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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랑 데이트할래?" "엄마, 영화 보러 갈래요?"… 교감의 물꼬 터지다

입력
2015.06.08 16:50

64세 김진기씨, 딸과 데이트

마주 앉아 어색한 대화 대신

'사랑스러운 이유' 편지 건네

26세 박민석씨, 엄마와 영화보기

떨리는 제안에 엄마 화들짝

영화 주제로 오랜만에 웃음꽃

김진기씨가 4일 서울의 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딸에게 쓴 편지를 읽어주고 있다. 편지에는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는 등 '딸이 사랑스러운 이유 20가지'가 담겼다. 김씨는 어렵게 성사된 딸과의 첫 데이트를 오래 간직하고 싶어 식당 종업원에게 사진 촬영을 부탁했다. 김진기씨 제공
김진기씨가 4일 서울의 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딸에게 쓴 편지를 읽어주고 있다. 편지에는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는 등 '딸이 사랑스러운 이유 20가지'가 담겼다. 김씨는 어렵게 성사된 딸과의 첫 데이트를 오래 간직하고 싶어 식당 종업원에게 사진 촬영을 부탁했다. 김진기씨 제공

우리 사회의 가족이 정서적으로 단절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가족에게 주어진 과중한 부양 의무, 매일 야근을 강요하는 직장 문화, 밤 늦게까지 학원을 다녀야만 하는 교육 구조, 가족을 존중하기 보다 아무렇게나 대해도 된다는 우리의 의식까지, 경제 사회 문화적인 요인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습니다. 본보는 이 실타래를 풀 수 있는 첫 시작으로 ‘작지만 의미 있는 말 한마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야근을 밥 먹듯 하는 회사의 직원이 오후 6시에 “퇴근하겠다”라고 상사에게 말 하는 것, 자정까지 학원에 다니는 학생이 부모에게 “학원 그만 다니고 학원비로 가족여행을 떠나자”고 제안해보는 것. 이런 도전들이 우리의 소통 구조를 바꾸는 하나의 시도가 될 수 있다고 봤습니다. 그 첫 시도로 언제부터인가 관계가 소원해진 가족과 “밥먹고, 영화보자”는 제안을 해봤습니다. 어색하지만 가족에게 하고 싶었던 말 “같이 밥먹으면서 이야기할래요?” 소통의 첫걸음이 될 이런 도전. 여러분은 어떠세요? 편집자주

▦딸에게 쓴 편지 ‘네가 사랑스러운 이유…’

4일 낮 12시 서울 북한산 기슭의 한 이탈리안 레스토랑. 김진기(64)씨는 딸(35)과 마주 앉았다. 전날 김씨가 용기를 내어 딸에게 “내일 단 둘이 밖에서 점심을 먹자”고 제안해 이뤄진 자리였다. 물론 쉽진 않았다. 딸은 “몸이 좋지 않다”고 거절했고, 김씨는 “너랑 처음으로 데이트를 하고 싶다”고 설득했다.

김씨와 딸은 9년 전부터 ‘주말 부녀’였다. 딸이 지방의 한의대를 졸업한 뒤 지방 한의원에서 근무 하면서부터 떨어져 지냈다. 김씨는 한번쯤 속마음을 터놓고 대화하고 싶었지만, 주말마다 올라온 딸은 TV를 보거나, 방에서 자기 일 하는 게 전부였다.

고대했던 첫 데이트가 성사됐지만, 마주앉은 딸에게 말을 건네는 건 영 어색했다. 그래서 김씨는 미리 적어간 글을 딸에게 건넸다. ‘딸이 사랑스러운 20가지’란 제목의 편지였다. “서먹한 사이에서는 민감한 주제를 피하고, 칭찬으로 대화를 시작하라”는 소통 전문가의 조언을 참고해 전날 밤 쓴 편지였다. ‘일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가끔 아빠 외출할 때 옷 코디해줘서 고맙다’ 등의 내용이었다. 김씨는 “딸에게 느꼈던 사랑스럽고 고마운 부분, 딸에게 바라는 것들을 적었다”고 했다.

