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박 대통령 대신 최 부총리가 주재한 메르스 회의

입력
2015.06.02 18:00

메르스 사망자와 3차 감염자가 발생하고, 환자와 감염 의심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중동 몇 나라를 빼고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가 됐다. 초등학교와 유치원이 줄줄이 휴교하고 시민들은 외출마저 꺼릴 지경이다. 관광, 유통 등 내수시장에도 악영향을 미치면서 2003년 사스로 중국 경제가 휘청거렸듯이 메르스 역시 한국경제의 돌출악재가 될 거라는 우려가 팽배하다. 가히 국가적 위기 상황이라 할만하다.

하지만 정부의 대응은 한심한 수준이다. 초등 대응과 격리에 실패한 보건당국의 책임은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진짜 문제는 정부의 총체적인 무능과 기강해이다. 메르스가 시작돼 열흘 넘게 휩쓰는 동안 보건당국에만 맡겨놨지 사실상 정부의 컨트롤타워는 손을 놓고 있었다. 메르스가 국제문제로까지 비화하고 있는데도 기껏 주무 장관 혼자 허둥지둥할 뿐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메르스 관련 언급은 사태가 커질 대로 커진 그저께야 나왔다. 그나마 뒤늦게 내놓은 박 대통령의 발언 내용과 수위는 청와대가 과연 고도의 경각심을 갖고 대처하고 있는지 의구심이 들만큼 미흡했다. 박 대통령이 주재한 수석비서관회의 대부분은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불만에 할애됐고, 메르스는 양념처럼 몇 마디 언급하는데 그쳤다. 새누리당도 대통령이 한마디 하자 그때서야 부랴부랴 당정협의에 나섰다.

더 기막힌 건 메르스 사망자와 3차 감염자가 나온 이후다. 어제 오전 메르스 관련 회의를 주재한 건 박 대통령이 아닌 최경환 경제부총리다. 총리가 공석이라 직무대행을 맡고 있는 최 부총리가 회의를 주재한 것이다. 하지만 직무대행이 “국가적인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라”고 지시한들 참석한 장관들이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였을지 의문이다. 박 대통령은 같은 시각 전남 창조혁신센터 출범식에 참석 중이었다. 현 시점에서 국민의 생명과 직결된 메르스 사태 장관회의와 지역별로 벌써 12번째 만들어진 창조혁신센터 출범식과의 경중 판단은 상식에 가까운 일이다.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의 관심은 온통 국회법에 쏠려있는 것처럼 보인다. 박 대통령은 자신의 뜻을 거스르고 국회법을 통과시킨 새누리당 지도부에 대한 불만이 가득하고, 새누리당은 대통령의 심기를 살피느라 전전긍긍하고 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 보다는 정치권력을 둘러싼 집안싸움에 골몰하는 모습은 볼썽사납다. 박 대통령과 정부의 안이한 행태는 마치 세월호 참사 첫날을 보는듯하다. 국가적 재난 사태 수습은 지도자가 가장 먼저 나서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절실히 느꼈을 사람이 박 대통령 아닌가. 박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이후 내세워온 ‘안전국가’가 공허한 구호가 아니라는 것을 직접 보여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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