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원한 6억弗 받고… 묻지마 과거사·독도분쟁 빌미 남겨

입력
2015.04.13 10:23

경제개발5개년 자금 급한 군부정권

김종필 중정부장 내세워 담판 시도

日오히라와 협상 끝 청구권 총액 합의

11년 장기협상 끝냈지만 큰 부작용

무·유상 섞인 지급액 日이 정하고

명분도 식민지 피해 배상과 멀어져

金 두 차례 "독도 폭파해 버리자"

1962년 11월 일본 도쿄에서 김종필(왼쪽)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이 청구권 문제 등 한일관계 현안을 논의하고 있다. 오히라는 이후 중일 국교정상화를 주도했고 박정희 정권 말기인 1978년 총리가 된다.
1962년 11월 일본 도쿄에서 김종필(왼쪽)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이 청구권 문제 등 한일관계 현안을 논의하고 있다. 오히라는 이후 중일 국교정상화를 주도했고 박정희 정권 말기인 1978년 총리가 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아니라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방식을 원한다.” 1962년 2월21일 일본을 방문한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일본 총리에게 불 같은 성격과 무자비한 보복으로 난마처럼 얽혀있던 일본 전국(戰國)시대 100여년의 혼란을 한 순간에 잠재운 바 있는 노부나가처럼 한일 청구권 문제에 대해 일도양단의 결단을 내려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이케다는 “나는 역시 이에야스가 마음에 든다”면서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은 팔짱을 낀 채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다”고 딴청을 부렸다.

이케다가 말한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일본에서 전해오는 유명한 일화다. 일본 전국시대의 세 영웅, 즉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이에야스에게 좀처럼 울지 않는 새를 울게 하려 한다면, 노부나가는 새에게 울라고 명령한 다음에 그래도 울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버리고, 히데요시는 온갖 잔꾀를 써서 울도록 만들고, 이에야스는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역사가 말해주듯 최종적으로 혼란 정국을 평정한 자는 때를 기다린 이에야스였다. 이케다는 “무리하게 밀어붙이지 말자”면서 “청구권이라는 명칭은 반드시 집착하지 않는다”고까지 말하며 다그치는 김종필의 애를 태웠다.

청구권에 목맨 한국에 독도 영유권 들이댄 일본

한국 군부정권이 이렇게 청구권 자금 확보에 목을 매자, 일본은 의도치 않게 회담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일본이 그때까지의 한일회담에서는 거론하지 않았던 독도 영유권 문제를 느닷없이 제기한 것도 바로 이즈음이다. 당시 일본 외무성이 작성한 교섭방침 관련 외교문서는 독도 문제가 회담의제는 아니지만 청구권 등에 대한 한국측의 ‘적극적인’ 태도를 이용해 “일본측의 국제사법재판소(ICJ) 제소 제의에 한국이 호응하도록 노력한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 김종필-이케다 회담 직후인 1962년 3월에 열린 한일 외무장관회담에서 일본측은 청구권으로 8억달러를 요구한 한국측에 대해 5,000만달러만을 인정하겠다고 선을 그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독도 문제 등에 대한 한국측의 양보를 회유했다. 청구권 총액에만 관심을 보이는 한국측을 일종의 연계전략으로 압박해 또 다른 실익을 챙기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최덕신 당시 외무장관이 강하게 맞서면서 회담은 결렬되고 만다. 이에 대해 이세키 유지로(伊?祐二?) 당시 일본 외무성 아시아국장은 나중에 “이처럼 한심하고, 불유쾌하고, 뻣뻣해서 사리분별하지 못하는 놈은 처음 봤다”고 혹평했다. 한편, 광복군 출신이기도 한 최덕신은 나중에 박정희 정권과의 불화로 미국으로 건너간 뒤 1986년 아내 류미영과 함께 북한으로 망명했다.

이렇게 협상 난항을 거듭하는 가운데 군사정부는 1962년 7월 자립경제의 기초를 만들겠다면서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발표한다. 이 계획의 상당부분은 대일 청구권 자금의 확보를 전제로 수립됐다. 이때 노부나가 방식으로 일거에 타결 짓겠다는 결의로써 임한 이가 바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다. 그는 1962년 10월 및 11월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일본 외상과 두 차례 만나 ‘무상 3억달러+유상 2억달러+민간차관 1억달러 이상’이라는 청구권 문제 해결의 큰 틀에 합의했다. 이른바 ‘김-오히라 메모’에 집약된 이 합의로써 1951년 가을 이후 11년간이나 교착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던 한일 청구권 교섭은 물꼬를 텄다. 다만, 이 합의에 도달하는 과정은 물론이고 이후 합의 자체가 남긴 파장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에 하나하나 따져볼 필요가 있다.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이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의 회담과정에서 작성한 청구권 관련 합의사항의 일부. ‘김-오히라 합의’로 알려진 이 메모에는 첫 부분에 무상으로 한국측이 3억5,000만달러, 일본측이 2억5,000만달러를 주장하나 이를 3억달러 10년간 지불로 양측 정상에게 건의한다고 적혀 있다. 출처 일본외교문서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이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의 회담과정에서 작성한 청구권 관련 합의사항의 일부. ‘김-오히라 합의’로 알려진 이 메모에는 첫 부분에 무상으로 한국측이 3억5,000만달러, 일본측이 2억5,000만달러를 주장하나 이를 3억달러 10년간 지불로 양측 정상에게 건의한다고 적혀 있다. 출처 일본외교문서

무상 3억, 유상 2억달러는 오히라가 정해

우선 금액의 측면에서 ‘무상 3억달러+유상 2억달러+민간차관 1억달러 이상’은 김종필 개인의 협상력에 의해 상향된 것은 아닌 듯하다. 일본측 공문서에 따르면 외무성은 1962년 8월에 이미 한국측이 청구권 3억달러와 그와 비슷한 수준의 정부차관을 희망한다는 판단 하에 ‘무상3억, 유상 2억달러’ 방안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여기에는 무상으로 3억달러 정도는 한국에 줘야 한다는 견해를 여러 차례 제시했던 미국의 입장도 감안됐다.

