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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먹ㆍ소원함 녹인 소통의 미션… 가족의 재발견 기회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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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가족 모여 밥 먹기도 어려운 세상
정시 퇴근 보장ㆍ식사 비용 지원 등
제도적인 장치들 실험하면 어떨까
가족은 전쟁터에서의 아군과 같고
함께 마시는 커피처럼 즐거운 존재
창간 61주년을 맞은 한국일보는 정서적 단절이 심각한 한국의 가족을 주목했다. 사회 구성의 출발이자 핵심인 가족의 위기는 곧 사회, 국가의 위기로 이어진다는 문제 의식에 따른 것이다. 가족 문제 해결을 위해선 거대한 정책, 제도 개편도 필요하지만, ‘작지만 의미 있는 한 마디’로 가족 내 소통의 실마리를 찾아보기로 했다.
이를 위해 ‘서먹한 가족과 식사하고 영화보기’, 가족 식사를 위해 ‘정시퇴근 하기’ 등 다양한 실험을 진행했다. 평범한 가족 구성원인 참가자들이 실험 전후 어떤 변화를 느꼈는지, 갈등의 해법은 무엇이고 그들이 바라는 가족은 어떤 모습인지 한 자리에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6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사옥에서 열린 좌담에는 은퇴한 가장 김진기(64)씨, 대학생 박민석(26ㆍ가명)씨, 직장인 정윤식(35)씨, 고교생 김세정(16)양ㆍ심재훈(16ㆍ가명)군, 자녀 둘을 둔 교사 박영은(38ㆍ여ㆍ가명)씨가 참석했고, 가족사회학자인 김선영 국민대 교양과정부 교수가 진행을 맡았다.
▦가족 실험, 그 후
김선영 교수=각자 참여한 실험에 대해 소개하고, 소감을 말해달라.
김진기=서른다섯 살인 딸에게 처음으로 데이트를 신청하는 게 내 미션이었다. 딸에게 거부당하지 않을까 두려움이 있었다. 처음엔 거절했던 딸이 응해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갔다. 딸에게 편지를 썼는데 마지막에 ‘시집가라’고 했더니 잔소리로 들렸던 모양이다. 그래도 가까워질 수 있었다.
박민석=대학생이다. 엄마와 일상적인 대화만 하고 깊은 얘기는 안 한다. 처음으로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는데 생각보다 엄마도 적극적이었다. 메르스 때문에 영화 관람을 연기했지만 오랜만에 즐겁게 대화했다. 평소 의견이 달라 다툼이 생길 때가 있는데, 그 부분까지 개선될지 확신은 없다.
정윤식=직장인이다. 회사에 “육아휴직 하겠다”는 실험을 했는데 전날부터 긴장되고 초조했다. 팀원들은 자신들의 업무가 늘어나는데도 “가야 된다면 가라”며 긍정적으로 반응했지만 한 상사는 “회사가 바쁜 때인데 어떻게 휴직을 가느냐”며 흥분했고, 다른 상사는 약간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이었다. 두 분 모두 남자 육아휴직 사례를 접해보지 못했고, 관련 규정도 잘 몰라서 그런 반응을 보인 것 같다.
김세정=고등학교 1학년인데 엄마에게 “학원 다니기 너무 힘드니 학원 수업 쉬고 가족 여행을 가자”고 이야기했다. 예전엔 학원을 하루만 빠지는 것도 안 된다 하셔서, 부정적인 답변이 나올 줄 알았는데 “가고 싶은 데 있냐”며 긍정적으로 반응 하셨다. 실험을 계기로 내 진심을 말할 수 있었다.
심재훈=고등학교 1학년이다. 프로게이머가 되고 싶어서 아버지한테 말했는데 “직업 수명이 너무 짧아 너의 미래를 책임져 줄 수 없다”며 강하게 거부 하셨다. 나도 그런 부분 고려해 말씀 드린 건데, 평소에 내가 게임을 너무 많이 하니까 안 좋아하시는 것 같다.
