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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기시 '검은 유착', 오늘날 日 혐한론에도 영향

입력
2015.04.27 13:29

68년 창설, 75년 한일의원연맹 개칭

전쟁 수뇌부인 A급 전범 등이 주도

아베 총리는 현재 일본 측 부간사장

캐치프레이즈 '반공' 내세웠지만

양국 문화·정신적인 유대 강조

日 만주국 운영체제도 이식시켜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013년 11월15일 도쿄에서 열린 한일협력위원회 제50회 총회에서 인사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나의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가 한일협력위원회의 초대 회장을 맡은 이후 반세기에 걸쳐 한일관계 증진을 위해 커다란 역할을 해왔다”고 말했다. 출처 일본 총리관저 홈페이지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013년 11월15일 도쿄에서 열린 한일협력위원회 제50회 총회에서 인사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나의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가 한일협력위원회의 초대 회장을 맡은 이후 반세기에 걸쳐 한일관계 증진을 위해 커다란 역할을 해왔다”고 말했다. 출처 일본 총리관저 홈페이지

한일관계는 올해 국교정상화 50주년을 맞았지만, 장기간 정상화되지 못한 채 휘청거리고 있다. 인적 물적 왕래는 거침이 없는데도 한국인도 일본인도 서로를 잘 모를 뿐 아니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특히 최근 일본에서 기승을 부리는 ‘혐한론(嫌韓論)’은 단순한 반한론(反韓論)과는 차원이 달라 근거 없이 한국 및 한국인을 멸시·매도하며 온갖 저주를 퍼붓는다. 한국인 또한 이런 일본을 불신하며 강하게 경계한다. 한일관계가 이렇게 꼬인 것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역사인식에 기인하지만, 1965년 수교 후 한국의 ‘친일파’와 일본의 이른바 ‘친한파’가 엮어낸 특수한 관계에 말미암은 바도 적지 않다. 국교정상화의 이면에 어슬렁거렸던 한일 간의 ‘검은 유착’이 이후 제도권으로 당당히 들어와 한일관계를 더욱 왜곡시켰기 때문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일본 총리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만주 인맥의 재결합은 한일관계의 진정한 ‘정상화’를 막는 주요 요인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새로운 형태의 ‘대동아공영권’을 모색해온 기시 측 인사들을 한국을 진정으로 이해해주고 도와주는 ‘친한파’로 포장하며 환대해 왔다.

● 전범들이 주축인 한일국회의원간담회

박정희 정권과 ‘기시 라인’의 유착은 1968년 6월 ‘한일국회의원간담회’라는 조직을 통해 역사의 전면에 처음 등장하게 된다. 이 간담회를 주도한 일본측 대표는 가야 오키노리(賀屋興宣)였다. 그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도조 히데키(東條英樹) 내각의 대장대신으로서 전시경제를 총괄했고, 당시 상공대신을 지낸 기시와 더불어 전후 A급 전범으로 종신형 선고를 받았다. 한마디로 일본이 말하는 대동아전쟁의 주역이었다. 기시와는 전범 수용소인 스가모(巢鴨)형무소의 ‘감방 동기’이기도 했던 그는 1955년에 운 좋게 석방된 후 정계에 복귀, 기시 등과 함께 자민당 내에서 이른바 반(反) 중공, 친(親) 대만파 의원 모임을 주도했다.

여기에 이 간담회의 창설멤버였던 후지오 마사유키(藤尾正行)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1986년 ‘역사교과서 파동’ 때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면 살인죄에 해당되지 않는다” “1910년 한일병합은 합의하에 이뤄졌으므로 한국에도 책임이 있다”고 말한 이른바 ‘후지오 망언’의 장본인이다. 당시 그는 이 ‘망언’으로 문부대신에서 파면됐으나 끝내 자신의 생각을 접지 않았다. 후지오 또한 자민당 내 반중공, 친대만파의 핵심 멤버로서 기시 라인이 주축이 되어 조직된 세이와카이(淸和會)나 세이란카이(靑嵐會)에서 활약했고, 요즘 일본을 대표하는 극우 정치가로 알려진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전 도쿄도지사와 함께 자주헌법의 제정을 주창해왔다. 가야, 후지오 등 기시 라인의 우익인사들이 한 축을 형성한 한일국회의원간담회는 1975년 ‘한일의원연맹’으로 개칭, 지금도 한일관계의 우호, 발전을 위한 정치적 보루임을 자임하고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현재 이 조직의 일본측 부간사장을 맡고 있다.

