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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고 몰린 재일조선인 북한行 열풍… 골칫거리 털어낸 일본

입력
2015.05.25 13:15

한국의 격렬한 북송 저지에도 1959년부터 9만여명 '귀국선'에

日, 생활보호ㆍ치안유지 골머리… 인도주의 명분 '귀환' 적극 지원

北, 사회주의 우월 각인 기회로… 이주자는 차별 겪고 왕래도 끊겨

1959년 일본 니가타항에서 재일조선인을 가득 태운 '귀국선'이 북한으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초기 '귀국선'은 소련 군함을 개조한 화물선이었으나 1971년 8월 이후 만경봉호로 대체됐다.
1959년 일본 니가타항에서 재일조선인을 가득 태운 '귀국선'이 북한으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초기 '귀국선'은 소련 군함을 개조한 화물선이었으나 1971년 8월 이후 만경봉호로 대체됐다.

1959년 12월4일 일본 경시청은 니가타(新瀉)현의 어느 고즈넉한 술집에서 밀담을 나누던 한국인 2명을 임의 동행했다. 이들이 신고 있던 구두 밑창에 소형 다이너마이트 12개가 나왔고, 니가타 기차역에서는 가솔린 4통을 담은 위스키 박스가 발견됐다. 이승만 정권이 일본에 밀파한 ‘북송(北送) 저지 공작대’가 시도한 이른바 ‘니가타 일본적십자센터 폭파미수 사건’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일본의 재일조선인 북송이 기정사실화하자 이승만 정권은 그 해 7월의 국무회의 결정에 따라 경찰시험합격자, 재일학도의용대 등 66명으로 구성된 공작대를 급조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및 북한측 책임자에 대한 테러, 수송열차 폭파 등을 통한 물리적 저지를 기도했다. 김구 암살범인 안두희 등도 일본에 밀항해 이 공작에 가세했다. 2011년 4월 우리 국회는 당시 북송 저지 공작에 동원되어 희생됐거나 일본 형무소에 수감됐던 특수임무수행자의 보상에 관한 법률안을 승인했다.

하지만 테러조차 불사했던 이승만 정권의 북송 저지는 무참히 실패했다. 일본이 ‘구보타 망언’과 한국에 대한 이른바 ‘역(逆)청구권’을 철회함으로써 겨우 재개된 제4차 한일회담을 중단했는가 하면, ‘이승만 라인’(평화선)을 넘어온 일본 어선에 대한 단속 강화, 대일 무역단교 선언(1959년 6월15일), 미국에의 중재요청, 국제사법재판소 제소 등 온갖 수단을 썼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국내에서는 여야를 아우르는 북송 반대 국민총궐기 대회가 연일 열려 반일(反日)의 기운이 넘쳐났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한국만의 외로운 울부짖음이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감격과 희망의 북한행’이라는 슬로건이 아무런 위화감 없이 통용되었다. 당사자였던 재일조선인은 차치하더라도 수많은 일본인이 좌우를 불문하고 이를 지지했다. 국제사회도 북송을 인도주의의 실천이라며 거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렇게 1959년 12월14일 재일조선인 975명이 북한으로 건너간 이래 1984년까지 니가타 발 ‘귀국선’은 187회에 걸쳐 9만3,340명을 북한 청진항으로 실어 날랐다. 대부분이 ‘조선’이라는 오래 전에 사라진 나라의 국적을 가진 재일조선인이었지만, 여기에는 일본인 아내(혹은 남편)와 자식 등 일본 국적자도 적어도 6,839명이 포함됐다. 나중에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를 낳은 고영희도 아버지 고경택의 손을 잡고 1962년 ‘귀국선’에 올랐다. 당시 10세였다. 전대미문의 집단이주, 그것도 냉전이 맹위를 떨치던 시절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주의권으로의 대규모 인구이동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1959년 서울에서 열린 북송 반대 국민대회에서 참가자들이 머리띠를 매고 일본의 재일교포 북한 ‘추방’을 규탄하고 있다.
1959년 서울에서 열린 북송 반대 국민대회에서 참가자들이 머리띠를 매고 일본의 재일교포 북한 ‘추방’을 규탄하고 있다.