박영은=맞벌이 부부로 결혼 10년차다. 남편과 오랫동안 대화를 하지 않고 지내 이젠 크게 불편하진 않은데 정상적인 상황은 아닌 것 같다.(박씨는 좌담회 이후인 7~9일 남편에게 “고생했다”고 말하며 먼저 다가가는 실험을 했는데 “남편의 단답형 말투는 바뀌지 않았지만 눈빛이 부드러워졌다”고 했다)
▦가족이 되면 달라지는 소통법
박영은=4년 동안 연애할 때는 유쾌하고 재미있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결혼하고 나선 자꾸 기분 나쁘게 말해서 말을 안 하게 됐다. 남편에게 할 말 있으면 아이 통해서 “아빠 이거 하라고 해”라고 얘기한다.
김선영=남성 연예인들을 보면 연애나 결혼 발표할 땐 과할 정도로 사랑 표현을 하지만, 결혼 후에는 자기 결혼생활을 희화화하는 태도를 보인다. 한국 문화는 아직도 이런 걸 남성적이라고 보는 것 같다. 연애할 때부터 건강한 남녀관계가 필요한데 연애할 때는 남성이 과도하게 잘 해주지만 결혼 후엔 피곤해서 그렇게 못하는 경향이 있다.
정윤식=나도 아내와 연애할 땐 백화점 쇼핑, 맛집 가기 등 다 맞춰줬는데 사실 남자들에겐 피곤한 일이다. 결혼 후엔 그 정도까지는 안 하게 된다. 사귈 땐 통화 길게 하지만 결혼 후엔 퇴근 후 피곤하니까 얘기 안 하게 되더라. 결혼 후 양가 가족 문제로 의논할 게 더 많아지는데, 여러 이유로 자꾸 피하게 되고 묵히고 쌓아놓다 보면 대화가 더 안 풀린다.
김진기=부부 사이가 안 좋으면 자녀한테 영향을 많이 준다. 이번에 딸과 데이트하는데 아직도 “엄마랑 싸우지 말라”고 하더라. 자녀에게는 부모가 서로 따지는 것도 천둥소리처럼 들린다. 내가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아버지학교에서는 “자녀에게 제일 좋은 선물은 자녀의 어머니를 사랑해주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김세정=우리 부모님은 나 때문에 부딪힌다. 아버지가 “애를 왜 밤 10시까지 학원에 보내냐”고 하면 어머니는 “요즘 애들 다 그런다”고 말한다. 나에 대해 의견차가 있다.
김선영=우리 사회는 여전히 부부보다 자녀가 중시된다. 통계를 보면 자녀가 없는 부부가 만족도는 높지만, 자녀가 있는 부부는 이혼율이 훨씬 낮다. 자녀가 부부 관계 유지에 도움을 주지만, 친밀한 관계 형성에는 오히려 장애가 되기도 하는 것 같다.
박민석=우리는 가족에 대해 존중하는 마음이 없는 거 같다. 아무리 힘든 상황에 처했어도 만약 교수님한테라면 아무렇게나 말하지 않겠지만, 가족은 ‘확실한 내편’이라는 생각 때문에 오히려 함부로 하게 되는 것 같다. 우리 어머니도 내가 은연중에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면 싫어하신다. 부모 자녀가 상하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어머니를 존중하고, 어머니도 자식을 존중하면 좋겠다.
김세정=가족 간 역지사지가 제일 필요하다고 본다. 밤 늦게 집에 가면 엄마가 “뭐 했어”라고 묻는데 “뭘 뭐해, 학원 갔다 왔지”라고 말한다. 엄마는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데 나는 피곤해서 그렇게 말한다. 상대방 입장에서 배려해야 할 것 같다.
▦얼굴을 봐야 소통이 시작된다
김선영=가족 간 식사 횟수를 조사 해보면 일주일에 한 번 먹는 가족도 많다. 온 가족이 모여 밥먹는 게 참 어려운 현실이다.
심재훈=나는 학원을 안 다녀서 부모님과 대화할 시간은 많다. 초등학생 때 어머니가 “빌 게이츠 가족은 항상 저녁을 먹으며 다 같이 대화를 한다”는 신문 기사를 보여줬다. 친구들이 다 학원 갈 때 나는 가지 않아 외로웠던 적도 있지만, 그건 각자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본다.
