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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게이머가 되고 싶다는 말에… 아버지 "그건 돈 벌기 힘들다"

입력
2015.06.10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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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꿈 어렵게 꺼내놓자 11명의 부모가 질책과 부정적 대답

부모가 반대이유 충분히 설명하면 자녀들이 오히려 공감하기도

서울 AㆍB고 1학년 학생 300여명이 쪽지에 적은 '부모님께 듣고 싶은 말'들. 학생들은 "사랑해", "너를 응원해", "우리 아들이 최고"라는 말을 듣고 싶어했다.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서울 AㆍB고 1학년 학생 300여명이 쪽지에 적은 '부모님께 듣고 싶은 말'들. 학생들은 "사랑해", "너를 응원해", "우리 아들이 최고"라는 말을 듣고 싶어했다.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서울 AㆍB고 1학년 학생 300여명이 쪽지에 적은 '부모님께 듣기 싫은 말'들. 학생들은 "공부해", "그래 가지고 뭐가 될래", "다른 애들은 잘만 하는데 너는 뭐니" 등의 말을 '피하고 싶은 말'로 꼽았다.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서울 AㆍB고 1학년 학생 300여명이 쪽지에 적은 '부모님께 듣기 싫은 말'들. 학생들은 "공부해", "그래 가지고 뭐가 될래", "다른 애들은 잘만 하는데 너는 뭐니" 등의 말을 '피하고 싶은 말'로 꼽았다.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지난 1일 서울 강남구 A고에서 만난 2학년 김혜진(17ㆍ가명)양. 가족에 대한 생각을 묻자 미간을 찌푸리며 한참을 고민하다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가족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 없어요. 미국에서 대학을 나온 아버지가 가끔 동창생들과의 식사 자리에 저를 데려갈 때가 있는데, 그럴 때 가족의 필요성을 느끼는 것 같아요. 아버지 인맥이 제게 도움이 될 수 있잖아요?” 혜진이는 덧붙였다. “아, 얼마 전 시리아 난민에 대한 책을 읽었어요. 한 아이가 가족을 잃고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저도 가족의 소중함을 느꼈어요.”

혜진이는 대한민국 10대 자녀의 전형이다. 학원 두 곳에 갔다가 자율학습까지 마치면 집에 돌아오는 시간은 자정 언저리다. 가족과 밥을 먹기는커녕 대화할 시간조차 없다. 어머니와의 대화 시간은 하루 30분 남짓. 아버지와의 대화는 “다녀왔습니다”, “밥 먹었니?” 두 마디가 전부다.

혜진이가 수행한 실험은 부모에게 ‘학원을 그만두는 대신 가족 여행을 가자’고 제안하는 것이었다. 여행을 통해 부모와의 대화에 물꼬를 트자는 취지였다. 혜진이는 “안 그래도 공부 스트레스가 커 쉬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혜진이의 실험은 쉽지 않았다. 요즘 어머니, 아버지가 부쩍 혜진이의 성적에 예민해있는 상태였다. 거의 대화가 없는 아버지는 얼마 전 술을 마시고 들어와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다”고 말해 혜진이를 주눅들게 했다. 각종 입시 설명회에 빠지지 않는 어머니는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네 성적은 이게 뭐냐”고 타박하기도 했다. 지난 중간고사에서 혜진이는 기대 이하의 성적을 받아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혜진이는 “학원을 아예 그만두겠다고 하면 많이 혼날 거 같다”며 이번 주말 학원을 쉬고 대신 계곡에 놀러 가자는, ‘완화된 제안’을 부모에게 했다. 이틀 후 전국 모의고사를 치르기 때문에 주말 하루쯤은 학원을 쉬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기대는 산산이 무너졌다.

“세숫대야에 물 받을 테니 거기서 놀아라.”(어머니)

“바빠서 안돼.”(아버지)

혜진이는 “아버지는 회사일 때문에 바쁠 거라 생각했지만 어머니는 적어도 이야기라도 들어주실 줄 알았는데 너무 서운했다”고 말했다. 혜진이는 다만 “나도 학원을 빠지면 진도를 놓쳐 불안하긴 하다”며 “부모님도 내가 장난인 줄 아셨던 것 같다”고 웃었다.

