뺀다. 사실 책값이 가장 싸다. 저자의 노고와 지식을 내 것으로 만드는 건 매우 가치 있는 일이다. 책값이 비싸다고 엄살하는 이들에게도 이 책의 정가는 착하다. 물론 두께와 비례해서 값을 셈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당면한 문제를 깊고 간결하게 분석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일은 매우 값진 일이다.
빠르고 바쁜 시대라고, 책 읽지 않는다고 탓만 할 일이 아니다. 흐름을 놓치지 않고 대응할 수 있는 이러한 방식은 주목할 형식의 책이다. 문장 하나가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 짧은 팸플릿 하나가 시대를 바꿀 수도 있다.
김경집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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