덤덤하게 편지를 읽어내려 가던 딸은 “가정을 이루기를 바란다”는 마지막 글귀에 웃음을 터뜨리며, “결국 썼네”라며 농담을 건넸다. 평소 “빨리 시집가라”는 엄마의 성화가 30대 중반의 딸에게 심한 스트레스를 준다는 사실을 김씨도 알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걱정’을 완전히 감출 순 없었다.

그런 아버지에게 딸은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건강을 물었다. 지금 잠시 일을 쉬고 있지만 한의원 개원을 준비 중이라는 계획도 처음 털어놨다. 김씨는 “개원 자금이 필요하지 않냐고 물었더니 대출받으면 된다고, 서른 다섯이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부모에게 손 안벌린다고 하더라. 스스로 계획을 세워가는 모습이 대견했다”고 말했다.

데이트를 끝낸 뒤 김씨는 “딸과 조금은 더 가까워진 것 같다”며 “위암 수술을 받아 술을 마시면 안되지만 다음엔 딸과 술 한잔 하며 더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김씨가 딸과 단둘이 마주앉기까지 왜 이리 힘들었을까. 김씨는 국내 굴지 건설회사의 건축기사였다. 1980년 결혼해 연년생 남매를 낳았지만 중동 건설 붐 때문에 1983년 홀로 리비아로 떠나 호텔과 학교 등을 지었다. 혼자 가족들을 부양해야 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시 한국에 돌아왔을 때 남매는 8살, 7살로 자라 있었다. 김씨는 “나는 고생하더라도 가족들을 고생시키면 안된다는 생각에 이국 생활을 견딜 수 있었다”면서도 “휴가를 받아 집에 오면 아이들이 ‘낯선 아저씨’처럼 대해 늘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귀국 후에도 건설회사의 특성상 지방 장기 파견 근무가 잦았고, 자녀들과는 주말에야 간신히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김씨는 “주말에 가족과 여행을 떠나보기도 했지만 소소한 일상과 경험을 함께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서먹한 관계가 쉽게 좁혀지진 않았다”고 말했다.

그런 관계는 둘째 아들의 진로 문제를 놓고 폭발했다. 아들이 대학에 가지 않고, 미용사가 되려 했을 때 이를 만류하다 갈등을 빚은 것이다. 김씨는 “나야 대기업을 다녔지만 미용사는 블루칼라로 힘든 일이라, 걱정이 돼 잔소리를 하게 됐다”고 회상했다.

악화된 부자 관계는 김씨가 은퇴 후 가족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아버지학교를 다니면서 조금씩 나아졌다. 아버지학교에서 배운 ‘매일 아들 포옹하기’를 통해 아들과의 관계는 어느 정도 회복됐고, 결국 아들도 꽤 성공한 미용실 원장이 됐다. 그러나 여전히 아들과도 속내까지 터놓는 사이는 아니다.

그런데 딸과의 데이트 소식을 들은 아들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들하고도 데이트 해달라”고. 김씨는 다음 주쯤 아들과 단 둘이 식사를 할 계획이다. 김씨는 “이렇게 대화의 물꼬를 텄으니 아예 한 달에 하루를 가족의 날로 정해 서로 이야기하며 식사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늘 바쁜 엄마ㆍ아들 “영화 어때요?”

지난 3일 오전 대학생 박민석(26ㆍ가명)씨는 현관 앞을 뱅뱅 맴돌았다. 박씨가 도전하기로 한 미션은 어머니와 함께 영화보기. 박씨는 또래 친구들처럼 어머니와는 일상적인 대화만 하는 아들이다. 어머니는 직장 일이 바빠 박씨가 면접을 보기 위해 정장을 입고 집을 나서는 모습을 보고서야 아들이 요즘 취업 준비중인 것을 알았을 정도다. 당연히 모자가 단 둘이 영화를 본 적은 한번도 없다.