“엄마, 아빠. 저 할 말 있어요”

한국일보는 서울 서초구 B고의 한 학급 학생들에게 평소 마음에 담아둔 말을 부모님께 하도록 제안했다. 제안이 받아들여지면 가족 관계가 회복될 수 있고, 거절되더라도 가족이 겪는 문제가 드러남과 동시에 작은 소통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따른 것이다. 19명의 B고 학생들은 “평소 꿈을 말해 보겠다”, “여행을 가자고 하겠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다고 말하겠다”며 실험에 응했다. 과연 부모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재훈(가명)이는 “프로게이머의 꿈을 말하겠다”고 했다. 그는 인기 게임인 ‘리그 오브 레전드(LOL)’에서 프로게이머 수준인 상위 0.2% 안에 드는 실력자다. 공부도 잘해 학원ㆍ과외의 도움 없이도 반에서 5등 정도의 성적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재훈이의 아버지는 그런 아들이 공부에 ‘올인’하기를 원한다.

재훈이는 3일 오후 거실에서 신문을 읽는 아버지에게 “저 프로게이머가 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웃으며 “프로게이머는 돈을 벌기 힘들어”라고 답했다. 재훈이는 “연봉이 1억원인 프로게이머 이영호도 처음에는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지만, ‘한 달 안에 프로 자격증을 따오겠다’고 설득해 허락을 받았고, 결국 한 달만에 프로선수가 됐어요”고 말했다. ‘도전 기회를 달라’는 간접적 호소였지만 아버지는 “그것도 젊었을 때 한때일 뿐, 평생 하기 어렵다”고 선을 그었다.

재훈이는 “성적을 1등급 받는 대신 게임을 병행할게요”라며 설득했지만 아버지는 “사람은 한가지 일에 집중해야 한다”며 허락하지 않았다.

재훈이는 “절대 타협하지 않으려는 부모님이 마치 벽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결국은 내가 양보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아요. 전교 5등 안에 들면 더 당당하게 얘기 할 수 있지 않을까요?”라던 재훈이는 “사실 프로게이머는 그렇게 공부를 잘할 필요는 없는데…”라며 쓴 웃음을 지었다. 집에서 컴퓨터가 금지된 재훈이는 PC방을 다니며 게임을 한다.

공부를 잘해야만 자식인가요?

축구와 농구를 할 때 ‘살아 있다’고 느낄 정도로 운동을 좋아하는 은희(가명)는 체육 교사가 꿈이다. 은희는 “수학 학원 대신 체육 학원에 다니면 안 되냐”고 부모에게 제안했다. 대답은 이랬다. “너 이러다 내가 죽으면 엄청 후회할거야”, “차라리 공장에 가서 일하지 그래.”

실험에 참가한 학생 19명의 부모들 중 11명이 자녀의 제안을 거부했다. “도대체 혼자 어떻게 공부하겠다는 거야”(질책), “성적을 먼저 올리면 생각해 볼게”(조건), “안 돼”(부정) 등의 대답이 돌아왔다. 학생들은 “상처가 되는 말을 들으니 주눅들고 혼날까 두려워 더 이상 대화를 잇기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양미진 한국청소년상담복지개발원 상담실장은 “다른 아이가 여행을 가고 싶다고 하면 ‘어디 가고 싶니? 무슨 일 있니?’라고 상냥히 물어볼 부모들도 자녀가 같은 질문을 하면 목소리부터 높인다”며 “부모들은 자녀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하지만, 자신의 언어 습관부터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진단했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공부 잘하는 자녀는 인정 받고 그렇지 못한 자녀는 대접받지 못하는 게 한국 가족의 민 낯”이라며 “배우자의 경제력, 자녀의 성적 등 특정 조건을 채워야 가족으로 인정 하는 게 우리나라 가족주의의 특징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허락하지 않더라도 부모의 입장을 충분히 설명한 경우는 자녀의 공감을 받았다. 중학교 때 골프를 배우다 사고로 중단한 예슬(가명)이는 어머니에게 “영어 학원 대신 체대 입시학원을 다니고 싶다”고 제안했다. 어머니는 “나도 그 부분을 생각해 봤는데 2학년부터 다니면 좋을 것 같다”고 답했다. “사회 경험 쌓기 위해 아르바이트나 봉사활동을 해보고 싶다”는 예슬이의 요청에 어머니는 “그것도 좋지만 대학에 다니면서 해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아. 조금만 기다려주면 안될까”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딸의 실망한 표정에 “딸이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안된다고 해 미안해”라고 다독였다. 예슬이는 “엄마가 갑작스런 제안에 당황할 줄 알았는데 담담히 말해줘 놀랐다”며 “나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계시다는 걸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정지용기자 cdragon25@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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