일본 국회의원들이 1975년 청와대에서 기시 노부스케 전 일본 총리가 기증한 잉어를 연못에 방류하고 있다. 출처 국가기록원
일본 국회의원들이 1975년 청와대에서 기시 노부스케 전 일본 총리가 기증한 잉어를 연못에 방류하고 있다. 출처 국가기록원

● 한ㆍ일 “같은 민족” 대동아공영권 부활인가

비록 정세에 따라 그 성격을 조금씩 달리했으나 박정희 정권과 기시를 필두로 한 일본의 우익 인사들 간의 ‘검은’ 관계를 상징하는 것이 지금도 왕성하게 활약 중인 ‘한일협력위원회’이다. 이 위원회는 원래 1957년 일본의 우파 정치세력과 대만의 장제스(蔣介石) 정권이 손을 잡아 만든 일화(日華)협력위원회를 모델로 삼은 것이다. 한일협력위원회는 반공, 특히 그 중에도 반중공·친대만파였던 기시 및 그 계열 인사들의 정치철학과 이에 사실상 동조해온 박정희 정권의 국가정체성이 결합한 합작품이었다. 이 모임은 한일각료회의와 같은 공식채널과는 달리 박정희 정권의 주요 인사들과 ‘만주 시절부터 이야기가 잘 통해온’ 일본 자민당의 ‘우리 그룹’만이 만나 한일 간의 각종 중대사를 논의하는 조직으로 자리잡았다.

모임의 성격이 이렇다 보니 한국 정부관계자조차 우려하는 목소리를 냈다. “한국은 국론을 하나로 모았는데 일본은 자민당의 일부 사람들만이 나온다. 다시 말하면 원래 이야기가 잘 되는 일부 일본측 인사들과만 논의하기 때문에 말은 잘 통하지만 그로 인해 한국은 일부의 의견을 일본의 국론으로 받아들여 귀국한 후 선전한다. 요컨대 일본과 한국이 다른 평면에 서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고 같은 평면에서 이야기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엄민영 주일대사는 1969년 우시바 노부히코(牛場信彦) 일본 외무차관에게 이렇게 균형이 맞지 않고 뭔가 비정상인 이 조직의 문제점을 꼬집었다.

원래 말이 통하는 사람들만 모인 만큼 한일협력위원회는 활기가 넘쳤다. “자유진영 제국의 유대를 강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면 합니다. 아시아의 자유를 수호하고 평화를 확립하는 것은 한일 양국 국민에게 부가된 역사적인 임무입니다.” 초대회장을 맡은 기시는 1969년 창설 총회에서 이렇게 ‘반공’을 기치로 다시 뭉치자고 주장했다. 박정희 정권은 과거 황국(皇國)의 확산을 위해 ‘아시아의 자유’를 짓밟고 평화를 파괴했던 침략 전쟁 주도자들과 ‘자유진영 제국의 유대’를 위해 경제는 물론, 정치 문화 분야에 이르는 포괄적인 유대 관계를 구축하고자 한 것이다.