정윤식=업무 특성상 새벽에 출근하는데 퇴근까지 늦어지면 아내와 아이를 2~3일에 한번 볼 때도 많다. 오랜만에 보는 아이는 5㎝는 커 있는 느낌이다. 회사 후배는 가족들 얼굴 보기 위해서는 ‘6시 퇴근’을 법제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 전체가 오후 6시면 사무실 불을 끈다거나 하는 제도적인 조치가 필요한 거 같다. 그러면 퇴근 시간에 맞춰 업무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박민석=기업이 가족과 함께 하는 날을 정해 인증사진을 찍어오면 식사비용을 지원하는 등의 제도화가 필요한 거 같다. 다만 가족끼리의 식사를 강압적으로 의무화하고, 부모가 대화하라고 강요하는 등 형식만 따라 하게 되면 관계는 더 안 좋아질 수 있을 것 같다.
김세정=학원에서도 저녁 시간 아이들이 풀어지니까 저녁식사 시간에 학원 밖에 못 나가게 하고, 주말에도 밤까지 아이들을 붙잡아 둔다. 가족이랑 밥 먹을 수 있게 해줬으면 좋겠다.
박민석=내가 고등학생일 때 밤 10시 이후 학원 교습 금지가 법제화 됐다. 다들 불법 과외 등 다른 방법으로 사교육 받을 거라 우려했지만, 실제로는 경쟁이 좀 줄어서 훨씬 살만 했다. 경제학 게임이론에 대입해보면 다른 친구가 새벽 2시까지 공부하니 내가 새벽 3시까지 하는 거다. 친구가 밤 9시까지 하면 나는 10시까지만 하면 된다. 사교육에 대한 제한을 어느 정도 두는 게 좋겠다.
박영은=고3 담임이다. 부모님과 상담을 해보면 부모의 기대와 현실간의 괴리 때문에 고3 자녀와 갈등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부모가 아예 기대치를 낮춘 가정은 대체로 행복한 것 같더라.
김선영=부모가 자녀에게 좋은 대학, 직업을 강요하지만 사회 변화가 무척 빨라 이전에 좋았던 직업이 곧 사라지기도 한다. 그래서 부모님 시대의 생각을 자녀에게 강요하는 것은 자칫 위험할 수 있다. 특히 자녀와의 친밀한 관계를 대신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박민석=아버지 친구 중 대기업에서 열심히 일해 임원까지 됐지만 은퇴 후 자녀들과 서먹하다는 분 많다. 그 분들은 아버지와 내가 대화를 많이 하는 것을 알고는 우리 아버지에게 “네가 정말 성공한 인생이다”라고 얘기하셨다고 하더라.
김진기=나도 젊을 때 해외에서 8년 정도 일해 자녀와의 관계가 서먹하다. 아버지들이 오히려 자녀와의 관계에 대한 욕구가 많다. 만약 아들이 나한테 밥 먹자고 한다면,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뛰어나갈 것이다.
▦나에게 가족은 [ ]이다
정윤식=‘내 편’이다.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사랑을 줘야 한다. 내 편이라고 막 대하는 게 아니라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
박민석=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가족의 방향성은 ‘남’이다. 우리나라는 가족에 대해 너무 강요해 소통에 문제가 생긴다. 가족들도 다 개인의 삶이 있는 독립된 개체라고 인정해야 한다.
박영은=‘전쟁터에서의 아군’이다. 사회생활에 치여도 어쨌든 집은 안식처가 되니까.
심재훈=‘동반자’다. 아무리 싫어도 서로 절충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 그게 가족이고 그래서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것 같다.
김세정=‘커피’. 피곤할 때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잠도 깨고 스트레스 푼다. 가족과 같이 밥 먹으면 즐거워진다. 커피 마시는 것처럼.
김진기=가족은 ‘품’이다. 집에 가면 편안하다. 자녀들도 이 따뜻한 품 안에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
김선영=롤러코스터, 밥, 공기, 일기예보 등 많이 고민했다. 결론은 ‘밥’. 사람들마다 밥에 대한 의미가 다를 것 같아서 해석은 각자에게 맡긴다.
정리=남보라기자 rarara@hankookilbo.com
양진하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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