‘북한 탈출’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요즘의 잣대로는 재일조선인의 북한행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만큼 북송 사건은 복잡다기하다. 따라서 명칭도 관련국의 엇갈린 이해관계를 반영하듯이 제각각이다. 우선 일본에서 북송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조총련은 조국의 품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에서 ‘귀국 운동’으로, 북한 당국은 ‘귀국 사업’이라고 각각 불렀다. 이에 대해 인도주의라는 명목을 내세우며 북송을 적극 지원한 일본 정부와 일본적십자에게는 단지 ‘귀환 업무’였다. 반면, 우리 국민을 ‘추방’해 ‘북괴’를 도와준다고 펄펄 뛰었던 한국 정부는 비판적 입장에서 ‘북송’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당시 북한으로 건너간 재일조선인의 대부분이 일제 식민지기에 한반도 남부에서 일본으로 건너왔거나 이후 일본에서 태어난 전후세대였던 점을 상기하면, 이들의 ‘자발적인’ 북한행은 북송이나 귀국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집단 해외이주에 가까웠다.

재일조선인의 북송은 형식적으로는 일본 정부와 북한 정부의 양해 하에 일본적십자사와 북한적십자회가 1959년 8월 맺은 이른바 ‘캘커타 협정’과 1971년 2월의 추가 합의에 의해 추진됐고, 이를 국제적십자위원회(ICRC)가 추인했다. 다만, 당시 일본과 북한, 국제적십자가 내세운 거주지 선택의 자유와 인도주의라는 거창한 명분의 이면에는 냉전의 논리조차 무색케 하는 살벌한 이해관계가 존재했다.

일본 정부는 어디까지나 재일조선인의 귀환 의사를 존중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인도주의를 빌미로 귀찮은 재일조선인을 일본에서 쫓아내겠다는 게 일본측의 속내였다. ‘귀환 업무’를 실질적으로 주도한 이노우에 마스타로(井上益太郞) 일본적십자사 외사부장은 1956년 8월 발간한 책에서 “재일조선인의 생활이 점점 곤궁해지고 있어 귀환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면서 “귀찮은 조선인을 일본에서 일소(一掃)하는 것이 이득”이라고 말했다. 일본측이 재일조선인을 귀찮은 존재로 생각한 이유는 무엇보다 생활보호 대상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일본 외무성이 1959년 작성한 문서는 “생활보호 수혜자가 1만9,000세대, 8만1,000명으로 이에 따른 경비가 연간 17억엔”이라면서 이들에 대한 지원예산을 고려하면 북송에 소요되는 비용은 “낭비가 아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일본측 문서는 재일조선인의 범죄율이 일본인의 6배에 달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여기에 1955년 결성된 조총련의 영향으로 재일조선인 좌경화가 확대되자 일본 당국은 치안유지를 위해서라도 아예 이들을 북한으로 보내버리고자 했다.

일본의 여야 정치권은 각각 서로 다른 이유로 북송을 지지했다. 북송을 지원하기 위해 조직된 ‘재일조선인 귀국협력회’에는 집권 자민당의 이와모토 노부유키(岩本信行) 의원이 대표위원으로 활동했고, 전직 총리인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郞) 등이 가세했다.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총리도 “돌아가고 싶어하는 자는 돌려보내는 게 좋다”며 승인했다. 골칫거리인 재일조선인은 숫자라도 줄이는 게 좋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에 사회당과 공산당 등 좌파 계열은 인도주의라는 대의명분은 차치하더라도 북한을 도와주는 것이 일본 국내의 사회주의 지지세력 확산에 도움이 된다고 여겼다.