박씨가 영화보러 가자는 말을 쉽게 꺼내지 못하고 눈치만 보자, 어머니는 “무슨 일이 있느냐, 어디 가려 하느냐”고 물었다. 당황해 “학교 가려는 것”이라고 얼버무렸던 박씨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안방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최대한 태연한 척,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영화 보러 갈까?” 돌아온 대답은 “누구랑? 나랑?”이었다. 박씨는 “제안을 하는 나도 떨렸지만 엄마도 몹시 놀란 눈치였다”고 설명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10년 전부터 별거 중이고, 여동생은 지방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어, 집에는 박씨와 어머니 단 둘뿐이지만 어머니는 “영화보자는 게 진짜 나랑 보자는 것이냐”며 되물었다. 박씨가 “그렇다”고 답하자 잠시 정적이 흘렀고, 어머니는 “학교 다녀와서 저녁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대화를 마무리지었다.

박씨는 4일 밤 어머니에게 다시 영화 이야기를 꺼냈다. 다행히 어머니는 전날보다 훨씬 적극적이었다. 박씨는 어머니와 어느 극장에서 어떤 영화를 볼 지 스마트폰으로 검색했고, 관객의 평점이 낮은 영화가 나오면 “이런 건 안 본다”며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박씨 모자는 주말에 함께 영화를 보기로 했지만 다음날 아침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접촉자가 서울에서도 급증하고 있다는 뉴스가 나와 결국 영화 약속은 미루기로 했다.

박씨는 “영화 약속은 연기됐지만 어머니와 정말 오랜만에 영화를 주제로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어 나쁘지 않았다”고 말했다.

어머니와는 “영화 보자”는 말조차 건네기 어려울 정도로 관계가 소원하지만, 박씨는 별거중인 아버지와는 마치 친구처럼 친한 사이다. 이유는 자신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느슨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박씨의 어머니는 아버지와 별거 후 홀로 남매를 키우기 위해 식당을 운영했었다. 어머니는 밤 늦게까지 일했고, 서울 강남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박씨는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좋다는 학원을 찾아 다니기 바빴다. 대학 입학 후에는 취업을 위해 학점 관리에 동아리 회장, 학회 회장 등 스펙 쌓기에 집중했다.

그러다 보니 어머니와는 일주일에 많아야 2,3차례 같이 식사를 하는 게 전부다. 취업에 대한 고민을 하는 아들과 식당 일을 접고 직장에 다니는 어머니의 대화는 서로의 처지를 잘 알지 못하기에 언쟁으로 이어질 때가 많다.

반면 한 달에 한번 만나는 아버지와의 만남은 박씨에게 늘 유쾌한 일이다. 아버지는 만날 때마다 늘 이야기를 경청해주는 존재였고, 박씨는 어머니에겐 말하지 못하는 진로 고민과 일상생활 등에 대해 자세히 털어놓는다. 자녀와 한 집에 살며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동시에 자식의 삶에 지나치게 개입하고 기대하는 여느 부모 자식간의 갈등 요소가 이들에겐 없다.

실제 어머니는 박씨와 언쟁을 벌일 때 “아버지처럼 가끔 밥 사주고 용돈 주는 사이면 나도 너와 잘 지낼 수 있다”고 말한다. 어머니는 “내가 너를 위해서 희생하는 건데, 같이 붙어 살면서 사이는 더 안 좋아지고 그래서 이렇게 자꾸 트러블이 생기는 것”이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박씨는 “그 동안 어머니와 대화를 하다 보면 의견차이가 말다툼으로 이어질 때가 많아 의식적으로 대화를 피하려고 한 게 사실”이라며 “앞으로는 영화를 소재로 이야기했던 것처럼 조금씩 대화를 하기 위해 노력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정준호기자 junho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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