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세상보기] 메르스와 나쁜 정치

입력
2015.06.03 14:22

‘사상 최악의 바이러스가 대한민국을 덮친다!’ 2013년에 개봉했던 영화 ‘감기’의 메인 카피였다. ‘호흡기로 감염, 감염속도 초당 3.4명, 치사율 100%’라는 설정의 본격 재난영화였는데 당시에는 현실성이 없다는 평을 받았다. 하지만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사태로 인해 대한민국의 현실을 예언한 작품으로 재조명 받고 있다.

이미 두 명의 사망자와 3차 감염자까지 발생했다. 경기도의 학교들이 휴교했다. 국민들의 불안은 커져만 간다. 영화처럼 사상 최악의 바이러스가 될지, 아닐지는 정부의 능력에 달려 있다.

메르스 사태에서 정부는 완벽하게 무능했다. 중국으로 출국한 뒤 확진 판정을 받은 김모씨는 “출국 전, 메르스 감염이 의심된다며 검진을 요청했지만 당국의 조처가 없었다”고 밝혔다. 그 보건소 직원은 “메르스에 관한 공문이나 중요성이나 위험도가 확실히 퍼지지 않은 상태”여서 서울로 가서 검사를 받으라고 했다. 보건 당국의 늦은 대처와 책임 회피성 발언이다. 메르스에 대한 기사가 쏟아지고 1차 감염자가 생긴 후였다. 이번에도 골든타임을 놓쳤다. 2014년 4월 16일이 떠오른다. 세월호 참사 때 가만히 있으라던 선내 방송만 되풀이 됐고, 그 말에 따랐던 승객들은 모두 죽었다.

세월호 때는 가라앉는 배를 기사를 통해 보고만 있었지만, 지금은 가라앉는 배에서 기사를 볼 수 밖에 없다는 댓글에 숨이 턱 막혔다. 국민 건강과 목숨을 지키는 데는 무능하고, 정권의 안위를 지키는 데는 유능한 정부 아래에서 살다 보니 국민들은 정부를 불신하게 되었다. 절박한 마음에 언론에서 말해주지 않는 관련 사실을 찾고 공유하자, 정부는 괴담을 유포하는 자를 처벌하겠다고 나섰다. 이번에도 대책은 무능, 처벌은 유능하다.

미국 질병관리센터가 밝힌 공중보건을 위한 투명한 소통의 조건은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신속하게 정보를 제공하고, 실수를 인정하고 개선하는 것이다. 정부가 괴담이라 칭하는 정보는, 결국 정부가 국민들에게 숨기고 싶은 것일 가능성이 크다. 불신은 무능력과 불통의 결과이다. 국민은 국가를 믿고 싶다. 2003년 사스가 맹위를 떨칠 때 노무현 대통령의 모범적인 관리가 국제사회의 모범이 되었다. 이번에도 매뉴얼이 있었겠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10여년 전에는 완벽하게 지켜지던 매뉴얼이 왜 지금은 전혀 작동이 안되었을까?

보건복지부 장관은 경제학자, 차관은 법대 출신의 사회복지 전공자이다. 보건분야의 비전문가들이 이끌다 보니 국가의료 위기 상황에서 대처가 갈팡질팡한다. 결국 박 대통령 수첩 속의 인물 가운데 말 잘 듣는 이를 앉힐 때 예견된 참사이다.

한편 메르스 사태에 대한 기발한 해결책이 제시되어 인터넷에서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메르스에 걸렸는지 의심될 때 빨리 낫기 위해서는 곧바로 서울 영등포구 국회대로 70길 18번지로 가서 사람들을 붙들고 기침을 하라고 했다. 그곳은 새누리당 당사이다. 그럼 자신이 감염됐을까 봐 걱정된 여당 의원들은 정부를 독촉해서 치료약을 즉각 개발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 글에 대한 댓글 중 백미는 ‘어차피 국회의원들 일 안 해서 거기 아무도 없다’였다. 이것이 지금 정부와 정치권을 향한 민심이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의 정권 유지술은 탁월하다. MB 이후로 정부의 무능은 어차피 또 다른 무능으로 잊혀진다. 메르스로 성완종 리스트에 대한 부실수사와 대선자금과 연관성 등의 기사가 사라졌다. 이런 상황이 정치적으로 박 대통령에겐 이익이 될 가능성이 크다. 문제가 더 커지면 담당 장관이 스스로 물러나게 압력을 가하고 ‘안타깝다’ ‘마음이 아프다’고 하면 된다. 그들에게 세월호 참사는 선장, 메르스 사태에는 감염자가 범인이다. 이런 식이면 교통사고는 자동차 탓이다. 이것이 청와대와 정부의 철학이고 체질이다. 참 나쁜 정치다.

이동섭 예술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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