이를 토대로 오히라는 10월20일 열린 제1차 김종필과의 회담에서 “협상 전체를 달마 그림에 비유하면 청구권 금액은 마지막에 눈을 그려 넣는 것”이라고 호기를 부리면서 무상으로 2억5,000만달러, 최대 3억달러까지 제공할 뜻을 내비쳤다. 그러나 김종필은 “군사정권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하다”면서 “무상 3억 플러스 알파에 경제협력기금(정부차관을 의미)이라도 활용해 가능한 한 6억이라는 숫자에 다가가고 싶다”고 말했다. 결국 11월12일 두 번째 만남에서 오히라는 당초 검토한 바 있는 ‘무상 3억, 유상 2억달러’에, 향후 대폭 늘 것으로 예상은 되지만 일본정부가 책임질 수는 없는 민간차관 명목으로 1억달러를 보태 한국이 원한 총액 6억달러에 화답하게 된다. 오히라와 김종필은 이렇게 합의한 숫자를 각자 메모했다.

일본측 외교문서에 따르면 특히 무상 3억달러는 오히라 개인의 정치적 결단에 따른 것이었다. 당시 이케다 총리는 정부차관에 대해선 어차피 나중에 돌려받게 되므로 금액 보다는 이자에 관심이 많았으나 무상 제공에 대해선 1억5,000만달러 정도가 한도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오히라가 한국에 무상으로 3억달러를 주기로 합의했다고 하자 재정관료 출신인 이케다는 “물러터진 놈”이라며 분개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오히라가 “성내지 마라. 이게 싼 것이다. 시간을 끌면 더 비싸진다”고 맞섰고, 결국 이케다도 마지못해 승인했다고 한다.

과거사 청산이 아니라 과거사 소멸

그러나 액수 이상으로 김-오히라 합의가 남긴 함의는 무거웠다. 무엇보다 도대체 이 돈이 무슨 돈인지 알 수 없어졌기 때문이다. 총액 6억달러를 메우기 위해 마련된 무상, 유상, 민간차관이라는 명목에는 청구권이라는 개념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제1차 회담에서 오히라는 “과거사에 기초해 청구권을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면서 “한국의 독립에 대한 축하금, 즉 과거 종주국이 새로운 독립국가의 경제자립을 위해 협력한다는 의미로 주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종필은 “구체적인 표현에 대해서는 나중에 협의하겠지만, 기본적으로 일본측의 생각으로도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2차 회담에서 오히라는 “한일 국교정상화를 축하하고 양국 간 우호친선을 기원하며, 한국의 민생안정과 경제발전에 기여하기 위해”라고 적힌 토킹 페이퍼를 김종필에 제시했다. 이에 대해 김종필은 “청구권 문제를 해결하고 한일 간의 경제협력을 증진하기 위하여”라고 규정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무상, 유상이라는 자금 제공을 ‘청구권 요구에 대한 지불’이라고 명시하지 않은 채 단지 ‘청구권 문제의 해결’이라고 두루뭉술하게 말함으로써 이 돈이 한일 간의 과거사 처리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라는 일본측 해석에 오히려 힘을 보탠 셈이 됐다.

즉 일본의 식민지배로 인해 발생한 온갖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과거 11년간이나 으르렁대온 청구권 협상을 해왔는데 결국 당초의 목적과는 전혀 무관한 결과를 도출하는 역설을 연출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김종필-오히라 합의는 한일 간의 ‘불편한’ 과거를 청산하기는커녕 과거를 따지는 것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든 ‘과거사 소멸’ 행위에 다름 아니었다.

더욱이 김종필은 일본측과의 회담에서 청구권 총액 달성에만 집착해서일까 이후 한일관계에 두고두고 화근이 될 만한 언급도 남겼다. 1962년 10월22일 오후에 열린 회담에서 이케다가 독도 영유권 문제를 ICJ에 상정하자고 제안하자 김종필은 두 차례에 걸쳐 아예 독도를 폭파해버리자고 말했다. 김종필은 오히라와 청구권 담판을 벌인 11월12일에는 ICJ 상정에는 반대 의사를 피력했지만 그 대신에 제3국에 조정을 맡기자고 역제안했다. 일본측 외교문서는 여기서 제3국은 미국을 가리키는듯하다고 해석했다. 더욱이 김-오히라 합의 직후 방한한 오노 반보쿠(大野伴睦) 일본 자민당 부총재 일행에게 김종필은 “1년 정도 제3국 조정에 맡겨 보고 해결되지 않으면 ICJ를 포함해 적당한 조치를 취하면 어떨까”라며 사실상 일본측 요구에 호응했다. ICJ 상정이든 제3국 조정이든 한국이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인정했다는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김종필씨는 당시 37, 38세의 나이로 일본어를 잘하고 똑똑한 젊은이였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용기를 갖고 있었다. 당시 학생들이 한일회담을 반대한다면서 들고 일어나 자칫하면 정치 생명만이 아니라 생리적 생명까지 걸려있었다. 그렇게 불 속의 밤을 줍는듯한 위험한 입장이었는데도 그는 침착하고 훌륭했다. 사념을 버리고 상대방의 입장, 자기 입장을 생각해 공정하고 상식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는 태도를 나는 보았다.” 나중에 오히라는 이렇게 김종필을 평가했다.

이동준 기타큐슈대 국제관계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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