북한이 ‘귀국 사업’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우선 이를 계기로 한일 국교정상화를 저지하는 한편, 나아가 한국에 앞서 일본과 국교를 맺겠다고 생각했다. 북한은 1955년 2월 남일 외상이 대일 국교정상화를 촉구한 이래 지속적으로 한일회담을 견제하며 ‘북일회담’을 모색했다. 이때 재일조선인의 집단수용은 북한이 한반도를 대표할 뿐 아니라 북한식 사회주의가 우월하다는 것을 국제적으로 각인시키는 절호의 기회였다. 여기에 북한은 일본 내의 ‘귀국 운동’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조총련을 장악한데다 일본의 좌익세력에 대한 영향력을 확장했고, 심지어 자민당 내에서도 지지세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귀국선’의 대명사인 만경봉호는 이후 오랫동안 일본 물자 반입이나 공작원 투입 등 북일관계를 연결하는 수단으로 활용됐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1958년 중국군이 완전 철수하면서 가중된 노동력 부족을 보완하기 위해 재일조선인의 유입에 적극적이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조총련이 발간한 자료에 따르면 북송 재일조선인 가운데 18세 이하, 55세 이상이 62% 이상을 차지하는 등 “노동력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또 다른 조총련 발간 자료는 제11차 ‘귀국선’까지의 송환자 1만1,022명의 83%가 ‘무일푼’이었던 데다 일본적십자의 니가타센터 체재 중에 2,400명이나 건강이 좋지 않아 진료를 받았다고 말한다. 북한이 재일조선인을 받아들여 경제적으로 득을 봤을 가능성은 그다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수의 재일조선인은 왜 ‘귀국선’에 올랐을까. 무엇보다 생활고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58년 9월 재일조선인들은 기시 총리에게 보낸 요청서에서 “하루하루 끼니조차 때우기 어려운 많은 동포는 융성·발전 중인 조국에 돌아가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당시 아사히신문은 재일조선인의 4분의 1이 생활보호 대상자이고 8할이 실업자라면서 “일본에서는 먹고 살기 어렵다”는 불만이 속출했다고 전했다. 이때 극도의 정치혼란과 경제침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남한과는 대조적으로 노력동원과 사회주의권의 원조를 통해 급속도로 전후복구를 이루는 것으로 비춰졌던 북한은 동경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재일조선인에게 이 같은 ‘환상’을 심어준 데는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한몫했다. 유명 사진작가 다무라 시게루(田村茂)가 1959년 1월에 개최한 사진전 ‘새로운 중국과 조선’에는 수많은 재일조선인이 몰렸다. 특히 좌익 계열의 역사학자인 데라오 고로(寺尾五郞)의 북한 방문기 ‘38도선의 북쪽’은 북한을 그야말로 ‘지상낙원’으로 그려 재일조선인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이 같은 일본 지식인의 일방적인 북한 예찬은 북한이 일본을 상대로 전개했던 ‘인민 외교’ 혹은 ‘초청 외교’의 결과였다. 북한에 대한 정보가 지극히 제한되어 있던 시절 수많은 재일조선인들은 민족차별과 생활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일본이나 매우 불안해 보였던 남한보다는 차라리 북한에 이주해 자식들의 미래를 보장받고자 한 것이다.

최종적으로 북한행을 선택한 것은 물론 재일조선인 본인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을 차별하고 곤궁한 상태로 내몬 끝에 ‘귀찮은 것들을 해치운’ 일본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재일조선인은 모두 ‘우리 국민’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이들의 생활과 권리 향상 등에는 무관심했던 한국 정부의 책임 또한 막중하다. 북송 ‘귀국선’에 올라 탄 재일조선인과 이들의 일본인 아내 등은 북한에서 ‘동요계층’으로 분류되고 ‘째포’라는 비속어로 불리며 또 다른 차별을 겪은 것으로 전해진다. 거주지 선택의 자유와 인도주의라는 거창한 슬로건 하에 북한으로 내몰렸던 이들에게 다시는 자유왕래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이동준 기타큐슈대 국제관계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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