이 조직은 ‘반공’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전면에 내걸었지만 툭하면 이와는 전혀 무관하게 한일 간의 ‘정신적인 유대’를 강조했다. 가령 1969년 제1차 총회의 문화분회에서는 한일 양국이 ‘특별한 문화권’에 있음을 확인하고 ‘정신적 협력체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고, 이듬해 서울서 열린 회의에서는 한일 간의 ‘동(同) 민족,’ ‘동 문화족’이라는 황당한 개념이 언급됐다. 한일 간의 특수한 동질성을 강조함으로써 강제병합과 식민지배를 정당화한 과거의 논리를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이를 두고 기시는 1971년 열린 총회에서 한일관계를 역사상 선례가 없는 ‘청신(淸新)한 관계’라고 부르고 싶다면서 “양국이 서양적인 물질문명을 초월하는 ‘문명의 융합’을 이뤄낼 것”을 희망했다. ‘대동아공영’을 부르짖으며 침략을 미화했던 과거를 연상시키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 “한국을 일본의 하청 국가로”

한일협력위원회의 일본측 주축은 물론 기시를 중심으로 한 만주 인맥이었다. 이 위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온 시이나 에츠사부로(椎名悅三郞)는 기시가 만주국 산업부 차장, 총무처 차장일 때 그 밑에서 일했고, 1941년 도조 내각에서 기시가 군수차관을 거쳐 상공대신이었을 때는 차관이었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당시 외상이었던 그는 이에 앞서 1963년 “대만을 경영하고 조선을 합방하고 만주에 오족협화(五族協和)의 이상을 기탁한 것이 일본 제국주의라면 그것은 영광의 제국주의”라고 말하기도 했다. 오족협화란 일본이 ‘괴뢰’ 만주국을 건국할 때 내세운 이념으로, 오족은 일본인, 한인(漢人), 조선인, 만주인, 몽고인을 가리킨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기시가 만주산업개발5개년계획 등을 통해 만주국을 설계해가는 과정을 만주국 군인으로서 지켜봤고, 이데올로기 조작과 통제경제 운영 등 만주국 체제를 한국에 적용했다.

여기에 이 조직의 상임위원을 맡은 야쓰기 가즈오(矢次一夫)는 일제의 만주침략 때부터 군부의 배후에서 암약한 인물로서 아무런 직책도 없는 ‘낭인’(浪人)이면서도 기시가 총리이던 1958년에는 특사 자격으로 방한, 이승만 대통령과 만났다. 일본에서 ‘쇼와(昭和) 최대의 괴물’로 불리며 정치거물인 기시에게 ‘당신’이라고 부를 정도로 영향력을 행사했던 그는 한일협력위원회를 실질적으로 창설하고 그 방향성을 제시했다. 야쓰기의 존재가 한국에 알려진 것은 아마 1970년 한일협력위원회 제2차 총회에서 공개된 ‘한일 장기경제협력 시안(試案),’ 이른바 ‘야쓰기 시안’ 때문일 것이다.

‘야쓰기 시안’은 향후 10년간 철강 등 일본에서 이미 노후화한 산업을 한국으로 이양하는 등 한일 경제협력을 가속화하고, 구체적으로 한국의 포항 이남지역과 일본의 서부지역을 ‘협력경제권’으로 묶는 방안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 시안 자체는 양국 간 산업발전 단계의 격차에 주목하면서 일본의 기술 및 자본과 한국의 노동력을 기반으로 한 수직적인 국제분업체제를 구축하자는, 사실상 일본의 청구권 자금 도입 이후 심화하고 있던 경제의존 현상을 풀어 쓴 것에 불과하다. 다만 그의 발상은 냉혹한 자본의 논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시 등이 구상했던 일본 주도의 ‘동 민족’론에 입각해 있었다는 데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이러한 일본측 ‘우리 그룹’을 ‘친한파’라면서 환대했다. 기시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우리 그룹’은 한일관계 곳곳에 굵직한 족적과 상흔을 남겼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0년 한일협력위원회 참석차 방한한 기시에게 “측면에서 도와준 덕분에 포항제철 건설의 전망이 섰다”면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이처럼 고마워했던 일본의 ‘친한파’와의 동거(同居)가 사실은 한일관계의 ‘정상화’를 왜곡하고 갉아먹고 있었던 것이다.

이동준 기타큐슈대 국제관계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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